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 영화관] 당연히, 너는 내가 아니다 :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사람들은 종종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곤 하지만, 최근에 내가 겪었던 마찰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태는 이렇게
진행되었는데,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나는 최근에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고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던져 주었
다. 하지만 그 조언이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쓸모가 없는 것이었고(여담이지만 그 조언, 이미 옛날에 따라봤다),
나는 그 말은 나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조언이 맞다고 주장했
고 결국 나는 ‘당신은 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재차 물었고, 나는 우리는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데 내 모든
문제를 어떻게 당신이 다 이해하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갈등은 그 지점에서 최고조로 폭발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우리는 서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 왜 자꾸 자기를 밀어내고 외부인 취급하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냐고, 정말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냐고 재차 질문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며, 나는 화가 난다기 보다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나
에게 누군가 나와 다른 위치에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을 외부인 취급하거나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보편적
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화를 낸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것처럼, 나도 그 사람에게 마찬가지다. 이건 내가
평소 누군가와 얼마나 가깝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가족만큼 가까운 사람이 어딨냐고 하지만, 반대로 어느 순
간 가족만큼 낯선 사람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 제각기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고,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아직 서로 넘지 못한 벽이 있다
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암울한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있는 위치가 다르면 보이고 느껴지는 것도 다르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과 가깝다고 해도, 그 사람은 보고
느꼈지만 나는 아직 그러지 못한 것들이 남아있다. 이 사실을 전제해야만 우리는 당사자의 말을 존중할 수 있다. 말
하는 사람도 신뢰를 가지고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다. 이미 내가 누군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그 사람
과 나 사이에 대화가 왜 필요한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를 떠올렸다. 자비에 교수가 프로페서 X가 되고, 에릭 렌셔가
매그니토가 되기 이전 초창기 돌연변이들이 겪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미 잘 알려져있듯 자비에 교수는 다른 사람
의 머릿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에릭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맹목적인 복수를 추구하는 그를 보다 나
은 길로 이끌고자 노력한다. 에릭 또한 자비에를 통해 자신에게 어두운 기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그
의 팀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두 사람의 길은 틀어지게 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핵전쟁을 막아낸 돌연변이들을 향해,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미사일을 퍼붓는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미사일의 방향을 반대로 되돌리는 에릭. 이에 자비
에는 ‘(미사일을 발사한) 저 사람들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선량한 사람들’이라며 에릭을 만류한다. 하지만 에릭
이 명백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사람들도 명령을 따랐을 뿐이 선량한 사람들이
었다는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머릿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비에 조차도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에릭이
나치 치하의 유태인으로서, 그 비극을 어떻게 보았고 받아들였는지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감’은 지향해야 할 것이지 결코 ‘전제’해야할 것
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고유한) 하나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 그 사람과 내가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어쩌
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이미 내가 그런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만 보게 되고, 상대방도 딱 그만큼만 보고 느
꼈을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것이 묻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공감보다는 ‘이입’ 혹은 ‘관여’라는 단어를 조금 더 선호한다. (외부에서) 무언가를 내 안으로 옮
겨놓는 일, 관계를 통해 어떤 일에 참여하는 일, 이 같은 단어는 나와 상대방이 복수의 개별적인 주체이며 동시에 두
사람이 다른 공간을 점유함을 전제한다. 때문에 이 단어는 여지를 남긴다. 아직 내가 당신에게서 옮겨오지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울분을 터트렸던 그 사람이 알아야 했던 건, 인간관계에 대한 이런 가장 기
본적인 전제가 아니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너는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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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스머프
민우회 회원. 안 그런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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