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 영화관] 끓는 물 속의 개구리 :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
글을 쓰기 위해 노트를 펴면 항상 막막하기 그지 없지만 그래도 원고의 성격에 따라서 고됨의 정도가 다르긴 하다. 주제가 좁혀진 글, 요구하는 메시지가 명확한 글은 비교적 쉽다.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논지에 맞추어서 정리만 하면 끝이다. 오히려 보다 어려운 것은 조금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진 글이다. 가령 ‘영화 리뷰 한편 어때요?’라고 묻거나 '요즘 꽂히는 노래를 좀 이야기 해볼래요?’와 같은 요청이다. 이럴 경우 글의 내용이 온전히 나에게 있어야 한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이든 경험한 것이든 생각한 것이든 말이다. 문제는 내가 화수분 같은 인간이 아니라 그런 것이 전혀 없을 때도 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원하는 것도 떠오르는 것도 없는 무색무취의 일상을 사는 때.
아마 직장 생활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겪는 고충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일을 하면서 글도 써야하는 사람들. 내가 나의 업무를 좋아하고 그 속에서 성취감을 얻는 것과는 별개로 일이 그 자체로 자아의 연장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냉정하게 말하면 오직 나만이 가능한 일이란 없고 때문에 나는 대체가 불가능한 존재는 아니다. 빌딩 숲 속의 무수한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그 공간에서 그저그런 익명의 개인이 되어버린다. 누구나 겪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글감을 찾아내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이런 순간들이 반복되다 보면 삶 자체에 대한 위기감이 들곤한다. 특별히 대단한 인생을 바란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이렇게 사라지는 건 아닐까 울적해지는 때가 오곤한다.
영화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의 주인공 킴 역시도 그랬을까. 마흔이 막 넘기까지, 킴은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들이 읽는 뉴스 대본을 작성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아프가니스탄 종군 기자 일을 제안 받은 그녀는 이를 수락하고 전쟁터로 향한다.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동료들의 말에 킴은 이야기 한다. 어느날 피트니스 센터에서 매번 타던 자전거를 타다 우연히 카펫에 남겨진 자국을 발견했다고. 그리고 그 자국은 그녀의 자전거가 이전에 위치해 있던 곳에 찍혀 있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제자리에서 계속 페달을 밟는 동안 자전거는 점점 뒤로 밀려난 것. 킴은 말한다. 언젠가부터 그 자국을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일을 때려치우고 모든걸 때려 부수고 싶었다고.
흔하다면 흔한 내용이다. 자기 삶에 환멸을 느끼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사람들(특히 서구 백인들의 자아 찾기를 위한 아시아 여행기가 많으며 당연히 이 영화에는 그런 작품들을 비꼬는 유머가 등장한다)의 이야기. 차이가 있다면 줄리아 로버츠 같은 사람들이 인도와 발리에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찍고 있었다면 티나 페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 그러니 이야기의 성격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자아를 찾는 여행기가 비움을 향한 여유로운 여정을 그린다면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한 여성의 치열한 투쟁기를 펼쳐 보인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공허했던 킴의 삶에 더 이상 덜어낼 것도 없는걸.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은 전쟁터가 아닌가.
물론 코메디의 대가인 티나 페이 작품이기에 많은 갈등 상황은 유머러스한 여유와 배포로 해소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한 고민이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전장에 오랜지색 가방을 매고 나타날 정도로 초짜이던 킴은 이윽고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을 뚫고 촬영을 감행할 정도로 대담한 종군 기자로 성장한다. 하지만 방송국은 점점 반복되는 아프가니스탄 보도에 질려하고 킴은 더 좋은 뉴스거리를 위해 더 큰 위험을 무릅쓰거나 더욱 무모한 행동을 감행한다. 그 결과 킴을 보조하던 현지인 가이드 파힘은 그녀가 위험이 주는 쾌락에 중독되었다며 킴을 떠나고 설상가상 그녀와 연인 관계인 이아인이 취재 도중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고만다.
이 같은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듯 이아인은 킴에게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조금씩 오르는 물의 온도를 눈치채지 못한 개구리는 끓는 물에 계속해서 남게된다는 이야기. 차이가 있다면 킴은 그 개구리는 죽게 된다고 주장하고 이아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때문일까 같은 이유로 킴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게 된다. 이 모든 환경이 정상적으로 받아 들여지기 시작했다는 것. 사실 이 같은 결말에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생각한다면, 미국에서의 생활은 정상이고 카불의 환경은 비정상이라는 그녀의 도식은 지나치게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물론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이 전쟁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조심스럽고 충분한 무게를 부여해 다루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끔찍한 상황이 결국 서구 백인 캐릭터의 모험과 깨달음을 위해 소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든다.
어쨌든 이 같은 의구심을 잠시 걷어 두자면 영화의 결론을 수긍할 수 없진않다. 전쟁이 누군가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긴 하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책상을 박차고 보다 다채로운 삶을 사는 꿈을 꾸곤한다. 하지만 숨막힐 듯한 사무실을 벗어나도 소속도 직책도 없는 내 앞에 펼쳐진 길이 꽃길일리는 만무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것도 없는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은 그야말로 전쟁과 다름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내가 그런 생활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영화를 보곤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삶에 너무 잘 적응해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까. 그 치열함이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와도 괜찮은걸까.
자기 삶을 찾기 위해 회사를 떠난 친구들을 보곤했다. 운과 재능, 자원이 풍부한 소수를 제외하곤 원하던 바를 빨리 성취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그 친구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격렬한 삶 속에서 건강도 평온함도 잃어가는 이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하곤 했다.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되어버린건 아닐까.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피트니스 센터의 자전거 위에 있는 것도 전쟁터 한복판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것도 완벽한 답이 아니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현명한걸까.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은 할까.
그래서인지 킴이 아나운서로서 새 삶을 찾는 영화의 결말은 어딘지 어정쩡한 타협처럼 느껴졌다.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은 준수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보고 난 후에 공허함이 느껴졌던건 영화가 진짜 질문을 던지자마자 너무 성급하게 그것을 봉합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
글/ 스머프
민우회 회원. 안 그런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