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_남성 캐릭터가 스스로 김치를 꺼내먹나요?
[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
남성 캐릭터가 스스로 김치를 꺼내먹나요?
아무렇게나 구겨져 누워 좋아하는 유튜버의 새 영상을 보거나, 아껴뒀던 드라마를 정주행할 때의 행복. 빵 터져서 깔깔대고 때로는 감동받아 찔찔대며 콘텐츠에 빠져든다. 하지만 눈꼬리를 삐죽하다가 결국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들이 있다. 육성으로 욕하며 댓글을 달고, 시청자 게시판에 문제제기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순간도 있다. 무수히 콘텐츠가 쏟아진다는데 페미니스트가 맘 편히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다.
뭘 봐야하지?
영화의 성평등 지수를 파악하는 기준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질문들이 있다.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하는가?’, ‘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그 대화의 주제가 남자에 관한 내용 이외의 것인가?’ 벡델 테스트1 라 불리는 이 세 가지 질문은 우리가 콘텐츠를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지나친 남성 중심 콘텐츠 시장에 문제의식을 던지는 물음이 되기도 한다. 위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으면 성평등한 콘텐츠일까? 조혜영 영화평론가는 “벡델 테스트는 물건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자가 나오느냐를 조사하는 최저 기준”이라 말하기도 했다. 여성 캐릭터는 이름 없이 누군가의 아내, 엄마, 그냥 ‘여자’이거나 계속 죽기만 하는 시체로 나오는 영화가 허다하기에 이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영화를 넘어 더 다양한 콘텐츠에 더 복잡한 질문이 던져지면 어떨까? 그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더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아지지 않을까?
‘○○님이 들어왔습니다.’
올해 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의 프로젝트는 페미니스트들과 모여서 미디어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페미니즘 관점으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었다. 반가웠거나 화가 났던 장면에 대해 말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질문 만들기!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콘텐츠를, 어떤 생각을 하며 보는지. 만나서 신나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3월을 앞두고, 야심차게 온라인 설문을 열고 오프라인 집담회를 준비하던 참이었다. 유례 없는 코로나19 재난이 찾아왔다. 처음해보는 재택근무가 시작되고 동료들도 만날 수 없게 됐다. 페미니스트들과 어떻게 만나지?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연쇄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위기에 봉착하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 법.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과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5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이용해 온라인 집담회를 열었다. 당시 화제를 모았던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잘 될까? 우려와 달리 익명의 자아로 만나게 된 참여자들은 첫 만남의 어색함 없이 ‘ㅋㅋㅋㅋ’ 웃으며 채팅했다.
남성 캐릭터가 스스로 김치를 꺼내먹나요?
여성 캐릭터가 남편에게 김치를 꺼내줬던 장면을 얘기하자 ‘어휴’ 앓는 소리가 채팅창에 줄줄이 올라왔다. “남성 캐릭터가 스스로 김치를 꺼내먹나요?”, “남편은 왜 집안일을 안 합니까?” 참여자들은 분개하며 질문을 만들었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에는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욕망을 표출 하나요?(사랑 말고)”, “모성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 외에 다른 상상력은 없나요?”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예능에 대해서는 그간 쌓여왔던 분통이 터지며 “출연자에게 애교를 시키나요?”, “여성 출연자의 외모를 평가하나요?”, “장애를 웃음요소로 이용하나요?” 차별과 혐오를 짚는 질문이 만들어졌다.
6월에는 ‘넷플릭스 파티’라는 확장 프로그램을 이용해 배우 라미란 주연의 영화 〈정직한 후보〉를 온라인으로 함께 봤다. 참여자들은 주연 캐릭터의 활약에 실시간 채팅으로 함께 환호했다. 빠르게 지나갔지만 음향 오퍼레이터로 여성이 등장하는 것을 함께 발견하고 반가워했는데, 이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라도 여성이 등장하나요?”라는 질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꼭 성별이 전환되는 방식으로 여성이 나오면 되는 걸까? 그냥 더 다양한 역할로, 더 많이, 여성들이 나오면 어떨까?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몇 차례 연기 끝에 진행하게 된 오프라인 집담회는 포털 웹툰 〈정년이〉, 〈남남〉,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마스크를 썼지만 좋아하는 작품을 ‘영업’하는 참여자의 얼굴이 얼마나 신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반말하고 키스하는 남성 캐릭터에 대해 얘기할 때는 같이 광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표정과 목소리를 더한 뜨거운 대화 속에서 더욱 다양한 질문들이 만들어졌다. “중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묘사되나요?”, “혈연 가족만을 정상 가족으로 그리고 있나요?”, “왜 러브라인은 이성애 밖에 없나요?”, “너무 많은 플라스틱 제품이 등장하고 버려지지는 않나요?”
내일의 변화를 만드는 오늘의 질문
이렇게 온라인 집담회 58명, 오프라인 집담회 13명, 웹사이트 온라인 설문 응답에 41명까지. 총 112명의 참여자와 함께 미디어 콘텐츠에 던지는 질문 총 220개를 만들었다. 이 질문들은 명쾌한 답이 있거나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해야 할 테스트도 아니다. 콘텐츠를 새로운 관점으로 읽어내고, 다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들이다. 다른 상상이 가능해질 때 긍정적인 변화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미디어X페미니즘] 오늘의 질문, 내일의 변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더 다양하고 평등한 미디어 콘텐츠를 상상하는 매개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일의 변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디어 콘텐츠를 보고 있을 당신, 변화를 꿈꾸는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p.s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주목한 장면, 신랄한 코멘터리와 질문을 엮어 작은 책으로 발간합니다. 책자 배포 소식은 민우회 홈페이지와 SNS로 곧 안내될 예정!
1)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의 연재만화 〈주목할 만한 레즈비언들 Dykes for Watch Out For〉 에피소드 중 ‘규칙(The Rules, 1985)’에서 두 주인공이 볼만한 영화를 고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언급된 세 가지 규칙이 ‘벡델 테스트’가 되었다. (조혜영,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2020. 참고)
호연(강호연)
❚여는 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아, X발, X나 더럽게 X같네” -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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