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10월호 [생생한시각] 보복으로 치유되는 상처는 없다
보복으로 치유되는 상처는 없다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통영, 나주에서 어린이들이 성범죄의 피해자로 등장했다. 얼굴을 아는 이웃 아저씨들이었다. 나주 범인은 놀란 어린이에게 “삼촌이야, 괜찮아...”했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인권활동가이기 전에 여성으로 살고 있고, 딸을 두고 있는 처지에 할 말이 없다. 끔찍하고 무섭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것보다, 나쁜 놈을 처단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나쁜 놈들에게 보복을 하거나 성욕을 도려내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일까. 그게 궁금해졌다.
원인과 처방이 다른 대책
성범죄 등 강력범죄를 대처하겠다는 해결책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 요즘엔, 모두 알다시피 처벌강화가 피해자에 대한 지원보다 앞선다.
권인숙 교수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친고죄이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끌 만한 극단적인 사례만을 기준으로, 분노에 가득찬 실시간 보도로 만들어진 정서를 가지고 전반적인 성폭력범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런 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대응을 하면 일부한테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 전반적인 인권감수성 수준을 낮추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부의 대책은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로익바캉이 쓴 <가난을 엄벌하다>는 미국산 형벌국가가 어떻게 전 세계로 파급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로익바캉은 맨하탄에서 연구한 미국산 형벌국가라는 수출품이 워싱턴과 뉴욕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횡단, 런던에서 도착한 다음 전 대륙의 배급망을 통해서 유포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출발처는 20여년 전부터 '범죄 엄벌주의' 홍보 업무를 공식적으로 맡은 미합중국 국가기관이다. 범죄율이 정체, 감소하던 기간에 이 서비스로 모순적이게도 형무소 수감자 수는 이례적으로 4배나 증가했다"고 쓰고 있다. 결국 강력한 형벌정책이라는 서비스가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었다는 통계는 없거나 적은 반면, 서비스로 인해 감옥은 넘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서비스의 수많은 수혜자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연방사법부, 국무부, 경찰 및 형무 관련 행정기관들, 그와 연계된 준 공공기관 및 직업단체들, 피의자 변호단체, 언론 미디어, 형무 산업의 붐을 타고 세워진 사설 교도회사 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한국사회에서도 톨레랑스 제로 즉, 무관용 원칙이라는 말로 등장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무관용 원칙을 천명한 법무장관의 일갈은 용산참사, 쌍용사태 등의 과잉된 공권력 대응으로 드러났다. 결국 강력한 형벌정책이 목적으로 하는 종착점에는 범죄를 예방하겠다는 목적이 아닌, 다른 결론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조심스럽게 가해자의 얼굴을 들춰보자.
최근 서울지방경찰청(이하 서울청)이 주폭 척결을 표방하며 벌이는 치안단속을 보자. 서울청은 지난 6월 12일 "서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주폭단속 한달여 만에 주폭 100명 구속"이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구속된 주폭의 82명이 무직, 전과 평균 25.7범이다. 이들의 주된 범죄 사실은 영세상인등 서민들을 상대로 업무방해, 갈취, 폭행 등이다.
이 자료에는 “상습적으로 만취한 채 주민센터를 찾아가, 몸이 아픈데 왜 장애인 판정을 해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느냐”며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인근 약국․내과․분식집 등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욕설 및 행패 등 난동을 피운 피의자에 대해 주민 153명의 연명부를 제출받아 첫번째 주폭으로 구속하고“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 주민이 이웃주민을 고발하도록 부추기고, 이런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켜 사회에서 배제, 격리시키겠다는 조치가 정말 범죄예방에 근본적인 대책일까, 우리는 고민해 봐야 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절망을 딛고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방법이 아닌 사회구성원으로 들어서도록 만드는 체계가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본질에 다가가기
자유, 평등, 박애를 자신들의 국기에 담고 있는 프랑스 사회는 오히려 철저히 구획화 되어 있었고 뿌리깊이 차별적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시내가 구획한 도시의 공간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백인과 흑인, 아랍인이 사는 구역은 도로 하나를 차이로 확연히 구분된다. 치안상황이 그것을 증명했다. 짧은 여행으로 성급히 판단할 수 없겠지만 흑인이 몰려 사는 거리는 대낮에도 걸어 다니기가 위험하다는 주의를 끊임없이 들어야했다. 결국 슬럼화 된 지역의 치안상황은 위험한 것이 당연했고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구역들은 상대적으로 아주 안전했다. 교정과 통합이 아닌, 구획과 분리, 배제는 결국 삶의 질에 있어서의 차별을 결론으로 맺게 되지 않겠는가. 지금 주폭과 골목조폭이 없어져 당장은 안전할지 모르지만 어느 날 내가 주폭이나 골목조폭이 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는 어떠할까.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절망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끝없이 잘려나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에게 범죄를 이용해 국가권력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피해자를 구제하고 범죄를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라고 일러야 한다. 그리고 본질에 빈곤의 확대와 같은 근본적 문제가 도사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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