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8월호 [민우ing]여성주의 고전읽기 강좌 <나를 매혹시킨 여성학자>
▣민우ing
여성주의 고전읽기 강좌 <나를 매혹시킨 여성학자>
김진선(제이) ·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
여성주의 관련 글을 읽다 보면 몇 번씩 언급되곤 하여 왠지 찾아 읽고 싶어지는, 심지어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책 한 번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여성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혼자 공부를 하려면 도대체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 하지만 대학의 여성학 수업이 아닌 이상 평소에 여성학 고전을 다루는 강좌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있다 해도 너무 이론 위주의 학술적인 분위기일까 봐 괜히 수강신청이 망설여지곤 한다.
그래서 민우회에서는 작년, 늦여름 밤을 달구는 <여성주의 고전읽기 강좌- 열독-熱讀>을 열었고, 아니나 다를까 여성주의 고전 공부에 목마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강의 평가를 통해 이런 고전읽기 강좌 기획이 계속되기를, 또 책 내용 정리뿐만 아니라 그 저자의 삶에 다가갈 수 있는 강좌가 마련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해 주셨다. 이런 코멘트들을 그냥 지나칠 민우회가 아니다! 이 열망들을 냉큼 받아 안아, 올해 봄 민우회에서는 <여성주의 고전읽기 강좌 - 나를 매혹시킨 여성학자>를 준비했다.
열독 강의를 통해 수렴된 욕구들을 반영하여 이 강좌는, 그냥 단순한 고전 공부 이상의 어떤 것이었으면 했다. 그건 이런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상상이었다- 학계, 나아가 당대에 새로운 관점의 지평을 열었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던 여성학자들의 치명적 매력에 빠져드는 자리. 여성학자들을 내 삶의 든든한 ‘빽’으로 위치 짓고 그 ‘언니’들에게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조언과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리. 이 소망을 구현하기 위해 ‘나를 매혹시킨 여성학자’라는 핑크빛 컨셉을 잡았다. 강사분들이 ‘내가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과 책에 대한 주관적 애정과 해석이 포함된 강의를 해준다면. 참가자들의 마음과 삶에 더 쉽게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하여, ‘권김현영-정희진-김고연주-전혜은-전희경을 매혹시킨 애드리언 리치-사라 러딕-캐슬린 배리-주디스 버틀러-시몬 드 보봐르’라는 간지폭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그럼 대체 무슨 강의였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한 초간단 포인트.
1강, 권김현영님이 그리스 신화를 그린 그림과 리치가 쓴 시를 통해 ‘혁명적 존재의 시학, 본투 페미니스트’ 리치의 삶과 사상을 다루었다. 리치 자신이 여성 커뮤니티의 산물이었고 평생 여성들에 대한 사랑으로 공부하고 실천했음이 감동적이었다. 2강, 정희진님이 ‘젠더는 인식론(episteme)이다.’, ‘개념은 행위(practice)에서 형성된다’라는 두 문장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통찰과 인식의 전환을 (특유의 유머와 함께) 끝없이 던져 주며, 사라 러딕의 <모성적 사유>가 ‘성역할고정론’을 강화한다는 만연한 오해와 오독을 짚어 주었다. 3강, 김고연주님이 캐슬린 배리의 <섹슈얼리티의 매춘화>의 주요 문장들을 소개하며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기본적인 개념부터 성매매에 대한 현재의 쟁점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성적 실천에서의 여성 주체성에 대한 흥미로운 질의응답도 잇따랐다. 4강, 전혜은님이 그 어렵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저작세계에서의 위치부터 개념들까지 그림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다. 월가 시위에서의 버틀러의 멋진 연설 “우리는 불가능을 요구합니다”로 뜨겁게 강의를 닫았다. 5강, 전희경님이 시몬 드 보봐르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노년 연구의 선구적 저작이었던 <노년>의 역사적 맥락과 핵심 내용 그리고 보봐르의 실천적 면모에 대해 강의했다. 전체 다섯 강의를 아우르는 의미를 짚으며 마지막 강의를 마무리했다.
주옥같은 강의내용을 전부 널리 공유하지 못하는 건 무척 안타깝지만, 사실 강의 내용은 직접 강의를 듣지 않고서는 끝내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 법.
여성 커뮤니티가 배출한 학자인 애드리언 리치로부터 시작한 강의는 노년에도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했던 시몬 드 보봐르로 끝났다. 1강부터 5강까지 저마다 다른 분위기로 진행되었으나, 그렇게 다채로운 가운데 결국에는 묘하게 맞닿아 이어지는 맥락과 느낌이 있었다. 모두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특정한 여성의 현실에 접근하고 있었지만, 강좌가 끝나고 하나씩 떠올려 보니 모성·여성 정체성·커뮤니티·주체성·행위와 행위자·소외에 대한 각 이야기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듯하다. 제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제기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들이 지금 여기에 대입되면서, 그것들은 동떨어진 별개의 이론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여성학자들의 이론과 실천들은 앞선 여성학자 선배들의 활동에 연속된 것이었다. 강의를 했던 강사들 또한 지금 여기의 여성학자로서, 그리고 우리들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주의자로서 그 긴 역사를 이어가는 주체임이 와 닿았다.
시몬 드 보봐르를 강의한 전희경님은 “고전은 그것을 계속해서 읽고 인용하는 커뮤니티가 있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다섯 강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바로 강의를 하고 또 강의를 듣는 ‘우리’가 어떤 여성학자들을 ‘고전’으로서 지금 여기에 불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참가자 후기의 몇 문장을 또 옮겨본다.
“여성학자들의 삶과 이론의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싸움의 결과들 속에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진화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미국에서 살아온 학자의 문제의식을 내가 있는 이 사회에도 시간과 장소의 경계에 상관없이 적용시킬 수 있음에 여성범주의 공통된 삶의 문제들을 느낀다.”(토리), “왜 여성학자들의 계보와 학파는 뚜렷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는 바로 남성 중심 학문과 같은 커뮤니티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부터 서로 긴 인생의 목격자가 되고, 페미니스트들의 독자가 되어주며 공부를 하는 건 어떨까?”(면진)
버틀러 강의를 들었던 몇몇 활동가들은 농담으로 ‘인용과 반복 실천’이 어쩌고 하며 (그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강의 내용에서 파생된 페미니스트 유머를 나눴다. 그렇게 깔깔 웃다가 우리는 또 다른 어딘가 곳곳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자신의 일상적 삶에, 활동 속에, 심지어 농담 속에 ‘여성학자 선배들’을 ‘인용’함으로써 촘촘히 이어져가는 우리들의 긴 역사를 상상한다. 5x2, 10명의 여성학자와 함께한 <나를 매혹시킨 여성학자>가 그러한 역사 쓰기의 한 실천이었으면 하고, 앞으로도 이 역사 쓰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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