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10월호 [人터뷰] ‘우리’라서 지킬 수 있었던 시간들
‘우리’라서 지킬 수 있었던 시간들
- 윤민례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그네틱스지회 분회장(이하 윤민례 분회장)을 만나다
시그네틱스는 66년에 설립한 반도체 제조 업체이다. 장기 투쟁 사업장으로도 많이 알려져있다. 경기지부 시그네틱스 윤민례 분회장은 두 번째 복직 투쟁 중이다. 95년 시그네틱스가 거평그룹에 인수된 후, 부도로 인해 워크아웃 사업장이 됐었다. 회사를 위해 임금 30%를 반납하고 워크아웃 기간을 견뎌냈다. 워크아웃이 끝난 후, 영풍그룹이 인수하면서 투쟁은 시작됐다. 회사는 갑자기 염창동 공장 노동자들을 안산 공장으로 발령냈다. 안산 공장으로 갈 것인지, 위로금을 받고 회사를 떠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발령을 낸 안산 공장은 앞으로 투자 계획이 없어 고용이 불안했고, 영풍그룹 계열사들은 6천 명의 비정규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윤민례 분회장과 조합원들은 공장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우리의 고용을 보장하라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떠나라 하지 말라고.
돌아온 것은 전원 해고 통보였다. 그래서 6년을 투쟁했고 복직 했다. 긴 싸움 끝에 민사 소송의 승소로 임금과 퇴직금도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다시 두 가지 선택을 종용했다. 안산 공장에 정규직으로 복직시킨 노동자들에게 유엔씨라는 하청업체로 가던지, 위로금을 받고 떠나라고 말이다.
2012년 지금, 윤민례 분회장의 표현대로 시그네틱스의 마지막 정규직들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91명의 악바리 언니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 됐다.
Q 긴 시간을 싸우셨어요. 어떻게 견디셨는지요.
A 그때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죠. 조합원들 대부분도 회사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크니까 오래 가더라고요. 믿었던 사람한테 발등 찍힌 심정이었죠. 새로 지은 파주 공장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일방적으로 안산 공장으로 발령을 내더니 3주간 휴업을 해버렸죠. 그때부터 악바리 아줌마들이 됐어요. 휴업해 있는 동안에는 용역들을 투입해서 공장에 있던 저희를 끌어냈어요. 그때 우리를 경찰들이 못 움직이게 다 에워쌌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날 정말 많이 울었는데… 용역들이 트럭에 기계를 싣고, 트럭들이 공장을 빠져나가고.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그 외에도 회사가 최초로 한 일들이 많아요.
Q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A 농성을 시작하고 전원을 해고 시키는 거에요. 일반적으론 지도부들이 해고당하지 조합원들까지 해고시키는 경우는 없거든요. 해고 후엔 임금, 퇴직금 가압류를 해버리죠. 그럴 줄을 몰랐는데 당황스럽고 조합원들도 분노했죠. 또 하나 더 있어요. 저희가 3교대로 일하다보니까 직장 어린이집이 있었거든요. 임금 인상을 2~3년간 보류해서 만들 수 있었어요. 근데 회사가 밤에 용역들을 보내서 어린이집 구들장을 팠어요. 보일러를 깨고 변기도 깨고. 그때 어린이집 졸업식을 4일 앞두고 있었어요.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죠. 나중에 아빠들이 어린이집 수리를 해줬어요. 주변에 연대 동지들이 오셔서 벽에 그림도 그려주고. 복구하는데 두 달이 걸렸어요. 그동안 저희 집을 어린이집으로 내줬죠. 저희 아들들도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저희 집에서 졸업식을 했어요. 포기할만하면 한 건이 터지고… 계속 분노가 누적 됐죠.
Q 첫 번째 복직 투쟁을 하면서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잖아요. 그래서 이번 복직 투쟁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A 고민을 많이 했어요. 조합원들한테 물었어요. 싸움도 힘들고 이겨야 복직도 되는건데, 그래도 싸우겠냐고요. 근데 조합원들이 도저히 못 믿겠대요. 왜냐면 회사가 흑자거든요. 회사에도 말했어요. 조합원들을 설득할 수 있게 경영이 어렵다는 자료를 보여달라고요. 정말 회사가 어려우면 돕겠다고요. 그런데 자료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아요. 회사가 경영이 어려워 해고하는 게 아니라는 것까지도 저희가 증명해야 하죠. 그래서 더 어렵죠.
Q 분회장으로서 책임감도 무거우실 거 같아요.
A 회사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해요. 투쟁 운운하며 조합원들을 선동하지 말래요. 저는 스스로를 운동가나 활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2월에 고등학교 졸업해서 3월에 시그네틱스에 입사했어요. 첫 직장이었고 오래 있고 싶고 자부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 너무 억울해서 못 떠났고, 투쟁하다보니 분회장이 된거죠. 그리고 책임감 때문에 의리 때문에 못 떠났어요.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에요. 왜 못 떠나느냐고 물어보니까 여기가 본인들 삶이라고 대답해요. 누가 강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하청업체로 가지 않으면 해고당하는 걸 알면서도 남았어요. 본인들이 부당하다는 걸 알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게 확고하니까 남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투쟁)하자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조합원들 나이가 사십이 넘은 사람들이에요. 운동적 관점으로요? 그렇게 했다면 뜻 맞는 사람 열 명쯤 남았겠죠. 회사에 한 명의 낙오 없이 장기적으로 투쟁할 거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속이 썩기도 하지만.(웃음) 그래도 회사만큼 밉지 않아요. 10년 동안 두 번이나 해고한 회사보단 밉지 않아요.
Q 지난 2001년 투쟁 때부터 서로간의 유대와 신뢰가 깊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처음과 마지막을 끝까지 함께하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죠.
A 대부분 조합원이 오랫동안 함께 했고 애들도 같은 어린이집에서 자랐어요. 애들끼리도 친구에요. 어떤 조합원은 성격상 속마음을 잘 얘기 못하고, 서로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함께 하는 거 보면 다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힘든 일 있으면 솔직하게 다 얘기해요. 모두 함께 하는 게 이기는 싸움이니까요. 나쁜 건 책임지고, 좋은 건 서로 나누자고요. 그게 돈이라도 그렇게 하자고 했었는데요. 그래서 민사 소송에 승소하면서 임금, 퇴직금을 받았을 때도 그 돈으로 조합 운영비도 마련했어요. 투쟁 하는 동안 해고된 해고자들에게도 나눠주고요. 각자 받은 임금을 나눠서 해고자들까지 챙기는 건 저희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Q 조합원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들이잖아요. 여자들이 더 의리 있어요.
(웃음)
A 남자들이 이렇게 오래 함께 하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요. 그럼 “의리요”라고 대답해줘요.
그리고 지도부가 헌신적으로 해서 쌓은 신뢰도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제 인생 다 걸었죠. 집도 내주고.(웃음) 맨날 조합원들이 저보고 시그네틱스에 미쳤대요. 맞다고 말해요. 미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고, 이길 수가 없다고요.
Q 그래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후회 되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는 없으셨어요?
A회사가 묻더라고요. “윤민례씨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20대는 공장에 갇혀서, 3,40대는 투쟁하고. 나중에 미쳤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근데 지금은 후회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지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죠.
Q 앞으로 계획은요?
A 11월이나 12월에 해고무효소송 1심 판결 나올 거 같아요. 승소하면 좋을 거 같아요.
인터뷰가 있기 일주일 전, 시그네틱스 조합원들과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집회를 했다고 한다. 어차피 아무도 반기지 않는데 힘들게 하지 말자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조합원들끼리 편을 나눠서 게임도 하고 장기자랑도 했단다. 함께 웃음을 나누고, 곁에 있어주면서 길고 긴 싸움을 해나가는 것이다. 영풍그룹이나 영풍문고에서 이들을 만난다면 손을 들어 인사해주면 좋겠다. 이들처럼 유쾌하고 씩씩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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