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_‘어린 여자아이들’은 강력한 여성이고 당신의 세계를 박살낸다
[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어린 여자아이들’은 강력한 여성이고 당신의 세계를 박살낸다
2008년, 많은 청소년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다.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함께한 청소년에게 ‘기특하다’고 이야기했고, 촛불을 든 여고생 캐릭터 ‘촛불소녀’를 만들었다. 교복 입은 소녀를 부각함으로써 청소년을 특수하고 비정치적인 존재로 대상화했다. 청소년 운동은 사회가 여성 청소년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촛불소녀’ 이미지 소비를 비판하며 청소년을 기특한 존재가 아닌 동등한 시민으로 대하라고 꾸준히 이야기해왔다.
그로부터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 스쿨 미투를 이야기 하는 사람의 태도를 보며 아직 사회는 바뀌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른들’은 스쿨 미투에서 피해의 심각성에만 집중했다. 학교를 고발하기까지 필요했던 용기, 수많은 청소년이 최전방에서 싸웠던 사실은 축소되었고 얼마나 끔찍한 피해가 있었는지만 연일 보도되었다.
청소년이 아무리 투쟁하여도 사회는 청소년을 그저 기특해하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터졌다. 여성을 협박해 성착취 동영상을 찍게 하고 그 영상을 텔레그램으로 유포 및 판매한 사건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일어난 뒤, 사회는 청소년 피/가해자에게 집중했다. 청소년 피해자를 유독 안타깝게 여겼고 청소년 가해자는 더 악랄한 것으로 간주했다.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할 순수한 존재인 동시에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 여겨졌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동료라고 여겼던 사람이 날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다가 막막해졌다. 여성 청소년은 언제나 보호를 말해왔지만 이런 식의 보호를 말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바라보며 무력감을 오래 느꼈다. 만약 내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피해자였다면, 부모에게 ‘성적 일탈’같은 프라이버시를 알리겠다는 가해자의 협박을 받고 ‘보호자’인 부모에게 ‘보호’를 요청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수없이 받아야 했던 부모동의서를 생각하니 대답은 하나였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性)에 대해선 부모의 허락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청소년은 성에 대해 무지하고 침묵하기를 강요받았고, 얌전히 ‘지킴’ 받는 존재로 남아야 했다. 삶은 부모의 통제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 청소년이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가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였고 부모에게 알리겠다는 협박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소년의 성적 욕망을 부정한 현실이 청소년 성착취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지킴’은 실패했다. 청소년을 성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은 더 이상 보호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보호의 형태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배제와 차별이 아닌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청소년이 통장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것, 응급실에 가기 위해 보호자 없이 구급차를 부를 수 있게 하는 것, 섹스토이와 여러 형태의 콘돔 구매를 허용하는 것* . 이런 단편적인 것만 떠오르다, 경험 하나가 떠올랐다.
*일반 콘돔은 나이에 관계없이 구매 가능하다. 하지만 초박형, 돌기형 등 소위 ‘기능성 콘돔’의 경우 청소년은 구입이 불가하다.
올해 초,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서는 청소년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성적 욕망과 감각에 대해 성찰하고 새로운 섹슈얼리티 담론을 만들기 위한 콘돔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친구에게 임신중절약을 전달하기 위해 콘돔 전시회에 그 약을 가지고 갔다. 이 임신중절약은 참 이상한 경로로 내 손에 들어왔다. 내가 참여해있던 청소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한 여성 청소년(이하 A)이 들어와서 임신을 한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었다. A는 부모 용돈이 끊겨 임신테스트기조차 살 수 없는데 청소년이라 아르바이트도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임신중절약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사이 A는 월경을 시작해 다행히 임신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성 청소년이 이 약을 필요로 했고, 나는 그에게 약을 전하게 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여성 청소년이 상대방에게 콘돔을 요구하고 안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돈을 벌어 빨리 임신테스트기를 구해 안심할 수 있었다면?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속 익명의 사람들이 아닌,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이 섹스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러한 가정조차 말하기 어려운 환경이기에, 육성으로 고민을 처음 털어놓았던 곳이 콘돔 전시회였다. 그 공간은 안전했고, ‘성’은 비청소년이 되어야만 허용되는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내 친구의 여러 경험 또한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었다.
최근 법무부가 여러 성폭력 범죄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예비음모죄 신설* 이나 대상청소년 조항 삭제** 등은 환영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의제강간*** 연령을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법은 쉽게 사회의 상식이 된다. 의제강간 연령이 상향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이를 ‘청소년은 섹스의 주체가 될 수 없다’로 해석할까 우려된다.
*합동강간, 미성년자 강간도 예비·음모죄를 처벌하는 살인 등과 마찬가지로 중대범죄 취급하여 실제 범행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준비하거나 모의만 해도 예비·음모죄로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출처 법무부)
**성매수 대상이 된 아동·청소년이 ‘자발적 성 매도자’인 피의자로 취급되어 소년원 감치 등 보호처분 대상이 됨에 따라 신고를 주저하게 되고,
가해자는 이를 악용하여 착취를 강화하는 등 보호의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기에 ‘대상 아동·청소년’에서 ‘피해자’로 변경, 처벌 대신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출처 법무부)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특정 연령 이하의 아동과 성행위를 할 경우 처벌 하는 것을 이른다.
사회의 한 집단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질 만한지는 국가가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제강간연령 상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청소년을 무성적 존재로 여기는 사회문화를 방증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교내 연애 금지, 남녀 청소년 둘이 숙박업소를 이용할 수 없는 법 등. 물론 나이와 성별에 따른 위계가 여성 청소년들을 더 성폭력으로부터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청소년의 성적 주체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여러 고민과 논의가 더 섬세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 2018년, 미국 체조 대표팀 전 주치의였던 성폭력 가해자의 재판에서 피해자 카일 스티븐스가 한 말이다. 이후 이 말을 여러 운동 장면에서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인 동료는 이 말에 의문을 표했다. “나는 어리고 강력한데?” 동의한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강력한 여성일 수 있고 이미 남성연대를 균열내고 있다. 여성 청소년으로서 보호를 요구하지만, 우리는 보호 받아야 할 대상‘만’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을 특별하게 보지 말고 동참해 달라. 배제와 차별의 보호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범주에 여성 청소년을 포함시키고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
양말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WeTee/
여성 청소년입니다. 동등한 시민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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