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하반기호 [ing] 그래, 나 아프다
그래, 나 아프다
김진선(제이)|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모든 사람의 몸은 다르다.
몸으로 사는 삶의 경험도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공공연히 이야기될 수 있는 몸의 경험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민우회 여성건강팀은 다양한 몸이 사회구조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재현되는가에 관심을 가져 왔고,
침묵 당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만 이야기되어온 몸의 경험을
새로이 드러내는 활동을 해 왔다.
올해는 <아픈 여자들의 일상:복귀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인터뷰 사업으로
‘아픈 여자들’이 경험하는 구체적 일상에 주목했다.
인터뷰를 통해 유방암, 갑상선암, 담도암, 장결핵, 지주막하출혈 등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삶의 큰 변화를 겪은 여성들 스물다섯 명을 만났다. 인터뷰이 모집은 주로 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 이루어졌지만, 모집 공고를 보고 ‘내 얘기를 하고 싶다’고 직접 연락을 주신 분들도 계셨다. 인터뷰이의 연령대는 29세부터 59세까지 고루 분포되었고, 직업이나 가족 상황, 경제적 상황도 제각각 달랐다. 민우회는 각 인터뷰이에게 아프고 난 후 가족이나 주변 관계, 일터에서 겪은 변화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다시금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물었다. 1:1 인터뷰 외에도 수다회 <‘곁’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픈 사람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 직장 동료들의 경험을 들어보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들이 앓는 것은 질병만이 아니다
같은 병종이라 하더라도 각자 처한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일상을 경험한다. 그런 한편 병종이나 직업, 가족 상황 등이 모두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픈 여자’라는 공통분모로 매우 비슷한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당사자와 그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주요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픈 사람들이 투병하고 복귀하는 과정에서 질병자체로 인한 고통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고통을 상당히 겪는다는 것이었다.
병이 치료되어도 하루 8시간 씩 주 5일 근무와 야근에 회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신체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굴러가는(사실 대다수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무리인) 일터에서 일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병원비는 보험으로 어찌어찌 감당하더라도 앞으로의 생계를 위한 대책이 막막하다. 아이를 키우거나 시부모를 모시는 등 주변을 돌보는 역할은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주어진다. 영리 추구와 전문가 편의주의에 매몰된 일부 병원은 중증질환으로 인한 환자의 ‘멘붕’을 케어 하지 않고, 심지어 의료적 처치와 필수적 정보 전달 과정에서조차 환자를 소외시킨다. 여성의 몸에 특히 더 강하게 작동하는 문화적 평가 기준은, 달라진 몸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영향을 미친다. 아픈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도와야 할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게 하는 문화는, 서툰 위로로 인한 선의의 피해를 낳는다. 그나마 그 경우는 차라리 나은 편이다. ‘일반 사람들’의 사회 곳곳에는 병을 겪은 사람을 ‘그저 환
자’로만 낙인찍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병은 곧 불행, 절대 아파선 안 된다’는 공포와함께 스며들어 있다.
인터뷰이들이 들려준 일상 이야기는 질병과 관련하여 겪게 되는 의료적, 심리적, 경제적 곤란함이 전부 당사자 개인이나 그 가족의 노력과 ‘운’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기도 했다. 투병이 개인적 비극으로만 남을수록 아픈 몸으로 사는 삶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잘 유통되지 않고, 질병은 자연스런 삶의 일부가 아니라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태로 여겨지며, 아픈 사람들은 더더욱 외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는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아픈 사람의 구체적 삶의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아픈 사람의 주변인들을 부담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게 하고, 아프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고 언젠가 아플 예정인- 사실상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출구 없는 불안으로 이끄는 일이다.
민우회는 우선 스물다섯 명이 들려준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투병을 경험했거나 경험할 사람에게 위로와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자기 이야기’를 독려하는 말 걸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건강한’ 몸만을 기준으로 짜여 진 사회 제도와 문화에 맞지 않는 몸의 경험을 드러내는 이야기로서, 배제와 격리를 통해 유지되는 멀끔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도모할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아파선 안 되는 사회에서, ‘누구나 아플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이길 바라며, 인터뷰 내용을 엮어서 <아플 수 있잖아>라는 제목의 인터뷰 사례집을 만들었다.
<아플 수 있잖아>에는 병원에서 의사와 잘 소통하거나, 일상에서 기존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픈 사람과 그 주변인이 주의해야 할 것들 같은 실용적 조언에서부터 질병 경험이 삶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까지, 생생한 경험담이 담겨 있다. 인터뷰이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널리, ‘아플 수 있다’는 위로처럼, 선언처럼 읽히면 좋겠다. 사례집은 민우회를 통해 받아볼 수 있다.
아픈 여자들, 투병을 넘어 일상을 이야기하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질병 경험에 대한 ‘공공연한 말하기’의 장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웬만하면 ‘비극’이나 ‘감동’ 같은, ‘질병’이라 하면 ‘검색어 자동 완성 기능’처럼 따라붙는 단어를 털어낸, 아픈 당사자들이 유쾌하고 힘 날 수 있는 자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1월 5일 ‘스토리파티 <그래, 나 아프다>’를 열었다.
이번 인터뷰 사업 결과를 공유하는 한편, 다양한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자기 이야기가 만나고 섞이는 장이 되길 바랐다.
스토리파티는 영상 <아픔을 마주본 적 있나요?> 상영으로 문을 열어, 민우회 여성건강팀의 사업 소개, 인터뷰 결과의 연구 분석을 맡아주신 백영경 선생님의 발표 ‘다시, 삶을 찾기 위하여’를 들은 후, 임경선 작가의 사회로 진행되는 ‘앓음알음 토크’로 이어졌다. 토크에는 인류학 연구자 송병기 님과 인터뷰이 반다 님도 합류했다. 평소와 달리 ‘갑상선암 22년차 환자’로 스스로를 소개한 임경선 작가는 ‘병 자랑 좀 시원하게 해 보자’는 말로 시작하여 본인의 질병 경험을 재치 있게 풀어내며 토크 게스트들과 플로어의 이야기를 이끌었다. 인터뷰 결과 분석에 대한 논의에서 나아가 공감과 웃음이 오고가는 수다처럼 진행되었다. 플로어에서 한 분 두 분 손을 들고 말했다. ‘저도 사실은 젊어서부터 아팠는데요.’ ‘제가 올해 2월에 암 진단을 받았어요.’ ‘이런 걸 물어 볼 데가 없더라고요’ 그 자리에 함께한 많은 분들이 ‘이야기’에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오아시스가 되어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토크가 끝나고 진행된 2부에서는 인터뷰이 세 분이 한 분씩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들고 자기 이야기를 해 주셨다. ‘몸/마음’, ‘갑상선암- 착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더라.’ ‘실컷 울어나 봤으면’ 이라는 제목으로, 짧지만 마음에 진폭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세 분의 말하기가 끝나고, 큰 박수 소리가 한동안 그치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오아시스 같은 자리가 된 듯해 기뻤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렇게 계속 사막 같은 곳이어도 될까? ‘그래, 나 아프다’고, ‘아플 수 있는’ 거라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대수롭지 않게 오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치명적 질병의 치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팠던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삶에 대해서도 지지를 아끼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민우회는 스물다섯 명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품고,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아픔과 건강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장을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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