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봄 [나의 노동 이야기] 공기업 콜센터의 하루
공기업 콜센터의 하루
길고양이 여는 민우회 회원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사실 막막했다. ‘내 글이 다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종이 낭비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여성단체 소식지에 올릴 노동 이야기라고 하면 여성 노동자로서 받는 구조적 억압과 차별들을 거창하게 토로해야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약간의 밀당(?) 끝에 청탁을 수락했고 나는 내 나름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고졸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은 일 말고...‘ 이런 고민 끝에 찾은 일이 공기업 콜센터였다. 콜센터는 워낙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오전 6시 반. 자명종은 기본이고 핸드폰 알람까지 거의 7개는 맞춰 놓는다. 혼자 살다보니 믿을 건 알람 밖에 없다. 가족이나 같이 사는 친구가 아침에 깨워주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늘 그렇듯이 아침은 숨 막히게 바쁘다. 뭔가 빠뜨린 건 없는지 확인 하고 부랴부랴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간다. 오전 7시 30분에는 현관문을 나서야 할 만큼 회사는 멀다.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아슬아슬하게 9시 전에 사무실에 도착 한다. 지문으로 출퇴근 시간이 체크되기 때문에 더 긴장 됐다. 사람들이랑 인사 나누고 컴퓨터를 켜고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하고 잠이 덜 깬 눈으로 커피를 마신다. 내가 하는 일은 아웃바운드, 즉 전화를 거는 일이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하는 인바운드와는 차이가 많다. 일단 인바운드는 언제 전화가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리를 뜨는 것도 눈치 보인다. (보통 인바운드 회사는 화장실 때문에 자리를 뜨는 시간도 기록 된다고 들었다.) 반면에 아웃바운드는 내가 전화 거는 속도를 알아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웃바운드라도 영업을 했으면 힘들었겠지만 다행히 우리의 업무는 해피콜이다. 어떤 제품을 구매한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교육도 반나절 정도만 받고 바로 업무를 시작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이 없었다.
오전 10시. 슬슬 전화를 걸 시간이다. 당연하지만 9시에 출근 하자마자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다. 아침 일찍 이런(?) 전화 받고 기분 좋을 고객님은 아무도 없으니까. 전화는 보통 하루에 100통을 건다. 100통 건다고 모두 다 받는 것은 아니다. 거의 30~40퍼센트는 부재 중이다. 전화를 걸면 꼭 “저 지금 일하는 중이거든요?” 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는 나도 가끔 ‘저도 지금 일하는 중입니다.’ 라고 대꾸해주고 싶다. 바쁘면 전화를 받지 않거나 나중에 전화 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 보기에 하찮아 보인다고 일이 아닌 건 아니지 않는가.
오전 11시 45분. 이제 다들 전화는 내려놓고 점심 메뉴 얘기로 분위기가 들뜬다. 우리는 보통 도서관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강남에서 저렴하게 한 끼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여기 밖에 없다. 그러다 나중에는 사무실 안에서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밖에서 밥을 사먹고 여자들은 대부분 사무실에서 쌀을 씻어서 밥솥에 앉히고 국을 끓이고 집에서 갖고 온 반찬들을 나눠 먹는다. 언니들의 생활력 덕분에 좋은 집밥을 먹은 거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이 협업이 아니다보니 근무 중에 다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많이 없다. 가끔 옆 짝꿍한테 방금 내가 어떤 진상과 통화했는지 하소연하는 것 빼고는. 그래서 점심시간은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누는 시간이다. 콜센터 특성상 여성이 많기는 하지만 남성도 꽤 많다. 학력도 다르고, 그 전에 했던 일도,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제각기 다 다른 사람들. 어쨌든 다들 이곳을 ‘돈을 벌기 위해 잠시 거쳐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 공통적이다.
이곳의 언니들은 나이가 2~30대로 정말 외모와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았다. 스튜어디스를 지망하는 언니는 다이어트 도시락을 주문해서 먹는다. (정말 새 모이 분량의 음식이 배달되어 온다.) 나중에는 다른 언니들까지 가세해서 7명이 단체로 다이어트 도시락을 먹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콤플렉스인 신체 부위를 얘기하면서 서로 견적 봐주기(?) 등등... 점심 먹고 같이 화장품 가게나 옷가게를 구경하기도 한다. 담배 피는 언니들은 사무실 앞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핀다. 여자가 담배 핀다고 꼰대질 할 상사가 없는 곳이라 다행이다.
오후 1시.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들 자기 자리로 슬슬 돌아온다. 1시 30분 정도 되면 다시 전화를 시작한다. 사무실에는 식후 나른함이 가득하다. 오후 3시 정도 되면 졸음은 절정이 된다. 책상에 엎드려 자면 안 되서 살짝 선잠을 잔다. 오후 5시. 이 시간 정도 되면 다들 하루 업무는 다 마무리 하고 다른 일을 한다. 자격증이나 토익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쉬는 시간이 생겨도 느슨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몰아붙인다. 제일 독하게 공부하던 언니는 나중에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사무실을 떠났다. 나도 책상에 공부할 책은 갖다놨지만 생각보다 공부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손길이 자주 가지 않는 책 표지를 볼 때마다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오후 6시. 누군가에게는 퇴근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출근 시간이기도 하다. 또 저녁 7시까지 출근해서 자정 12시에 퇴근하면서 투잡을 뛰는 언니가 있었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개미처럼 일해도 평균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졌을까? 세계에서도 야경이 가장 화려하다는 서울. 어둠 속의 불빛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피로를 어깨에 이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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