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호락 캠페인, 그 후...
한동안 수많은 논쟁들로 북적북적했던 호락호락 캠페인의 온라인 사이트는 이제 말없는 발걸음들만 다녀갑니다.
그러나 가족내 '호칭'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논쟁은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 읽기의 풍부한 텍스트가 되어주었습니다.
호락호락 캠페인 그 후,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호칭'과 '불평등', 그리고 '한국사회'에 관련한 논의들을 소개합니다
<조선일보, 2007/01/11>
[시론] ‘언어의 민주화’ 생각할 때
임지현/한양대 교수·서양사
10여 년 전의 일이다.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집필 지침을 받아보고 난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십장’, ‘수공업자’ 등을 가리키는 foreman, craftsman 등의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남성을 뜻하는 ‘~맨’이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단어들은 성차별주의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나는 그 출판사에서 간행된 폴란드 노동사 논문에 대한 마지막 교정을 앞둔 상태였는데, 도대체 ‘십장’이나 ‘수공업자’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노동사를 쓸 수 있겠는가 하고 혼자 투덜거린 기억이 난다.
그 후 나는 한국에서 ‘체어맨’이라는 고급 승용차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기억을 떠올렸다. 영어에서 남성주의적인 ‘체어맨’은 중립적인 ‘체어퍼슨’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사라지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급 승용차가 ‘체어맨’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팔린다는 사실은 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신경을 잘 드러내 주는 예가 아닌가 한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외화의 더빙에서도 말의 힘에 대한 성찰은 없다. 원어(原語)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대등한 관계의 화법이 한국어 더빙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남성 주인공에게 경어를 쓰고 남성은 여성에게 반어를 쓰는 권력관계의 화법으로 둔갑한다.
폴란드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독신 여성들에게 ‘판나(panna)’라는 큰 글씨의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발급했다. 일상의 폴란드어에서 ‘판나’라는 말은 ‘노처녀’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큰 단어였다. 여성을 인간 자원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의 의도가 ‘노처녀’에 대한 경멸로 무심코 드러난 것이다.
한때 남한의 대학생들에게 ‘녀성은 꽃이라네’라는 북한 노래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인간이나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기조차 부끄러운 북한은 그렇다 쳐도, ‘여성은 한 가족 알뜰살뜰 돌볼 꽃’이라는 그 노래에 대한 ‘진보적’ 대학생들의 열띤 반응 역시 낯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이 노래의 집단심성은 독신 여성의 여권에 ‘노처녀’라는 스탬프를 마구 찍어 댄 폴란드 공산당의 언어폭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편부모’ 대신 ‘한부모’를, 또 ‘미혼 여성’ 대신 ‘비혼 여성’을 쓰자는 여성운동의 제안들은 신선하다.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의 차별을 막고,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르면,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낸다. 현실이 말의 체계를 통해 파악되는 한, 말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뿐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 체계이자 구조이다. 말이 말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언어생활의 민주화가 정치적 민주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도 현실을 만드는 말의 힘 때문이다. 남녀평등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못지않게, 성차별주의로 가득 찬 일상 언어의 민주화가 중요한 것이다.
어원에 대한 기원주의적 집착과 과민 반응에도 불구하고, 최근 여성민우회가 벌이고 있는 ‘호락호락’ 가족 호칭 바꾸기 캠페인의 문제의식은 그래서 소중하다. 기원을 떠나서, ‘오라비의 계집’을 뜻하는 올케라는 호칭은 사실상 아가씨니 도련님과 같은 시집 식구들에 대한 호칭과는 비교가 된다.
정교한 존대어법과 위계질서의 기호로 가득 찬 한국어 체계에서 민주적인 대안적 호칭을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민우회의 ‘호락호락’ 캠페인 사이트에 올라온 쌍말과 욕으로 점철된 댓글들을 보면, 개헌이나 정치적 민주화는 차라리 쉽다는 생각도 든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향한 길은 어렵고도 멀다.
<인터넷신문 대자보, 2007/01/03>
대단한, 너무나도 대단한 대한민국 남성가족부
[기자의 눈] 절망적인 여성부 폐지운동과 민우회 '호락호락 캠페인' 소동
김오달
기자는 여성가족부(이하 여성부)가 기획한 연말 성매매방지 캠페인(혹은 이벤트)을 두고 여성부 자체를 없애야한다느니 하는 넌센스를 부리는 네티즌들이 얼마 안될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미디어몹과 파란닷컴 등이 함께하는 인터넷 설문 '백플토론'에서 지나치게 비이성적으로 흥분하고 있는 네티즌들의 여론을 보고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정신세계를 갖고 있기에 이런 설문결과가 나오는 건지 황당하다 못해 궁금하기까지 했다. 다시한번 네티즌 '당신'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해외 유력매체의 올해의 인물 선정 취지가 이해되면서도 이러한 네티즌들의 비이성적, 아니 '비아냥적'인 괴력에 대해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아들의 부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인 '며느리'의 경우, 그 어원인 '며늘'이라는 말의 뜻이 '∼에 붙어 기생한다'는 뜻으로 '내 아들에 붙어 더부살이로 기생하는 존재'란 뜻이 담겨 여성비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올케'는 '오라비의 겨집(계집의 옛말)'이라는 뜻이 담겨 '여필종부' 문화를 반영한 여성비하적 호칭에 속한다는 것이 민우회의 주장이다.
이러한 민우회의 '호락호락 캠페인'에 대해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황당하다 못해 엽기적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제는 남성이 역으로 차별받는 시대인가?"라는 정도의 한탄은 기본이고, "가족의 근간, 이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적 근간을 송두리째 흔드는 반사회적 캠페인"이라고 한탄하는 자들까지 난무한다.
오버도 이 정도면 '슈퍼울트라헤비급'이다.
이 캠페인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주장대로 그간 사회적으로 통용되온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바꿔야하는가 하는 질문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캠페인에 대해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느니, "양놈들처럼 애어른 할 것 없이 반말짓거리 하자는 거냐?"느니 하는 것은 넌센스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그 어떠한 무엇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 말대로 '대한민국 자체가 남성가족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양성평등은 사이버 공간에서 조차 맥없이 무너지는가?
(2007/01/03 대자보)
<한겨레21(제644호) 2007/01/19>
새언니
권김현영 동덕여대 강사
‘새언니’는 나보다 2살 연하다. 나는 정말 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실패했다. 내 입에서는 오빠의 아내라는 의미를 가진 ‘새언니’라는 호칭이 쉽게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능한 한 얼굴을 마주치지 않거나 만나도 어색하게 지내고 있다. 나는 오빠가 집안일은 잘하는지 슬쩍 물어보지만, 오빠의 허물에 대해서 ‘새언니’가 나에게 마음 편히 얘기할 리 없으므로, 이 시도 역시 실패했다.
누나와 오빠의 차이
호칭은 계급과 성별, 나이에 따른 위계를 표상한다. 존댓말이 발달한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와 어떤 관계를 맺어갈지 결정하는 데 호칭이 절대적이다. 주민등록증을 내놓고 나이와 학번, 혹은 기수에 따른 호칭이 정리된 뒤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결정했다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 흔한 에피소드이다.
대개 남성들은 “오빠”라고 불리면 좋아하지만, 여성들은 남자들이 “누나”라고 부르면 좋기도 하고, 나이 많아 보여서 기쁘지 않기도 하다. 오빠는 (아이) 아빠가 되지만, 누나는 (아이) 엄마가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누나라고 안 부를게”라는 남자 후배의 선언은 곧 사랑 고백이고, “이제부터 오빠라고 안 부를게”라는 여자 후배의 선언은 커뮤니티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대개 아저씨나 아줌마로 불리는 게 기분 나쁜 건, 상대방에게 전혀 이성애의 대상으로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연애 가능한 나이를 20대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령자 차별주의이다.
또한 오빠와 누나라는 호칭을 취하고 버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애 코드들은 성별 권력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오빠’와 ‘아빠’가 친족 관계가 아니라 파트너를 지칭하는 호칭이 된 것처럼, 호칭은 부르고 불려지는 대상의 욕망에 따라 의미가 변화한다.
최근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여성들 간의 호칭 바꾸기 캠페인을 하고 있다. ‘며느리’의 어원인 ‘며늘’이란 말은 기생(寄生)한다는 뜻이며, ‘오라비의 계집’이라는 뜻의 ‘올케’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들 간의 관계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관계로서만 의미를 가졌는데, 이런 문화를 바꾸어보자는 의도이다.
‘언니’라고만 부르는 건 어때요
내가 새언니를 새언니라 부르지 않는 건, 내가 나이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은 위아래로 10살까지 모두 별명을 부르거나, 말을 놓는다. 이는 나이에 따른 권위주의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간의 작은 실천이었다. 물론 나 역시 완전히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라서 8살 어린 친구가 나에게 “야”라고 했을 때는 순간 마음이 얼어붙은 적도 있다. 반말하기는 상당히 부담되는 실천이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언니’라는 호칭을 뒤에 붙여 부르고 있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여성주의 사이트의 이름도 ‘언니네’고, 일상적으로도 ‘언니’라는 호칭은 꽤 인기를 얻고 있다. 레이싱걸, 된장녀 등 여자들을 부르는 남자들의 호명 질서에서 ‘언니’라는 호칭은 여자들이 여자들을 부르는 호명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많은 언니들 속에서 ‘새언니’라는 호칭만큼은 입에 붙기가 영 어색하고 껄끄럽다. 나는 ‘아가씨’라고 불리면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로서만 내가 호명되고, 나의 역사와 경험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오빠의 아내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새언니’라는 호칭이 불편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언니”라고 부르자 해볼까 싶다.
(2007/01/19 한겨레21 제6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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