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10월호 [마포나루에서] 취미는 가을
취미는 가을 ♬
강선미(폴)·성평등복지팀
한동안 취미를 만들고 싶어서 이것저것 손에 안댄 것이 없었다. 책도 읽어보고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좀 봤다. 책은 생각날 때마다 뜨문뜨문 읽으니 다시 읽을 때마다 앞으로 돌아가 되새기느라 몇 달이 걸린다. 그림은 스케치 연습을 하려 연초에 호기롭게 값나가는 종이와 연필을 샀는데. 고양이, 강아지 한 마리씩 그렸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네.
영화관에 간 건 한참을 생각해야 떠오를 정도. 마지막으로 봤던 게 뭐였더라. 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던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하이틴 야쿠자>. 내용은 소위 주먹으로 어떻게 ‘정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건데 제목이 좀 이상한 조합이다. 제목 때문인지 주말이었는데도 영화관에 나를 포함해 열 명 정도. 다음 날 출근해서 점심시간에 얘기를 꺼냈지만 이렇다 할 메아리 없는 영화였다. 공감 없이 소통되지 못하는 문화는 힘이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드라마에도 별 흥미가 없다. 주중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챙겨볼 여유도 없고 좋아라하는 외국 드라마들은 영상은 있는데 자막이 더디기만 해서 기다리다가 지쳤다.
알만한 분들은 이미 알겠지만 악기에도 손을 댔었다. 오카리나와 우쿠렐레. 지금은 오카리나와 우쿠렐레라는 악기가 이렇게 생겼고 이런 소리가 난다는 식으로 보여주는 역할만 톡톡히 하고 있다. ‘오리꽥꽥이’와 ‘우쿠’라고 이름까지 지어주며 친해지려 했지만 결국 구입 후 3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샀던 그때 실력과 똑같다. 이제는 오카리나와 우쿠렐레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자고로 취미라 하면 일상의 낙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서문만 읽다 그친 책들과 맥락 없는 영화표들과 먼지 쌓인 악기들을 보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 무슨 인스턴트커피 타마시듯 문화를 보이는 대로 게걸스럽게 소비한다. 보람 없이 단편적인 시간들이라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다. ‘짱구는 못말려’에서 짱구는 보통의 아이들이 선택하는 우표수집이 아니라 휴지봉 수집을 취미로 가졌었다. 특이하더라도 혹은 쓸모는 없어도 짱구의 취미에는 ‘고집’이란 게 있어서 멋져 보였다. 그에 반해 내 취미들은 마땅히 내세울만한 취향이랄 것도 없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업데이트가 부지런하지 않아 볼품없다. 그럼에도 계속 취미를 시도하는 건 즐겁게 살고 싶어서다. 요즘 내 일상의 낙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뜬금없는 것이긴 하지만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조금 있으면 사라지고 1년 뒤 다시 올 낙. 바로 가을.
시인 최승자의 말처럼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 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에 이어 여름도 동의 없이 확 와버렸다. 그렇게 더위를 타는 체질이 아님에도 이번에는 어딜 들어가든 에어컨부터 찾았으니 얼마나 여름을 미워했던가. 날씨가 쨍쨍 찔수록 ‘가을이 정말 올까? 겨울도 정말 올까?’ 라며 하나마나한 생각을 했다. 살구나무 그늘이라도 좀 있던가. 옥상은 숨이 턱턱 막힌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름이랑 싸울 수도 없으니까. 악.
그런데 정신없는 여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말복, 입추였다. 절기에 따라 정말 더위가 한 풀 꺾였다. 그리고 어느새 내 마음도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저녁마다 부는 바람. 한낮의 햇볕은 뜨거워도 해가 지면 곧 바로 시원하니 좋았다. 편의점 한 쪽에서 맥주 마시기에도 딱 좋고. 일은 바빠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상황. 참 묘하다는 느낌. 그러다 어느 날은 옛날에 친구가 만든 단편영화가 생각났다. 제목하야 <날씨 증후군>. 비가오고 흐린 장마철에 어두운 기운을 받아 기분이 축 쳐지고 심히 우울해져서 순전히 날씨 때문에 급기야 애인과 이유 없이 헤어진다는 내용.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사람도 변온동물처럼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영화를 봤을 때는 ‘날씨 때문에 기분이 좀 다운될 수는 있어도 멀쩡한 관계를 깨트릴 정도라니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가을이라는 계절 자체를 낙으로 여기는 나에겐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창문을 열면 싸한 공기가 오가며 살짝 코가 시큼해지는 기분.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맛이 더 진하게 느껴지고 슬슬 유자차가 먹고 싶다. 밤공기를 가르며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퇴근길에 걷다가 망원, 합정을 지나 좋은 날씨가 아쉬워서 상수역까지 산책한다. 친구와 걸으며 나누는 얘기가 달고 맛있다.
‘주말에는 영화관을 찾지만 어딜 가든지 음악을 듣지만 조금 비싼 카메라도 있지만 그런 걸 취미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면서 별나게도 사랑을 취미라고 하는 누군가처럼 나에게 취미이자 낙은 가을이다. 요즘 내 즐거움은 여유로운 바람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파란 하늘이다. 이런 가을을 양껏 즐기기 위해 자주 광합성을 해야지. 부담 없이 ‘가만히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무언가, 행복이 아니라도 괜찮아’서 가을은 그간의 취미보다 품이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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