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여름 [기획] 서로를 지지하는 세 평 남짓한 마음의 거리
서로를 지지하는 세 평 남짓한 마음의 거리
숨su:m 여는 민우회 회원
사람 나이 ‘다섯’이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나이가 들수록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하염없이 상념에 잠기고 싶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웬걸 우리가 겪어온 관계들은 그걸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이럴 때 혼자만의 방이라는 건 상상만 해도 황홀한 꿈이지만 사실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관계를 지속하려면 어느 정도는 숨통을 틔워 주어야 하는데 보통의 애착관계들은 그 거리두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스무 살이 되어 자연스럽게 원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살면서는 천방지축으로 거침없이 살았던 것 같다. 신기한 건 기숙사에 살거나 혼자 자취를 할 때도 늘 사람들과 교차하고 있었고 언젠가 부터 친구들과 ‘함께 살기’를 하고 있다는 거다. 그 이유가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해서거나 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내가 선택하는 함께 살기를 통해서 이전의 함께 살기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어떤 걸 알아차리며 살아갈 것인가’인 것 같다.
어떤 걸 알아차리며 살아갈 것인가
벌써 십 수 년 전의 일인데 같이 사는 후배가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져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치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너무 그렇게 살지 마라’고 했고, 그때부터 후배는 나만큼 너저분(?)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삼 년 뒤에 후배가 사는 집에 놀러갔는데 그렇게 반짝이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진 화장실에서 범인을 색출하는 모습을 보며, 저 친구가 어떻게 나와 몇 년을 함께 살아 주었을까 싶었다. 후배가 자신의 습을 기꺼이 놓아 버린 것이고 그걸 내가 요구한 거라 생각하니 아차 싶었고 후배에게 고마웠다.
물론 그 뒤로도 함께 사는 이들과 여러 어려움과 즐거움이 있었지만, 나름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나 혼자 속편한 것이었을까. 하우스 메이트와 백년해로할 것도 아니고 따로 떨어져 살아야겠다고 판단되면 아쉽지만 서로 갈길 가는데 복 빌어줄 수 있는 정도만 잘 살면 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어서 나처럼 운 좋지 않은 이상 크게 힘들어했던 지인들을 목격해 보니, 잘 살려고 관계에 노력하는 것을 피곤하게만 느낄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함께 살기를 선택한 이상 알게 모르게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 나보다 깨끗한 이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건 내가 그 일을 공평하게 하려면 내 방만함을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치약 짜는 것 가지고 싸운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습을 고수하는 문제로 가열차게 투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을 치우는 일을 비롯해서 신발을 벗어놓는 모양하며 치약을 짜는 일까지, 함께 산다고 해서 같을 수도 없고 같아질 필요도 없다. 어떤 한 가지 습성만이 올바른 것도 아니고 관계의 양상에 의해 양보하는 사람과 내용이 바뀌기도 한다. 오해하지 말고 묵묵히 그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이 관계에 대한 노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함께 살기, 관계 맺기의 미학
그러고 보면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나를 반영하는 관계 맺기의 미학일지도 모른다. 만나고 헤어지고 성장하고 자신의 한계도 알아가는, 애인과 가족과 친구 등의 관계 맺기가 가진 여러 버전 중 하나가 아닐까. 여행을 가거나 기념일들을 챙기는 대신 보일러를 점검하고 공과금을 제 때 내는 일들이 있다. 부모를 부양하고 애인과 섹슈얼한 관계를 가지는 대신 함께 사는 이와는 말벗이 필요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배려해 주는 일을 할 때가 있다. 음식을 함께 나눌 때도 있고 각자 먹을 때도 있으며 가끔은 수다도 떨고 더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한다. 더 긴 시간 동안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따로 또 같이 수많은 접속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집’이라는 공간은 각자의 시간 위에 여러 형태의 궤도를 그리며 위치한다. 그 광활한 우주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할 것, 마음을 다하기 싫다면 그것 또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관계에 천착하게 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저 ‘혼자’임을 통해서 ‘함께’를 염두에 두고, ‘함께’임을 통해서 ‘혼자’이고 싶음을 선명하게 반영하는 것 아닐까. 가치는 변하고 확장되기에 관계 역시 처음부터 의도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각자가 가졌던 나름의 기준은 여전히 함께 사는 일에 유용한 중간 이정표가 되어 이따금씩 다시 질문하기를 통해서 안부나 물어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 사이에 벽이 있든 섬이 있든 함께 사는 사람 서로에게 세 평 남짓 마음의 거리를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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