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10월호 [민우칼럼] 성폭력 범죄의 양형에서의 ‘형사합의’,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성폭력 범죄의 양형에서의 ‘형사합의’,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장임다혜(시바) · 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
지난 8월 31일 대법원에서 개최한 형사법관 포럼에서, 성폭력 범죄의 1심 선고를 기준으로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 전체 사건에서 피고인의 집행유예 선고비율이 높아졌는데, 그 가장 큰 요인이 피해자와의 합의라는 분석결과가 발표되었다. 다시 말해, 최근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고 있는 “성폭력 범죄의 낮은 양형”을 둘러싼 문제의 핵심엔 ‘형사합의’가 존재한다.
형사합의란?: 성폭력 범죄에서 합의의 2차 피해
형사합의는 통상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면피하거나 처벌을 가볍게 받기 위해 피해자에게 범죄 피해에 대한 일정한 금전적 보상 내지 개인적 요구사항을 이행하기로 하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사법기관에 표시하기로 합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형사합의에 관한 형사소송법상 근거 규정은 없다. 그렇지만 형사합의 후 사법기관에 제출되는 피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표시(합의서)는 형사소송절차에서 일정한 법률효과를 가진다. 예컨대,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와 같은 범죄는 피해자와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고소라는 소송요건이 사라지므로 공소기각 판결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친고죄가 아닌 범죄의 경우에도 형사합의는 기소유예사유가 되거나 양형시 주요한 감경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형사소송의 관행상 형사합의는 교통사고나 폭행, 사기사건 등과 같은 형사사건에 휘말렸을 때 피의자나 피해자가 해야 하는 아주 일반적인 절차로 자리잡고 있다.
범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형사합의는 별도의 소송없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손쉬운 피해회복 절차일 수 있다. 피의자나 피고인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발생한 피해와 손실을 스스로 원상회복함으로써 반성과 사죄의 의미를 표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검찰이나 법원 역시 피해자와의 합의를 중요한 참작사유로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 가족들이 피해자의 집이나 직장, 학교로 찾아와 반복적으로 합의를 종용하고 강요하여 2차 피해를 경험한다고 호소한다. 심지어 합의해주지 않으면 성폭력 피해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겠다고 협박을 당하기도 하며, 연락도 없이 피해자의 집이나 직장을 방문하여 피해자에게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 다른 범죄에서와 달리 성폭력 범죄에서 형사합의는 피해자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적인 방향을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범죄에서와 달리 성폭력 피해자가 합의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합의종용과 강요로 인한 피해에 시달리는 이유는 성별화된 가부장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성폭력 범죄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범죄 피해자가 피해사실로 사회적 낙인을 부여받게 되는 상황,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로 가족의 명예와 위신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성폭력이 범죄 피해가 아니라 성적 관계로 인식되는 상황들 속에서 많은 피해자들은 위축되고 지지받지 못한 채 형사절차를 경험하게 되며, 가해자측의 합의 제안이나 종용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못하고 오히려 공포와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합의는 피해자를 울리기만 하는가?: 피해자들의 눈으로 형사합의 다시 보기
이렇게 성폭력 피해자를 둘러싼 불리한 사회적, 제도적 조건 속에서 형사합의 과정은 2차 피
해가 되기도 하며, 이 점에서 여성운동단체들은 성폭력 범죄에서의 합의종용 문제와 합의의 강한 동기를 부여하게 되는 성폭력 범죄에서의 친고죄 폐지를 주장해왔다. 지난 형사법관포럼에서 역시 법관들은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와 합의를 하였거나 합의금으로 일정 금액을 공탁했더라도 양형을 정할 때에 결정적인 사유로 고려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형사합의로 인한 2차 피해에 대해 근절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 방향이 형사합의를 결정적인 참작사유로 고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합의를 원하는 피해자들의 경험과 관점들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합의를 원하며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가해자측과 합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자신의 피해를 가지고 돈을 놓고 밀고 당기는 가운데 마치 성매매를 하듯 대가를 요구한다”거나 “피해에 대해 대가를 바라고 거래하는 것”으로 평가절하 해왔다. 그러나 이는 형사합의를 선택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태도일 뿐이다. 실제 가해자측과의 합의를 진지하게 고려하거나 합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핵심적인 요구를 살펴보면, 가해자의 진지한 사과와 반성을 바탕으로 한 사건의 해결방식으로 합의를 의미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죄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며 그에 합당한 책임을 이행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범죄를 피해자 자신 또는 타인에게 저지르지 않는 것을 원한다. 이를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가해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책임인정과 처벌이 아닌 피해회복이라는 책임 이행을 형사합의를 통해 충족할 수 있다면 형사합의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성폭력 범죄의 양형에서의 형사합의에 대한 개선방향은, 단지 합의를 양형요소에서 배제하거나 축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의의 과정과 내용을 피해자의 피해회복과 가해자의 반성 및 사죄라는 요구가 충족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형사합의를 원했는지, 합의의 과정에서 강요나 협박, 압력은 없었는지 혹은 2차 피해가 없었는지, 합의 내용이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위한 방향이었는지, 가해자의 책임에 대한 인정과 반성 및 사죄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한 평가를 통해 피해자와의 합의가 성폭력 범죄의 양형에 있어 중요한 참작사유로 고려될 수 있는지를 질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형사합의를 또 다른 사건해결의 장으로 변화시키는 시도가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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