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12월호 [민우ing] 더 나은 미래의 이름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성평등복지국가'
더 나은 미래의 이름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성평등복지국가’
먼지(권박미숙) •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
십 년 전만 해도 먼 나라 이야기이던 ‘복지국가’라는 말이 최근 몇 년 사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익숙한 말이 되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도 저마다 대안 사회의 키워드로 복지국가를 빼놓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에 복지국가 담론이 등장하면서부터 민우회는 민우회다운 고민을 시작했다. 첫 번째 고민은 ‘모든 복지국가가 성평등복지국가는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우회는 단지 ‘복지국가’가 아닌, ‘성평등복지국가’를 모색하며 올해 초 <성평등복지국가 전략보고서>를 발간했다. 전략보고서는 ‘남성은 일하고 여성은 돌보는’ 성역할 규범의 틀을 벗어나, 누구나 일과 돌봄을 균형 있게 누릴 수 있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170여개의 정책과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민우회다운 두 번째 고민이 시작되었다.
-일상의 결을 담은 성평등복지정책을 고민하다
두 번째 고민은 ‘통계 숫자에 둘러싸여 있는, 어쩐지 거리감부터 느껴지는 정책이 아닌 일상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는 정책으로 성평등복지국가의 얼굴을 제시해보자’라는 것이었다. 그 답을 성평등복지국가 담론과 여성의 일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찾아보고자 민우회는 2012년 6월~10월에 걸쳐 ‘대중참여 연구를 통한 성평등복지 의제와 정책과제 발굴 사업’을 진행했다.
의제를 발굴할 영역으로는 ‘노후, 시간, 건강’을 선정했다. ‘노후, 시간, 건강’은 각각 그 수위가 다르고 연관된 정책 영역 또한 혼재되어 있는 분류지만, 일상사의 구조를 밀접하게 보여줄 수 있는 키워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다반사들을 길어내기 위한 영역별 좌담회를 진행했다. 좌담회에 모인 여성들의 이야기로 모든 여성들의 삶이 설명되지는 않겠지만, 서로 다른 삶들이 만나 공감이라는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지점을 발견하고, 그 지점을 믿을만한 좌표로 삼기 위해서였다. 7번의 좌담회와 2번의 심층인터뷰, 36명의 삶이 담긴 32시간 분량의 이야기 속에서 확인된 좌표는 노후가 불안하고, 삶 자체가 바쁘며, 일상적으로 아프다는 것이었다. 왜 불안하고, 바쁘고, 아픈가. 좌담회를 통해 모색한 그 이유와 대안을 성평등복지 의제로 다듬었다.
-성평등복지 의제로 그려보는 대안 사회의 밑그림
“월세 부담에 시달리다가 임대주택을 알아보는데, 신혼부부 혜택이 진짜 많더라고요. 나는 결혼할 계획이 없지만 집이 필요해. 근데 왜 결혼한다는 이유가 우선순위가 되는 거지? 복지라는 건 기본적으로 한 인간이 생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거지, 그게 결혼했기 때문에, 애를 셋을 낳기 때문에 주는 혜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일인 독립세대를 기반으로 모든 제도가 재정비 됐으면 좋겠다는 거.” -‘노후’ 영역 좌담회 中 |
노후 영역에 대한 연구는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유정미님이 진행했다. 유정미님은 토론회에서 좌담회 결과를 바탕으로 '독립과 연대로 준비하는 노후'라는 의제를 제안했다. 이 의제는 노후 불안의 원인을 가족을 기본 단위로 만들어진 복지체계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가족 구조 변동 현상 사이에 개인들의 삶이 놓여 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더 이상 ‘가족’으로 삶이 정형화되지 않는 시대임에도, 복지체계와 돌봄 관계망이 가족을 중심으로 제한되어 있어 삶의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진단을 바탕으로 제안하는 성평등한 복지국가의 모습은 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조건이 가족을 중심으로 닫혀있지 않으며, 돌봄 공동체의 가능성 역시 결혼을 중심으로 닫혀있지 않은 사회이다.
“야근이 당연하고 바쁘지 않으면 바보고. 이런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요. 이런 상황이면 육아휴직 같은 건 정말 부담스럽죠. 휴직하는 동안 일할 사람 구하고 휴직 전후로 일에 무리가 가는 걸 저도 겪어봐서 알고요. 사실 육아휴직으로 생기는 업무지연이나 속도 조절이 당연히 발생하는 일의 한 과정인건데, 육아휴직을 안 써도 되는 사람에 생산성 표준이 맞춰져 있으니까 결국 개인이 이런 부담을 지는 것 같아요. 이건 한 회사가 아니라 전 사회의 속도가 달라져야 하는 문제예요.” -‘시간’영역 좌담회 中 |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선임연구원 김창연님은 연구 결과 ‘시간’ 영역의 의제로 '노동시간 재구성으로 쉼표 있는 사회 만들기'를 제안했다. 이 의제는 돌봄을 수행하지 않는 남성 성역할을 기준으로 노동시간이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일만 할뿐 자신과 가족을 돌볼 권리는 없는 삶을, 여성은 일하면서 가족까지 돌보는 이중고를 감당하는 삶 혹은 일할 권리 자체가 제한되는 삶을 겪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모든 사회구성원이 일, 돌봄, 쉼을 균형 있게 누릴 수 있는, 지금보다 느리고 여유 있는 사회를 다음 사회의 밑그림으로 제안한다.
“한국에선 모두 20대 초반 여성의 몸을 쫓잖아요. 여중생도 20대 초반처럼 옷을 입고 화장하고 머리하고, 30대와 40대는 주름 없애고 날씬해지려고 하고. 여자 몸은 그냥 20대 초반뿐인 거예요. 그런데 여성건강 검색하면 또 다이어트, 성형이 뜨고. 사실 20대 여성 저체중, 60대 빈곤층 여성 비만 증가같은 불균형이 더 큰 여성건강문제인데. 이런 건 정책적인 대책이 필요한 거잖아요.” -‘건강 영역 좌담회 中 |
살림의료생협 이사인 전희경님은 건강 영역 좌담회 결과 ‘모성건강을 넘어 여성건강으로’라는 의제를 발굴했다. 이 의제는 다이어트, 미용, 성형, 패션 산업에서의 여성의 몸 이미지 왜곡으로 대표되는 ‘여자다운 몸’을 유지하라는 사회문화적 압박이 여성의 건강권을 일상적으로 침해하고 있는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 보호’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여성 건강 정책 사이의 괴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몸 다양성이 중요한 가치로 추구되며, 사회구성원들이 다양한 몸 경험을 격려 받음으로써 평생 건강을 준비할 수 있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까지가 ‘대중참여 연구를 통한 성평등복지 의제와 정책과제 발굴 사업’으로 그려본 성평등복지국가의 밑그림이다. 각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 1인 1국민연금, 생활연대협약법, 점심시간 유급화, 노동 안식년제, 몸다양성보장법, 국민건강증진법 개정같은 정책 과제들도 발굴했다. 이 정책들을 ‘18대 대선 후보들에게 제안하는 성평등복지 정책과제’의 일부로 각 대선 캠프들에 공개제안하기도 했다. 생활연대협약으로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다양한 가족 모델이 있어 결혼만이 정답이 아닌 사회, 점심시간이 유급화되어 퇴근시간이 한 시간 앞 당겨졌고, 6년쯤 일한 뒤엔 안식년 급여를 받으며 쉼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여자다운 몸/아닌 몸의 이분법을 넘어 몸은 그저 다양할 뿐인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사는 날을 상상하며, 이번 대선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성평등복지국가’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정치철학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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