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10월호 [문화산책] <두 개의 문>, 페미니즘의 태도로 접근한 폭력의 구조와 질문들
<두 개의 문>, 페미니즘의 태도로 접근한 폭력의 구조와 질문들
나영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국장
“저희는 여성주의를 소재나 젠더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시선, 태도나 방법론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마마상>과 일명 ‘커밍아웃 3부작’ -<3×FTM>,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종로의 기적>-같은 영화들을 만들어 온 ‘연분홍 치마’가 왜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인터뷰어의 질문에 김일란 감독이 했던 답변이다. 얼마 후, 이 말은 8월 8일과 21일 2회에 걸쳐 진행된 ‘페미니즘으로 보는 <두 개의 문>’ 행사의 중요한 계기이자 타이틀이 되었다. 트위터에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전 프로그래머이자 영화학 강사인 손희정 님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행사는 순식간에 엄청난 호응을 얻으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후원과 자율입장료만으로 성황리에 진행이 되었다. 어쩌면, 이 자리를 적극적으로 반긴 많은 이들은 이미 누군가와 절실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개의 문>을 보면서 느낀 그 생생한 충격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그 실체를 드러내는 놀라운 관점의 차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말이다.
페미니즘과 <두 개의 문>
두 개의 단어는 언뜻 잘 연결되지 않는다. <두 개의 문>을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두 개의 문>에 페미니즘 영화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싶어서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발견했다. 페미니스트이자, 성적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아온 이들로서의 두 감독의 관점과 태도, 고민이 있었기에 이 영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알다시피 이 다큐멘터리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은 경찰들의 진술에 근거한 재연과 당시 현장에 있던 카메라의 시선, 이 참사에 대한 느낌과 의미를 이야기하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용산참사에 관한 그 어떤 기록들보다 강렬하게 관객들의 심장을 자극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관객들이 느끼는 그 자극의 실체가 연민이나 안타까움이 아닌, 불안과 분노, 고통, 스스로에게서 느껴지는 참담함이라는 사실이다. 관객들은 용산참사의 유가족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현장을 경험한 경찰들의 진술을 통해서 비로소, 이 참사를 유발한 거대한 폭력의 구조를 발견하고 이 사건을 타인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로써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경찰과 철거민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죽음의 현장을 보면서 건너편 건물에서 “영화 같다”는 감상을 내뱉던 경찰 간부들의 모습이나, 어디선가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제대로 된 정보나 질문의 여지도 없이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경찰특공대의 모습 속에서, 그 어느 어느 한 순간 즈음,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용산참사의 유가족들을 피해자로 재현하는 대신, 그 폭력의 시간대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만듦으로써 용산참사를 이 구조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페미니스트로서의 감독들의 경험과 고민이 묻어나는 지점이다. 그들은 이미 폭력의 구조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피해의 재현이 가지는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가 단지 피해자로서만 재현되는 순간, 사람들은 사건을 쉽게 타자화 시켜버리고 만다.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에서 우리는 그 사실들을 분명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성폭력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 분노하고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일상 속에서 폭력의 구조와 문화는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일상적인 성희롱이나 폭력에는 한없이 둔감하고 때론 자신 역시 그 문화 속에 동참하고 있으면서 성폭력을 ‘어떤 나쁜 놈들’의 일로만 치부하는 익숙한 그 태도들이야말로, 반성폭력 운동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는 <두 개의 문>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경험들과 맞닿아 있다. 제 3자의 위치에 서서 문제에 대한 해석과 평가만을 내리거나 쉽게 보호자 또는 해결자의 입장이 되고자 하는 가부장적 태도들을 넘어, 폭력의 재생산 구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일,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태도야말로 페미니즘이 끊임없이 노력해온 일이고 감독들이 고민해왔던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끔찍한 학살을 수행하는 이조차 특별한 ‘악마’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고가 결여된 채 명령에만 따르는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악마의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악의 평범성’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치열하게 고민해왔고, 그 고민은 계급, 인종, 성, 폭력 등 수많은 영역들을 넘나들며 이루어져 왔다. 이제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를 통해 그 고민들을 우리에게 다시금 던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그 구조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구조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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