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erine Breillat의 "Breve Traversee"
짧은 횡단(Breve Traversee, Brief Traverse)
감독: Catherine Breillat
작가: Catherine Breillat
출연: Sarah Pratt, Gilles Guillain
'포르노 작가'라는 악명(?)이 붙여진 카트린느 브레야의 "짧은 횡단". 새라 프랫이라는 배우가 궁금해서, 뒤져보았으나 IMdb에도 간단한 필모그래피만 소개되어 있을 뿐이었음. 암튼 이 영화의 내용인 즉, 영국 해협을 건너는 대형여객선에서 만난 16세의 프랑스 청년과 30대의 중년(? 30대면 중년은 아닌디, 이 영화에서는 중년삘로 그려짐..쩝...) 여성과의 1박2일에 걸친 성애적 교재, 이른바 '원 나잇 스탠드'에 이르게 되는 두 남녀의 만남의 시작과 진전과 결말을 보여줌.
유럽, 영국 영화를 보다 보면, 새삼 내가 얼마나 헐리웃 방식의 문법과 시선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깨닫게 됨.
이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 배경이 어찌나 일상과 닮아있는지, 처음엔 나도 모르게 왕 실망했음.
배우들의 옷차림도 그렇고, 배경이 되었던 객실, 레스토랑, 바도 그렇고, '영화'를 위해서 세팅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함. 객실의 촌스러운 커튼하며, 깔끔하지만 그다지 넓어보이지 않는 객실하며,...주인공인 토마스 역의 쥘르 길랭은 프랑스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외모의 전형적인 10대의 느낌, 앨리스 역의 새라 프랫 역시 꽤 미모임에도 불구하고 옷차림과 화장이 너무나 평범해서 전혀 '눈요기'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음.
이렇게 세팅에 지속적으로 '왕실망'하면서도 열심히 끝까지 보았던 이유는 단 두가지.
하나는 가끔 이렇게 전혀 다른 영화 문법을 가진 영화를 '봐줘야' 한다는 의무감.
'눈요기'를 전혀 만족시키지 않는 영화, 그래서 지속적으로 관객을 왕실망시키면서 생소한 영화 문법으로 말을 걸어오는 영화, 이런 영화들을 봐야 '익숙한 세계'로부터의 이탈이 가능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임.
또 하나는 감독에 대한 호기심.
카트린느 브레야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음. IMdb 들어가서 이 사람에 대해서 찾아보았는데, 이 사람이 쓴 메모를 훓어보니, 엄청 정치적인 사람이더만. 하기야 17살에 "쉬운 남자"라는 소설로 프랑스 문단에 '정치적'으로 등장했으니 알법도 하지. 그런데, 48년생인 이 사람의 주요 화두는 줄곧 'sexuality'였다는 게 좀 신기했음. 스스로를 프랑스 영화계의 '부랑자'로 지칭하며, "왜 도대체 역사적으로 남성은 자신을 욕망할 수 있는 여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더만. 사실 그게 궁금하긴 하지. 그런데, 한 평생 살면서 그렇게 온통 자신의 화두가 (그것도 10대 시절부터) sexaulity였다는 건 그 배경에 자못 호기심을 유발하더만. 암튼 이 사람, 아직까지 프랑스의 주류 영화계에서 왕따인 모양인데,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어.쨌.든.
이 영화에서 브레야가 자신이 도전하고자 하는 세상의 문법, 섹슈얼리티의 각본, 규범적 인간성을 그려내면서 비트는 방식이 '상쾌'하지는 않았다.
영화에서 보면, 여주인공 Alice는 승선한 배의 식당에서 Thomas를 본 순간부터 작업에 들어간다.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서, 뚫어지게 상대를 쳐다본다던가, 8년간의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에 대한 외로움을 16살 먹은 솜털 보송보송한 프랑스 소년(아니 청년?)에게 털어놓는다던가,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은근히 머리끈을 풀어 긴머리 헤어스타일을 노출함으로써 단계별 '추파'에 들어간다.
한편 Thomas는 이 언니한테 18살이라고 뻥을 쳤다가, 배 안의 면세점에서 고른 술을 사려다가 계산대에서 딱걸린다. 18살 이상이 되어야 술을 팔 수 있다오. 계산원에게 여권을 보여줬다가 나이가 들통나면서, 잠시 찌그러져 있었으나, Alice의 세련된 처분에 따라 다시 '소년'에서 '남자'로 등극. 그 사이 열심히 담배를 뻑뻑 핀다던가, 술 값을 자기가 낸다던가 열심히 '남자'의 포지션을 획득하려고 기를 썼으나, 사실 '남자'로서의 기를 회복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음.
Thomas는 노골적으로 섹스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Alice는 그렇게 들이대는 Thomas를 살짝 가지고 놀다가 그만 토마스의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 그렇게삐져서 나가버린 토마스를 앨리스는 갑판 위에서 찾아내고, 화해 모드가 조성되면서, 어느 순간 토마스는 엄마 뻘의 이 아줌씨에게 반말을 까기 시작함.
Tutoyer. 프랑스어에는 엄연히 존댓말과 반말이 있음. 뛰뚜아예는 '반말 하다"라는 뜻. 이 새파랗게 어린 것이 그 전까지 'Ma'am'이라고 부르던 앨리스에게 '너(tu)'라고 반말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성애적 관계의 진전을 보여주는 상황.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앨리스의 방에서 섹스를 하고....거의 끝까지, 막판 직전까지 영화는 아주 뻔한 이야기임.
중년의 유부녀가 어린 남자를 꼬시는 방식이나 이 여자의 몸과 마음을 얻기 위해 어린 것이 '남자'로 보이려고 행동하는 방식이나, '전통적인' 각본, 전형적 클리쉐였음.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토마스가 잠깐 짐을 가지러 간 사이, 기다리겠다고 한 앨리스가 지극히 냉담한 혹은 무표정한, 아무일 없었다는 듯 마중 나온 남편과 아이(토마스에게 한 말, 애가 없다는 말을 완전 뻥이었음)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지고, 토마스는 비를 맞으며 허벌나게 쫒아왔으나 이 장면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빨개진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
어찌보면 이것도 클리쉐일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보건데, 브레야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그려내는 방식은 뭔가 불편한 긴장을 유발하는 듯 하다. 브레야는 자신이 도전하고자 했던 문법을 비틀어서, 혹은 그 문법의 영역 안에서의 비정상성이나 왜곡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남녀의 노골적 섹스 장면, 전혀 포장되지 않은 알몸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은 (기존 영화의 섹스 장면과는 달리) 섹스 장면을 탈성애화시킨다. (나만 그런가? 암튼 나한테는 전혀 안 섹시했음)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브레야가 도전하고자하는 남성성의 전형을 갖춘 남성 관객이라면, "저런 나쁜 x가!"라는 욕이 절로 나올 법한 장면이었음.
앨리스와 토마스의 관계는 남녀 간의 성애적 관계의 입문과 진전에 관한 전형적 각본을 보여주지만, 마지막에 앨리스가 배신을 때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사라지는 장면, 그 장면은 토마스와 앨리스의 만남이 결국 앨리스에게 있어서는 진부한 일상에서의 짧은 일탈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앨리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강력한 주체로 보이는 건, 단지 그녀가 평범한 주부의 일상에서 미성년자와의 정사라는 일탈, 즉 경계 위반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녀가 '주부의 삶'과 '미성년자와 바람피는 나쁜 여자'라는 경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었다는 점, 바로 그 경계 위반(brief traverse)의 능력에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마지막 장면이 내겐 썩 유쾌하지 않았다. 기껏 여주인공이 할 수 있는 위반이라는 것이 '경계'를 횡단했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옴으로써 그녀의 제자리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으나....나는 아무래도 규범적인 인간이라서 그런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여주인공의 냉정한 얼굴이 그다지 정치적으로 파워풀해 보이지 않았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ㅋㅋㅋ. 근디 어디서들 왔댜?
http://www.imdb.com/title/tt0299594/
2001년 영화여. 근데 영화 분위기는 80년대 삘이여...
근데 이게 몇년도 영화여? 읽다보니 최근 영화는 아닌 것 같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