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_892개의 경험과 생각으로 엮은 성폭력 사전
민우ing
892개의 경험과 생각으로 엮은 성폭력 사전
밍기뉴(박지영)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밍기뉴(라임 오렌지 나무)의 푸른 이파리가 떨어져도 사라지지 않고 이듬해 싹으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무엇이든 사라지는 것은 없단다. -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여성들에겐 일상이었던 성차별·성폭력 경험이 미투운동 이후, 공론의 장에서 폭발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 여성들은 ‘말하기’를 시작하였지만 이 언어들을 조롱하거나 왜곡하면서 그 경험들을 지우는 공격들 또한 마주해야 했다.
〈2019 함께 쓰는 성폭력사전(이하 함사전)〉을 기획하기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여기에 있었다. 상담소는 이 언어에 힘을 실어야 했다. 이 언어들은 온/오프라인에서 둥둥 떠다니는 ‘단어’가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에서 자주 겪고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리고자 했다. 여성들의 경험들을 엮기 위해 어떤 키워드와 내용을 중심으로 둘지 2회의 자문회의, n백번의 내부회의 및 고민(?) 끝에 4개의 단어를 다루기로 결정 했다. 110명의 여성시민들이 온/오프라인 말 모으기, 집담회를 통해 총 892개의 경험과 정의들을 모아주었다.
참여자들이 직접 적을 수 있도록 제작했던 〈함사전〉카드와 증정 굿즈 책갈피
동의/위력/강간문화/성인지감수성
성폭력과 관련된 많은 단어 중에서 이 4개의 단어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 번째, 동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다양한 맥락과 조건들이 수반되어야 함에도, 현재 물리적인 ‘폭행·협박’이 없었으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어도 동의 한 것으로 간주하는 법적인 동의개념이 존재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상황, 상태, 의사와 상관없이 ‘~ 했기 때문에’ 동의 한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남성중심적 성문화 또한 공기처럼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어떤 상황과 맥락·조건에서 동의한 성적 경험을 했다고 느끼는지를 모았다.
두 번째, 2018년 8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의 1심에서 “위력은 존재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며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분리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청소년도 아닌 성인 여성이 왜 저항을 못했느냐며 피해자를 향한 2차 피해들이 난무했다. 위력은 나이/성별과는 상관없이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 하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문제제기나 저항은 매우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위력적 상황을 느꼈는지를 담았다.
세 번째, 홍준표의 돼지발정제, 탁현민의 저서, 버닝썬 게이트, 승리·정준영 단톡방 사건 등 남성들의 불쾌하고, 폭력적인 행태들에 여성들은 ‘이것은 강간문화다’ 라고 지속적으로 이야기 했지만, ‘남자들 원래 단톡방에 그런 얘기 다 하는데?’, ‘정준영이 운이 안 좋아 걸린 거다, 안타깝다’라며 일상의 당연한 놀이가 왜 문제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45년 전의 돼지발정제부터 현재 2019년의 단톡방 문화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강간문화에 다시금 여성들의 분노(!)를 담았다.
마지막, 어쩌면 미투운동 이후 가장 많이 언급되는 동시에 거부의 목소리도 컸던 성인지감수성’이다. ‘감수성’이라는 단어에 꽂혀 그 단어가 사용된 의미와 맥락들을 지운 채 ‘재판을 감성으로 하느냐’ 며 비꼬던 일각들에게 일침을 가해야 했다. 성인지감수성은 과연 재판에서만 필요한 감각인걸까. 일상에서 성인지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상황들과 경험을 모았다.
동의는 ‘악수’이며 ‘연락’입니다. 누군가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을 때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악수가 아닙니다.
위력은 권력자가 말 한마디 없이 눈빛, 입김, 손짓 등으로 행사되기도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권력자의 언어적·비언어적 표현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강제합니다.
강간문화는 성폭력을 ‘놀이’ 또는 ‘관습’으로 여기고, 결국엔 성폭력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합니다.
성인지감수성은 차별적인 성별규범을 인식하고 알아차리는 눈입니다.
참여자들이 직접 적을 수 있도록 제작했던 〈함사전〉카드와 증정 굿즈 책갈피 4개의 단어에 대해 모인 이야기들 중 일부.
전체 내용을 엮은 〈함사전〉은 2020년부터 배포될 예정이다.
나아가는 성평등 문화를 꿈꿔본다
2018년 미투운동을 시작으로 활발하게 이야기 되고, 여성들의 경험을 통해 다시 한 번 수면위로 드러난 동의, 위력, 강간문화, 성인지감수성. 이 4개의 단어들을 892개의 생각으로 가득 채운 〈함께 쓰는 성폭력사전〉은 말 그대로 시민들이 연대하여 함께 쓰고 만든 사전이다. 성폭력은 ‘폭행·협박을 동반한 강간 또는 추행’ 같이 협소한 법적인 성폭력 개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차별과 폭력의 현실이라는 것. 기울어진 운동장에 다시 한 번 ‘평등’이라는 개념이 스며들길 바란다.
현재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가 활발히 활동 중에 있다. 위 사진은 2019년 9월 18일 형법 297조 강간죄의 구성요건인 ‘폭행·협박’을 ‘동의여부’로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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