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_우리들의 융기(隆起)로 떠받치는 세상
기획
우리들의 융기(隆起)로 떠받치는 세상
정혜진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교육선전국장 | 나 자신을 존중하면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32년째 학습 중입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H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고자 ‘H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학생연대’가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학생연대는 H교수에 대한 정직 3개월 처분에 항의하면서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생·대학원생 당사자들과 함께 대학 내 성폭력의 현실을 공유하고 다양한 제도적·문화적 개선 방향을 논의하는 간담회가 진행됐다. 4월 11일에는 교육부 장관이 참석하는 제도 개선 간담회가 진행됐다.
“우리 둘의 융기로 떠받치는 세상 나는 이미 닻줄을 풀었구나”
– 고정희, <겨울 노래 –편지12>중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SNS에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폭로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상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강간문화는 종종 피해자 스스로도 자기 존재를 비난하게 만든다. 그 때문에 피해자는 긴 시간 동안 자기혐오와 싸우기도 하고, 그에 지칠 때면 깊고 무시무시한 방향 없는 원망과 분노를 허공에 쏟아내기도 한다. 깊고 캄캄한 시간 속에서 홀로 되새김질하며 아파해왔을 이야기들을, 수많은 여성들이 젠더 폭력과 싸우자며 자기 증언으로 꺼내드는 것을 보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당시의 증언이 남성중심사회 비판과 페미니스트로의 자기정체화로 이어지면서 다수의 여성주의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데로 나아갔다면, 오늘의 미투운동은 개인에 대한 폭로에서 출발해 그러한 성폭력을 양산한 한국 사회 각 분야(대학가 미투, 직장 미투, 예술계, 방송계, 정치계, 종교계의 미투 등)의 구조를 보게 한다. 성폭력을 근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 즉 성폭력을 조장·비호한 집단의 문화가 변화하거나 개인의 고발이 제도적 지지 및 합당한 가해자 처벌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에 대한 성찰을 추동하고 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다수의 대학 내 성폭력이 권력에 의한 위계형임을 주지하고 근절 방안을 논의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대학이라는 장소에서 젠더 권력이 노동과 교육에 대한 권력과 어떻게 교차하며 작동하는지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성폭력이 노동자 통제 수단이라는 것, 즉 여성노동자 섹슈얼리티가 지배·착취 됨으로써 여타 노동조건에 대한 주장 또한 억압되면서 노동 현장이 관리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대학은 위와 같은 현실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불안정 노동 현장이다. 대학은 연구를 직업으로 삼고자 대학에 진입한 이들의 노동권을 존중함으로써 그들의 교육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수많은 대학원생들은 대학에서 저임금, 무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자라는 신분을 부정당해 노동과 교육에 대한 권리를 모두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조교·연구원 임용 추천이나 연구비 지급은 물론 입학 여부와 논문 지도·심사 및 학술 활동 모두가 교수의 손에 달려있다. 교수들은 대학원생들의 불안정한 존재 기반이 침묵을 강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인권침해와 성폭력을 가하며 그들의 학습·연구·노동을 통제하곤 한다. 대학 내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자 자신의 연구실에서는 더 이상 여성 대학원생을 받지 않겠다며 ‘펜스룰’을 내세운 교수도 있다.
현재 영국에서 미투의 열기는 성별 임금격차에 항의하며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는 ‘페이미투’(#PayMeToo)로 퍼져나가고, 미국에서도 미투운동은 사회 각 분야(영화, 광고, 언론, 실리콘밸리 등)의 여성 배제와 직장 내 성차별에 대응하는 여성들의 결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4월 24일 여성, 노동, 인권 관련 약 60개 단체들이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을 결성해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1) 대학 또한 이미 학문의 전당이 아닌 불안정 노동 현장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대학을 지탱하는 다양한 학내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으며 노동조건이 개선될 때 우리는 노동 및 교육 통제로 기능하는 대학 내 성폭력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내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대학원생노조의 문을 두드리는 대학원생들은 대체로 사법기관이나 학내 인권센터·성폭력상담소·자치기구 등을 통해 사안이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다. 대학원생노조는 대학에서 젠더 권력이 여타 권력과 교차적으로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고, 개별 대학 범위를 넘어 대학원생 당사자들을 연결하는 전국 조직인 만큼 개인의 싸움이 벽에 부딪치는 지점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대학원생노조는 각 대학 분회 및 권역모임과 함께 폭력이 고발되는 현장에서 개인을 조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학원생들이 동료와 끈끈한 연대를 형성해 이를 토대로 위계와 맞서도록 지원하고 있다. 향후 노조의 방향 역시 대학원생들의 연대 단위를 어떻게 더 많이, 더 결속력 있게 만들어 낼지 고민하는 가운데서 구체화될 것이다. 이제 막 설립 절차를 완료한 신생 노조로서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우리는 닻줄을 풀었다. 암석권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땅이 주변보다 높아지며 융기(隆起)하듯 일어나고 또 일어날 것이다. 우리들의 융기가 세상을 떠받친다는 자긍심과 책임감을 굳게 붙들 것이다.
1) 박주연, 「미투, 타임즈업 운동…‘여성노동’ 이슈로 이어져」, 일다, 2018.04.17.; 박주연, 「“성별이 스펙이냐” 채용성차별 현황 속속들이 밝혀라!」, 일다,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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