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12월호 [기획] 여성주의자는 ‘여성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여성주의자는 ‘여성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허성우 성공회대 NGO대학원 실천여성학전공 주임교수·여성학
‘여성대통령’론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 문제를 보는 여러 논의가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고, 여성주의자들도 목소리를 내 왔다.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안의 <젠더센터>가 주최한 토론회 <여성, 대선정치를 말하다>에서도 여러 흥미로운 논점이 도출되어 여성 후보 등장의 의미를 풍부하게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여성주의자들의 논의에서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문제가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 혹은 유신 ‘공주’라고 보았던 관점의 기각과 박근혜가 정치인으로서의 자기역량을 담보한 정치적 행위자였다는 주체론의 등장이다. 유신 시기 박근혜는 육영수 피살 이후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아왔고 특히 대한구국선교단, 구국여성봉사단과 새마음봉사단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통해 가부장적 충효사상을 강조하면서 국민정신개조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오랜 공백을 깨고 1998년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보수 제1야당의 대표직을 맡는 등 활약해 왔다. 그는 정계 입문 당시 IMF 이후 경제위기 속에서 정치가 길을 잃고 있고 아버지가 일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굶주림과 정치적 억압에 저항했던 YH 노동조합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에게 “몽둥이와 해고”를 선사하고 숨진 김경숙 열사의 사인을 끝내 왜곡한 정치의 주역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5.16과 유신정치에 대한 사과를 통해 마치 대속(代贖)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그리고 그의 것은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 필요한 것은 대속이 아닌 그 자신의 정치적 설명과 속죄(贖罪)이다.
한편 여성주의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의문시하고 생물학적 성과 젠더의 구분을 해체하는 등 담론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생물학적 여성성이란 기준으로 박근혜를 비판하려는 관점의 한계가 드러난다. 박근혜는 단지 생물학적 여성으로 통칭될 수 없는, 특정하게 수행된 그만의 젠더를 재현한다. 그의 ‘여성성’은 아버지 박정희의 남성적 카리스마와 어머니 육영수의 우아한 여성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재현된다. 박근혜는 이 수행을 통해 육영수라는 특별한 모성이미지를 획득한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감금, 투옥, 살인했던 아버지 박정희조차 묵묵히 받아주었던 어머니 육영수. 그래서인지 폭압적 유신정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모성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일반 여성들로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특수한 여성성이다. 이런 특정하게 구성되고 신비화된 ‘여성성’은 오로지 일종의 ‘스타성’이라는 창문을 통해서만 다른 여성들에게 공명될 수 있다.
그래서 ‘여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심문되어야만 한다. 나는 그의 ‘여성대통령’론은 근본적으로 사회변화 비전을 담은 ‘정치학’이 아니라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비리 논란과 개혁진영의 단일화 국면으로부터의 전환을 유도하면서 2030 여성 표심을 잡고 나아가 야권과 차별화하려는 선거‘전술’이자 ‘슬로건’이라고 본다. 이는 그가 제시한 여성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여성정책의 주된 대상은 이미 시장에 진출해 있거나 진출할 여성이다. 시장에서 배제되었거나 진출하기조차 어려운 조건에 놓인 여성(10대 위기 청소녀, 젊은 실업여성, 비정규직 여성, 빈곤한 장년여성, 장애여성, 성적소수자와 이주여성노동자를 포함한)에 대한 정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공식시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야말로 경제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일간지들이 대서특필한 셋째자녀 대학 등록금 면제, 저소득층 가구 12개월 미만 아이에게 분유와 기저귀 제공, 임산부지원강화, 농산어촌지역의 공공 산부인과 설치 등의 정책은 모두 출산장려의 의지를 반영한다. 그에게 있어 인구란 국가의 노동력이기에 또한 중요할 것이다.
그의 행보와 발언으로 유추하자면 그의 정치학은 이 한 몸 희생하여 국가 발전, 정확히는 경제발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구국의 정치학일 것이다. 유신말기에도, 98년 정계 입문 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화와 혁신을 통한 <구국>이 그의 화두이다. 국가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그리고 국민들, 특히 여성들의 헌신을 기대하는 국가주의적 발전주의적 가부장적 정치학이다.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가족, 공동체와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적 모성애를 강조한 바 있다. 이런 가부장적 정치학이 어떻게 남녀평등을 외치는, 일견 전혀 다르게 보이는 ‘여성주의적’ 정치학과 같이 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푸는 열쇠는 박정희 시기 이래 형성되고 발전해 온 한국 보수여성운동의 특징에 있다. 박정희 정부 하에서 건설된 많은 보수여성조직은 그의 정치학에 동조하며 국가 헤게모니를 지속하는 데 기여해 왔다. 민주화 이후 보수여성운동은 자신의 활동을 ‘여성의 권익신장과 양성평등’으로 정의한다. 이는 서구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의미를 무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보수여성운동은 여성운동을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을 위한 여성의 적극적 참여’로도 정의해 왔다. 이런 여성운동의 특징적 의미화는 박근혜를 주역으로 했던 박정희정부를 통해 훈육, 강조되어 온 것으로, 보수 정치의 영향 하에 놓여있는 많은 지역사회 여성들의 일상적 삶의 일부로 체현되어 왔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여성들에게 박근혜는 글로벌 시대에 여성대통령으로서 국격을 높이는 국가발전과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을 연결해 주는 강력한 기표가 된다. 그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정치학을 결코 저버린 적이 없지만, 어머니의 여성성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여성의 대변자로도 나타난다. 어찌 보면 그의 ‘여성대통령’론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 정치학의 탈정치화인 동시에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주의 정치학의 탈정치화라는 이중적 모순의 코드이다.
만일 그가 대권을 잡는다면 국가주의, 발전주의, 가부장제의 가치가 모든 제도와 시민사회의 보수적 지역사회 연결망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다시 파고들어 우리의 일상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 다소 약화되었던 과거의 가치들이 다시금 새로운 동력을 얻고 부활함으로써 시민들의 자율성과 창조성, 급진적인 정치적 요구와 저항들을 잠식해 갈 것이다. 이것이 자유와 정의, 해방의 질서를 몸으로 체현하려는 미래지향적 여성주의자들이 ‘여성대통령’을 반대하는 이유이다.
허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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