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_결재해주시겠습니까?
민우ing
결재해주시겠습니까?
리오(김이오) |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주워 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잘 꺼내보려 연습중이에요.
최근 다양한 공간에서 페미니즘이 확산되며 가지각색의 역동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도 회사에서의 성평등은 멀게만 느껴진다. 커피 심부름과 외모 지적, 여성 상사를 찾아보기 힘든 유리천장이 여전하다는 성토가 끊이지 않는다. 작년 여성노동팀에서 진행한 여성직장인 집담회1)에서는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너무나 공감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이를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아마도 누군가의 문제제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응답할 수 있는 구성원들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변화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직장인들의 일상에서 조직문화에 대한 화두가 던져질 수 있도록 캠페인을 기획했다.
조직문화가 폭발하는 현장, 바로 점심시간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메시지를 전하면 좋을까? 회사가 밀집한 서울 종로의 점심시간이 떠올랐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바삐 움직이는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은 ‘메뉴 선택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수저를 놓고 물 잔을 나르는 역할은 매번 누가 하고 있는가?’ 등등 매일 조직문화의 역동이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다. 그래, 그 현장의 한 가운데에서 조직문화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해보면 어떨까? 이목을 끌 수만 있다면, 이를 본 직장인들이 그날 점심을 먹을 때나 사무실에 돌아가서 화젯거리로 삼으며 조직문화에 대해 한 두 마디라도 나눠보지 않을까?
우리는 캠페인을 통하여 오늘도 고군분투 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직장인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만약 조직문화 변화를 제안하는 내용이 담긴 포스터나 굿즈가 회사에 놓여있다면, 누군가 조직문화를 바꿔보자는 제안을 할 때 좀 더 지지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회사에 자연스럽게 둘 수 있는 굿즈를 기획해보게 되었다. 어떤 품목이 좋을지 온라인으로 사람들의 의견을 받기도 했는데 ‘갑티슈’가 선정되었다. 그렇지, 쓰임이 많은 갑티슈에는 메시지를 넣을 칸도 많고, 회의실이나 탕비실에 놓여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말이야. 이런 고민들 속에서 만든 갑티슈, 부채, 포스터를 거리 캠페인을 진행할 때 직장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뭉친 근육은 매일매일 풀어줘야 하듯, 사무실 조직문화도 매일매일의 스트레칭처럼 돌아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캠페인의 제목을 ‘조직문화 스트레칭’으로 정했다.
조직문화 스트레칭 캠페인 굿즈
상사, 조직문화 변화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
“선배, 여자치곤 일 참 잘 하시네요~”
“발표는 김대리가 하고, 자네는 서포트 해.”
“이렇게 예민해서 사회생활 하겠어?”
여성에 대한 편견, 반말, 외모평가, 유리천장 등등 직장생활 속에서 쏟아지는 문제적 말들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퍼포머들이 이 말들을 멀리멀리 받아쳐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1. 사무실의 말, 말, 말〉로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직장인들이 ‘이게 뭐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유심히 바라봤다. 그런 말들은 문제적이라는 메시지가 직장인으로 가득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전달 될 때, 누군가는 뜨끔하고 누군가는 통쾌했을 것이다.
사실 조직문화 변화의 실질적인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상사들이다. 다른 사람에게 반말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유머를 통하거나 통하지 않게 하는 등 그 조직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지나가던 한 상사가 함께 있던 직원에게 “나 정도는 괜찮지 않니?”라며 답정너2)처럼 질문하는데, 직원은 대답을 피하며 허허 웃기만 하였다. 참 ‘웃픈’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사람과 존댓말로 대화하는 상사가 좋더라~”
“조직문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는지 고민하는 상사가 좋더라~”
“막내나 여직원의 역할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상사가 좋더라~”
우리는 직장인들이 퍼포먼스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장면을 기획하였다. 지나가는 직장인 무리에 상사 한 두 명은 섞여 있기 마련이니, ‘부장님, 결재해주세요~’라고 부르면 누군가는 자동 반사처럼 돌아보지 않을까?
문제적 조직문화를 바꾸려는 제안이 담긴 결재서류를 내밀어 직접 읽어보고 사인하도록 하는 〈#2. 이런 상사를 찾습니다〉참여코너에 많은 직장인들이 반응했다. 큼지막한 ‘다화탕커’, ‘외나연결’3)이 적힌 배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직장인들에게 다가갔다. “결재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니 일제히 한 사람에게 눈길이 쏠렸다. 마치 준비된 각본이라도 있었던 듯 “부장님, 팀장님, 과장님 읽어보세요~”라며 본인들의 상사를 부추겼다. 직원들의 호기심과 환호 속에서 상사들은 “으흠, 그래 나도 이렇게 생각해”라며 펜을 들고 결재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 경험이 사무실에서의 실제 변화로도 이어지기를!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아지는데, 과연 회사는?
캠페인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일고민상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평소 직장생활에서 고민하던 문제가 있었는데, 거리 캠페인을 보며 해결하고픈 용기를 얻어 걸려 온 전화였다. 캠페인 메시지를 두고 일부 남성들은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여성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으로 회자되었고, 무엇보다 결재서류에 사인하는 퍼포먼스에 참여했던 사람이 바로 그 회사의 꽤 높은 직급의 상사였다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있을 거라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캠페인 당시 현장을 지나치던 수많은 직장인들의 일터에서도 긍정적인 역동이 생겨났기를 기대한다.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포스터와 굿즈를 적극적으로 받아가는 모습을 보며, 조직문화 문제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의 문제제기와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이에 대한 회사의 응답과 의지가 중요한데, 회사는 그곳 경영진의 관점과 운영방식이 회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2019년 6월, 서울 종로 젊음의 거리에서 진행했던 조직문화 스트레칭 캠페인. 사무용품인 가위, 집게 등으로 문제적인 〈#1. 사무실의 말, 말, 말〉을 받아쳐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1) 2018년 여성노동팀은 여성직장인 집담회, 인터뷰, 온라인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회사의 조직 문화를 고민하는 ______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싶은 책〉을 제작했다.
2) 원하는 답을 정해놓고 상대에게 질문하는 행위 혹은 행위자를 이르는 표현. ‘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의미.
3) 조직문화 스트레칭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든 줄임말 메시지. ‘다화탕커’는 ‘다’과 준비, ‘화’분 물주기, ‘탕’비실 정리, ‘커’피 대접 등 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분명히 일인 것들을 조직 구성원들이 함께 하자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 ‘외나연결’은 ‘외’모, ‘나’이, ‘연’애, ‘결’혼 등에 간섭하는 말을 하지 말자는 의미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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