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 영화관] 우리를 두고 세상은 움직일 수 없다 : <서프러제트>
영화 <서프러제트>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인공 모드 왓츠의 남편 소니일 것이다. 이 전형적인 가부장적 노동자 캐릭터는 모드가 여성 참정권 운동에 깊이 개입하고 경찰에 잡히길 반복하자 그녀를 집에서 내쫓고 아들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만다. 또한 아이를 보길 원하는 모드에게 그는 자식에 대한 법적인 권리는 오직 남성인 자신에게만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양육을 모두 아내에게 떠넘기던 소니가 아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한계에 봉착한 그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만다. 바로 아이를 다른 가정으로 입양 보내는 것이다. 이 당혹스러운 선택을 두고 그는 이것이 아이를 위해서 더 나은 결정이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소니도 인정했듯, 그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어찌보면 황당한 행보이지만 소니라는 인물의 면면을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모드가 세탁소와 집 모두에서 노동하며 양육까지 맡는 동안, 그는 그만한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먹을 밥조차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아내가 투옥된 동안 다른 집에서 식사를 얻어먹기도 한다. 말하자면 집을 유지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에 필요한 희생을 그는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는 오직 그것을 아내에게 전가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성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정치가 가진 특성이기도 하다. 양육·가사 그리고 여성의 ‘의무’로 지칭되는 모든 종류의 노동은 한 사회가 유지되는데 필수적인 일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그러한 일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 적도 없고, 스스로가 나서서 그 무급의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본 적도 없다. 만일 양육이 남성의 일로 여겨졌다면? 소니처럼 남자들은 그냥 아이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선택했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2년 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박탈되어 있던 것은 사뭇 상징적이다. 영화의 도입부,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주어선 안 되는 이유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은 너무 감정적이고 쉽게 냉정을 잃는다. 투표권까지 주면 여자들은 국회의원, 국무위원, 판사까지 되겠다고 주장할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들은 본래 남성들보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불안정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평등한 위치를 할당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여성들에 대한 차별은 그 성별에 내재한 자연적인 속성 때문이라고 정당화되며, 그 결과 시민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되고 만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강화되는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이다. 고위 정치인의 부인이라는 상류층 여성조차 아내의 이름으로 손쉽게 남편의 통제 아래에 놓이고 만다.
이 같은 예속은 앞서 언급한 희생의 전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아이에 대한 법적 권리는 남성에게 있지만 그 아이를 키우는 일은 오직 여성에게만 의무로 부여된다. 영화에서처럼 남성은 집의 소유권을 가지고 아내를 쫓아 낼 수도 있지만 가정을 가꾸고 유지하는 일은 오직 여성에게만 할당된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서 여성들이 더 위험하고 많은 노동을 할 때도, 임금은 남성들에게 더 많이 주어진다. 이 같은 사회가 어떤 성별의 이익에 복무하고 누구의 출혈로 유지되는지는 뻔하다. 그래서 영화 속 남성 정치 지도자들은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묵살한다. 계속해서 이들을 비(非)인간의 영역에 남겨놓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이 염려한 것처럼, 여성들이 평등한 시민이 되어 정치를 만들어 낼 권리를 가지는 순간 기성의 사회는 유지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시기 여성 운동은 여성이 시민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기본권을 가지는 것, 그것의 첫 단추인 투표권을 쟁취하는 일에 집중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자신의 의사를 표할 기본적인 행위 중 하나가 선거라면, 이를 행할 권리가 없이는 누구도 여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속에서 오랜 시간의 성폭력 피해를 토로하는 모드에게 경찰관 아더는 ‘당신 같은 여자의 말을 누가 들어줄 것 같냐’고 반문한다. 때문에 투표권 쟁취 운동은 영화 속에서 언급하듯 수 천 명의 여성들이 투옥될 정도로 집단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서프러제트>는 이 중 가장 전투적으로 싸움에 임한 여성사회정치연합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선거권 쟁취를 위해 돌을 던지고 거리에 불을 질렀다. 때문에 여성사회정치연합은 종종 다른 참정권 운동 집단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수단의 올바름을 질문 받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경찰관 아드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은 모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남자들이 알아듣는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이러한 그녀의 말은 그 당시 그들이 싸우던 지형이 얼마나 기울어진 곳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여성의 말은 힘을 가질 수 없기에, 주인공들은 스스로 강조하듯 행동으로 남성들에게 의사를 전한다. 여성의 세상이 멈추어 있다면 남성들도 움직이지 못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우체통과 전신선을 터트린다. 여성들이 집을 가질 수 없다면, 남성들도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내무장관의 신축 중인 집을 폭파시켜 버린다. 이 영화는 사회가 올바른 방식으로 말을 들어주지 않을 만큼 정의롭지 못한 곳이라면, 싸우는 사람까지 결백해지려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한국이 조기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며 주요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거나 여성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하는 상당히 고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변화는 무엇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 불었던 여성주의 열풍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변화를 요구하고 분노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한국 사회의 주요 유권자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심지어 대통령을 목표로 한다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참 모자라다. 후보들은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는 나중에 챙겨도 좋다는 식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얕은 이해를 드러냈으며, 낙태죄와 같이 사회적 논란이 첨예한 부분에 있어선 한 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서프러제트>의 배경이었던 1900년대 영국 보다는 낫다. 여성에게는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부여되어 있으며 그래서 형식적으로나마 정치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성들은 동등한 수준으로 몸에 대한 자유로운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가.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은 부여되고 있는가. 안전할 권리와 정치적 대표성은 온전하게 확보되어 있는가.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에밀리 윌딩 데이비스는 더비 경기장에 뛰어들어 왕의 길을 막는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왕을 말에서 떨구었다. 누군가를, 그들의 권리를, 삶을 내버려 둔 채로 세상이 움직이게 해선 안 된다. 소수자들에게 희생을 전가하고 차별을 방치할 것이라면, 나는 그런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향해 가는 길을 막아서겠다. 설령 그것이 달리는 말 앞에 서는 것과 같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
글/ 스머프
민우회 회원. 안 그런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