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6월호 [민우ing] 추행의 '고의'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 상담소의 사건 지원 이야기
▣민우ing
추행의 ‘고의’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 상담소의 사건 지원 이야기
최김하나(하나)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사로부터 추행과 부당행위를 겪어 이를 처벌하고자 고소하였지만 상사의 행위에 고의성이 없다는 이유로 1,2심 모두 무죄 판결이 나왔다면? 게다가 상사는 사건 당일 당신이 결근했다고 주장하며 근태일지를 조작해 증거로 들이밀고, 주변인과 함께 위증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0대 후반의 여성인 영이씨(가명)는 2010년 가을, 제빵 기술을 배우고자 학원 등록과 함께 A라는 인력파견 업체를 통해 B식품회사 제과점 제빵 보조로 취업 했다. 그런데 입사 초반부터 제빵실 내 직속상사인 제빵사 모씨(가명)가 제빵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명목을 내세워 개인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영이씨 옆을 지나갈 때마다 영이씨의 엉덩이 부근을 손끝으로 스치며 지나가곤 했다. 처음엔 ‘실수로 스쳤겠지’라고 생각했던 영이씨도 모씨의 행동이 반복되자 불쾌한 감정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입사한 지 5일째 되던 10월 6일, 영이씨가 작업대에 서서 빵 포장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모씨가 영이씨 옆에서 넘어지는 척을 하며 영이씨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엉덩이에 닿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제빵실에는 영이씨와 모씨 둘 뿐이었고 이를 목격한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당황한 영이씨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모씨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제빵실 밖으로 빠져나갔고 당장의 문제제기를 하기엔 자신의 위치가 불리하다고 생각한 영이씨는 일단 참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영이씨는 A파견업체 담당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통해 모씨의 추행을 비롯한 부당행위를 언급했고, 담당자는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결국 입사한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영이씨는 B제과점으로부터 근태가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게 되었고, 그 후 약속된 날짜에 급여 지급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더 이상 참지 않고 모씨의 행위를 B제과점 본사와 경찰에 알리고 고소했다. 영이씨는 당연히 모씨가 잘못한 행위에 대해 정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1심 재판부는 ‘피해자(영이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피고인(모씨)에게 추행의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
영이씨는 1심 판결 직후 상담소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영이씨의 말처럼 판결의 요지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재판부는 1) 제빵실이 비좁아 실수로 스칠 수 있고, 2) 실수를 가장한 고의적 행위라기엔 추행 내용이 이례적이며, 3)피고인 모씨가 추행의 성향을 의심할 만한 특별한 정황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재판부의 판단처럼 정말 실수로 발생한 일이라면, 비좁은 공간에서 모씨는 이미 반복적인 신체접촉이 있었으므로 훨씬 더 조심했어야했고, 우발적 상황에서는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제빵실은 신체가 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좁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례적이지 않은 추행 행위’나 ‘추행의 성향을 의심할 특별한 정황’이라는 것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잘못된 성폭력 통념이 형사재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지요.
대부분의 성추행 사건은 이렇다 할 증거가 남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당사자의 진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기 때문에 누구의 진술을 더 신뢰할 것인가의 여부로 판결은 달라집니다. 재판부가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추행 사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씨는 진술에서 추행의 고의가 아닌 행위 자체를 전면 부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모씨의 진술은 ‘고의성’을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재판부의 판단에 의해 배척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순된 판결의 논리대로 라면 모씨의 ‘고의성’은 대체 무엇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상담소는 영이씨를 법적 지원하기 위해 자문 변호사에게 항소심에 대한 법률구조를 요청하는 한편, 단체 의견서를 작성하여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하였습니다. 또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수사/재판 과정상의 디딤돌/걸림돌’에 해당 판사를 걸림돌로 추천하여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이씨와의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재판 과정을 주시하였지요.
그런데 설상가상 모씨는 단순히 자신의 추행 혐의를 부인하는 것을 넘어 사건 당일인 10월 6일에 영이씨가 결근했다고 주장하며 조작한 근태 기록을 증거로 제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영이씨가 알아본 바로는 이 일을 문제제기 했을 무렵, 사건 당일 매장에 있던 다른 직원과 모씨의 이야기를 들은 점장이 전산 기록을 결근으로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영이씨는 우선 피해 당일 출근 시 이용한 교통카드 기록 등을 반박 증거로 제출하며 모씨와 그 주변인들이 위증과 증거조작을 하고 있으니 이를 주목하여 판결을 해달라고 2심 재판부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2심 재판부 역시 위증과 증거조작 혐의는 고려하지 않은 채 ‘1심 판결을 뒤엎을 만큼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영이씨도 본 상담소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재판부가 인정한 추행의 사실 조차 부인할 뿐만 아니라 증거조작까지 하며 적극적인 허위진술을 하고 있는 모씨의 행동이야말로 추행의 고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판결이야말로 사법체계가 성폭력 문제에 있어 여전히 가해자의 입장에 우호적임을 보여주는 ‘고의성’ 짙은 판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로써 이 사건은 발생한 지 1년 7개월이 지난 지금,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의 3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영이씨와 함께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대법원이 원심 파기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고의성 여부를 정확히 판단할 것을 적극 주장하는 한편, 모씨와 관련자들의 위증과 증거조작에 대해서도 별도로 대응을 해야 합니다. 모씨에 대한 민사 손해배상 청구도 진행 중이고, 근무 내역을 함부로 수정한 B업체에 대한 노동청 진정도 검토 중입니다.
사실 수 십 개월에 걸쳐 사법 절차를 진행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 피해를 인정받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 스스로 발 벗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현재의 법 체계에 많은 문제점이 있지요. 그 과정에 상담소의 지원이 영이씨의 의지를 튼튼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영이씨에게 이 싸움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정해보고, 무엇을 성취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겠는지를 물었을 때 영이씨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비정규직의 나이 많은 여성이라고 우습게보고 이런 행동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겠나.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는다면 나와 같이 약자인 다른 사람이 또 비슷한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들이 한 행동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인정받는 것이다. 어떤 결과든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라고요. 내가 경험한 부당함에 끝까지 맞서 싸우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존엄과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길임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모씨와 그 주변인들이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겠지요.
성폭력 사건에 있어 법적 해결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마저 공정치 못하게 처리될 때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의 사회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 상담소는 법 제도의 불합리함과 가해자의 뻔뻔함에 맞서 싸우는 영이씨의 싸움을 열심히 지원할 것입니다. 민우회원 여러분의 지지와 응원을 바랍니다!
* 이 글은 본 상담소에서 현재 상담 지원 중인 성폭력 사건의 내담자와의 협의에 의해 작성되어 수록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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