[2017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3_“함께 가요, 내가 있을게요” 회원합창단으로 참가한 로리가 느낀 민우회의 힘
★기획3
“함께 가요, 내가 있을게요”
회원합창단으로 참가한 로리가 느낀 민우회의 힘
로리(허은애) | 여는 민우회 회원
나는 첫 번째 모임 초반부터 눈물을 흘렸다. 30주년 회원의 밤 합창 순서를 위해 열 몇 명이 모인 자리였다. 그리고 후원의 밤 전날 누워서도 울다가 잤다. 잘 알려진 노래에 활동가 달래가 바꾼 가사를 붙였는데, 단순하면서도 무척 마음을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유치원 때 사귄 소꿉친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3살 많은 오빠의 라면을 끓였다. 기껏 대학에 가서도 남성 선배가 여성 학우보고 테이블 상석에 앉지 말라고 지시하는 꼴을 봐야 했다.
특히 최근 2, 3년 동안은 자고 일어나 눈뜨면 화낼 거리가 계속 생겼다. 너무 지쳐서 일부러 새로운 키워드나 이슈를 발견해도 눈을 질끈 감고 더 알아보지 않기도 했다. 죄책감도 들었지만, 늘 누군가를 욕하고 저주하고, 당연한 이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 때문에 화내고, 한심해하고, 탄식하는 과정에서 오는 피로감과 무력감이 생각보다 훨씬 컸다.
회원합창단 노래의 “앞으로도 가끔은 눈물 나고 화도 나겠지만, 돌아봐요 함께 걸어온 30년의 용감한 변화”라는 가사는 그런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나를 다독여줬다. 돌아보면 정말 가사대로 그랬다. “뉴스나 예능 봐도 참을 수 없네 알고지낸 사람들 점점 멀어지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여성 주인공이 남성 주인공한테 존댓말을 쓰는 게 거슬리면 더 못 보겠고, 동료가 여성혐오를 내포한 언사를 하면 같이 일하기가 싫어졌다. 불편한 이유는 분명히 있는데 인생은 점점 더 뾰족해지고, 고슴도치처럼 외롭게 가시를 세우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행히도 여성주의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새로 생겼고, 그 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모르고 일 년에 한두 번 마주치는 사이라도 좋았다. 회원합창단 첫 모임에서 지휘자 하나가 “멜로디는 아니까 한번 그냥 다같이 불러봐요” 했을 때, “앞으로도 화나는 일 계속 생기겠지만, 지치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나아가자”는 가사에 이르러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른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후원의 밤을 앞두고 긴장 속에서 잠을 청하며 속으로 노래를 불러보다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 가사를 쓴 사람은 정말 민우회를 사랑하는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활동가 달래와 바람, 지휘자 하나와 반주자 나온, 그리고 합창단원인 이온, 나무, 은설, 스머프, 늘아, 엘라, 모후아, 수미, 프마, 아미라, 라일락, 달래, 승짱, 이영은 모두 4주 동안 모여서 연습했다. 항상 스트레칭과 체조부터 시작해 호흡과 아르페지오로 입과 목과 몸을 다 풀고 본 연습에 들어갔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고, 다들 파트 안에서의 조율과 전체로서의 화음을 신경 쓰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결전의 그 날, 어떻게 그 십여 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나온의 반주 소리와 웃는 표정을 이끌어내려고 먼저 계속 웃고 있는 지휘자 하나가 생각나고, 조명이 매우 뜨거웠다는 것? 그리고 모두 웃으면서 박수 쳐주었다는 것이 스틸 사진처럼 하나씩 기억난다.
합창 순서를 기다리면서 잠시 긴장을 잊은 순간도 있었다. 회원과 활동가들이 민우회의 30년을 대표하는 활동과 사업, 업적과 변화를 카드 형식으로 발표한 부분이었다. 그 중 몇몇 사건은 종이신문의 활자로 내 기억 속에도 남아있다.
민우회가 이끌어 낸 30개의 변화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삶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카드를 들고 각자의 짧은 발표가 이어지자 커다란 회장을 가득 메운 회원과 가족들이 큰 소리로 박수를 치고 호응했다. 여상 졸업생이 입사 과정에서 외모 차별을 받고 호주제 같은 악법이 존재할 때도 다들 같은 변화를 바라면서 함께 분노했겠지. 우리는 그 때부터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어술라 K. 르 귄은 “사랑은 바위처럼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빵처럼 만들어지고 또 계속 다시 가공되고, 늘 새로워지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2017년 9월 12일 30주년 후원의 밤에서 내가 느낀 사랑과 열정은 30년 간 모든 회원과 활동가들이 계속해서 정성껏 빚고 다듬어 낸 결과물이지만, 결코 최종 완성물이 아니며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이어나갈 힘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너무도 다른 존재지만, 여성주의 안에서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로리(허은애)
독거노동자 로리. 커피와 길모어걸스를 좋아해서 로리. @allegr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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