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 영화관]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에서 : 《비커밍 제인》
민우블로그에서 인기리에 연재되던 회원 코너 <스머프의 영화관>. 이제 홈페이지로 자리로 옮겨 재연재를 시작합니다!
일을 시작 한 후,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백수 시절의 나는 무언가
쓰고 싶은 것들이 생겨도 ‘내 몸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쓰는 것을 미루기 일쑤였다.
SNS를 통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신나게 떠들거나, 가끔 부탁 받은 짧은 글들을 쓰는 식이었다. 하지만 취직 이
후 상황은 변했다. 낮 시간 동안은 머리에 일 생각이 가득했고, 퇴근 후에는 무언가를 생각하다는 것 자체가 귀찮아
져 버렸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멍하니 스마트폰을 훑으며 회사를 오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면 술을 한 잔
마시고 빨리 잠에 드는 것이 나았다. 이런 상황이 몇개월 간 지속되자 나는 지인에게 불안감을 호소했다. 지인은 간
단하게 이 상황을 정리했다. ‘머리에 빈 공간이 없는데, 어떻게 뭘 생각하고 말 하는 게 가능해요.’
사실 이런 고민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여유가 있던 시기에 열렬하게 무언가 쓰고 이야기 하던 사람이
직장을 가지곤 조용해지는 현상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글 쓰는 일은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 일은 따로 하고 남는
시간에 쓰고 싶은 것을 쓰겠다’라는 나의 말에, 먼저 일을 시작한 선배들은 ‘그건 꿈같은 이야기’라는 충고를 던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일을 던져버리고 소득이 없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어떤 사람은 그 불안을 견딜
만큼 견고한 사람일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그리고 나는 다시 ‘안정이 생기는 어떤 순간’ 이후
로, 많은 일들을 미뤄둘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손을 놓은 채 수렁 속으로 빠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배워야 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무언가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말
하자면 머릿속에 빈 공간이 없이도 무언가를 쓰는 방법을 말이다.
영화 ‘비커밍 제인’은 영국의 유명 작가 제인 오스틴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제인이 되어가기(Becoming jane) 이라
는 제목처럼, 영화는 젊은 제인 오스틴이 작가 제인 오스틴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여성이 홀
로 글을 쓰며 자립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절(물론 그 일은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것도 그냥 작품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처럼 한 번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고전
을 집필했다. 사실 어찌보면 그녀는 지금의 나와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안정적인 삶을 보장할 결혼 제안을 모두 거절
하고, 그녀는죽을 때까지 작가로 남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제인 오스틴을 떠올리고 이 영화를 선택했던 건 ‘자기만의 방’에 언급된 그녀의 삶 때문이었다. 책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인 공간을 가지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 작가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제인 오스틴
도 그런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 조카의 회상록을 간략히 인용한다. “어떻게 숙모
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숙모님에게는 종종 찾아갈 만한 독립된 서재가
없었고, 또 숙모님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공동의 거실에서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방해를 받으며 쓰여야 했기 때문이
다.” 책에 따르면 당시 중산층 가족은 오직 하나의 거실을 공유했다. 때문에 글을 쓰는 여성들은 독립적인 공간을 가
질 수 없었으며, 언제나 주변의 방해를 받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그녀들 역시 ‘머릿속의 빈 공간’을 가질 여유는 얻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뛰어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책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그녀의
감수성은 몇 세기 동안 공동 거실의 영향을 받아 훈련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인상을 남겼고, 개
인들의 관계가 항상 그녀의 눈앞에 있었지요.” 즉 끊임없이 소란이 일어나는 공간, 서로를 향한 간섭과 소통이 존재
하는 공간이 그녀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불가능한 빈 공간을 만
들어내는 대신 자신이 서있는 공간에서 성실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글에 녹여낸다. 물론 이것이 ‘500파운드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당대 의 여성들에게 필요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책 또한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 같은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성별이 글쓰기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맥
락에서였으며, ‘자기만의 방’을 가졌을 때 여성 작가들이 더욱 다양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자기가 선 자리에서 끊임없이 관찰하고 성찰했던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는 내게 적지 않은 통
찰을 건네주었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비커밍 제인’은 내게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는 제인 오스
틴의 글쓰기가 보다는 그녀와 톰 르프로이와의 로맨스에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녀가
가졌던 성실한 관찰력과 그로인해 얻어진 통찰이 빛을 발하는 장면은 등장한다. 바로 중대한 기로 앞에서 그녀가 결
단을 내리는 순간에서다. 특히나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사랑의 도피 에피소드가 그렇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자는 르프로이의 제안을 받고 제인은 도피를 감행한다. 하지만 중간에 르프로이가 준 재정적 도움으로
생활이 가능했다는 르프로이 가족들의 편지를 보고, 그녀는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선택은 다른 평범한 로맨스의 주인공들과 다른 것이 없게 되었지만, 중요한건 그녀가 그 선택을 하게 된 동력이다.
결혼을 통해서만 안정적인 경제력 확보가 가능한 환경, 그래서 그토록 그녀의 결혼에 목을 맨 가족들의 심정, 이러한
절박함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없었다면그녀의 선택이 가능했을까? 말하자면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떤 곳이든, 그 곳
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이입이 없었다면,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르프로이와 그녀의 결정적 차이가 아니었을까?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을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머릿속의 빈 공간’을 확보하며 동시에 경제적 안정을 얻는 삶은
로또라도 당첨이 되지 않는 이상 얻을 수 없다.(사실 로또에 당첨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
렇다고 여전히 아무 말할 것도, 쓸 것도 없이 살아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빈 공간’이 없다면, 지금 내가 서있는 공간에
서 말하면 된다. 그 곳에서 관찰하고 성찰하고 그리고 통찰하면 된다. 그것이 ‘자기만의 방’이 없던 시절, 그럼에도 걸
출한 글들을 남겼던 여성 작가들이 했던 일이다. 물론 나는 내가 제인 오스틴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녀가 남긴 교훈을 따르며, 지금 내가 느끼는 공허를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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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스머프
민우회 회원. 안 그런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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