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영화&토크쇼 : 복지X페미니즘 ‘불안없이 오늘을 살수 있다면’
작년 민우회는 30주년을 맞이하여 성차별 사례를 수집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요, 성차별을 가장 많이 경험한 공간은 ‘가족’으로 나타났어요.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딸로서의 역할 강요’로, 10~30대 여성들은 가족에 대한 정서적 케어(친구 같은 딸, 애교, 부모마음 헤아리기 등)를, 40대 이상의 여성들은 부모 돌봄의 역할을 요구 받고 있었어요. 민우회는 차별사례를 분석하면서, 한국사회가 여성을 ‘시민’이 아닌 ‘딸’로 인식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2018년 민우회는 ‘비혼 딸의 부모돌봄’을 키워드로 ‘딸을 넘어 시민을 상상하다’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5월-8월에는 부모 돌봄의 경험이 있는 스무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9월에는 비혼 여성에게 필요한 복지제도를 주제로 총 4강의 대중강좌를 열었습니다.
포럼 후기 참조 http://www.womenlink.or.kr/minwoo_actions/20634
이어 지난 9/14(금), 9/19(수) 이틀에 걸쳐 각각 서울과 인천에서
부모 돌봄 현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상냥한 앨리스>를 함께 보고, 세분의 패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 & 토크쇼 <복지X페미니즘 불안없이 오늘을 살 수 있다면>’을 개최했어요.
세분의 패널 분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요?
지은숙(비혼돌봄연구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BK21플러스사업단)
일본 비혼여성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돌봄에서의 젠더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신 지은숙님은
비혼 딸에게 사실상 강제되는 돌봄의 현실, 가족 내 성차별, 혈연이 아닌 확장되는 관계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어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쯤에 부모님에게 앞으로 비혼으로 살거라고 했더니 부모님 반응이 예상하고는 달랐어요. ‘너는 이제 영원히 우리 딸이다’ 이 말이 너무 무거운 거예요. 비혼을 결심한 건 가족을 떠나서 온전히 내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였는데, 현실은 오히려 가족 내 딸로서의 역할이 강화되더라구요.”
“일본에서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비혼 딸한테 부모 돌봄은 사실상 강제 노동이라는 것이었어요. 가족 내에서 돌봄을 분배할 때 비혼인 딸이 있으면 다른 형제자매들이 절대로 주 돌봄자가 되지 않으려고 해요. 결혼한 형제들은 나는 가정을 돌봐야 하니까 부모는 결혼 안 한 니가 해라. 이렇게 책임을 미루고, 비혼인 남자형제가 있는 경우에도 당연히 여자니까 하고. 그래서 대부분의 비혼 딸이 압도적인 1순위가 되요. 당사자인 비혼 여성이 이런 압력에 저항이 어려운 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뿐아니라 여성이라는 젠더 규범도 동시에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싫다고 부모돌봄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요. 특히 비정규직이거나 준거집단으로 삼는 조직이 없는 경우에는 가족의 압력에 저항하는 게 불가능했어요. 그나마 협상력 있는 비혼 딸들이 선택하는 길은 주돌봄자가 되면서 부모나 가족들한테 최대한의 보상을 받아내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다른 가족들과 돌봄의 부담을 나눠 갖는 그런 선택이었는데. 문제는 돌봄의 대상인 부모가 비혼 딸의 그런 의도에 편을 들어주지 않아요. 비혼 딸의 돌봄은 따로 보상을 안 해줘도 되는, 무상 노동이라는 생각이 가족 문화 안에 굉장히 만연해 있었어요. 반면 비혼 아들의 돌봄은 부모가 굉장히 미안해해요."
"저는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게 뭐였냐면, 서로 40년에 걸쳐서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서로 돌봐주는 관계인데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가 없는 거예요. 일본에서는 2000만 원 정도 가입비를 내면 보호자 역할도 해주고 상담도 해주고 편안하게 죽음에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대행서비스 회사가 있어요. 어떤 의미냐면 평생 우정을 쌓아온 내 친구는 법적 대리인이 될 순 없지만 회사는 가능한 거예요. 정말 자본주의 사회구나. 우리는 어떤 계약이나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거예요. 가족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친밀권을 만드는 게 비혼 여성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울_소영(부모돌봄경험자)
부모돌봄 경험자이자, 인터뷰이로도 참여했던 소영님은
퇴원 이후 가족에게 전적으로 맡겨지는 돌봄 시스템과 죽음과 질병, 나이듦을 일상과 격리시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눠주었어요.
“어머니가 전부터 아프시긴 했지만, 3개월 전에 걸어들어 온 병원에서 나갈 때는 온전히 몸을 못 쓰게 되었어요. 근데 병원에서는 많이 나아지셨다고, 집에 가셔도 된다고 하는 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치료가 끝났다는 거죠. 이런 상태로 어떻게 집에 가지? 알아봤더니 재활병원, 2차 병원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몇군데 방문해 봤는데 유명한 재활병원은 거의 공장 수준이더라구요. 큰 지하에 100평 되는 재활센터가 있는데 한가지 색깔의 옷을 입은 환자들이 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는 모습이 쫙 펼쳐져요."
"죽어가는 누군가와 24시간 있으면서 느낀 건,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정보가 매우 빈약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30분 이상 엄마 곁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2년 이상 계속 되었어요. 석션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생활반경이 최대 100미터 반경안에 고정되어 있었어요. 온라인을 통해 세상과 연결은 되지만, 저의 고민은 ‘죽음’, ‘끝’에 대한 것이어서 그걸 툭 내뱉는 순간 사람들은 소통하기 보다는 너무 힘들겠다 내지는 저를 안 되어 하는 표정을 지어요. 죽음과 ‘불편하고 아픈 몸’, 내가 잘 알던 사람의 허물어진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장이 있었으면 해요."
인천_고정임(부모돌봄경험자/ 장기요양사)
장기요양종사자이면서 부모돌봄을 경험한 고정임님은
현재 장기요양보험제도의 문제점과 장기요양종사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셨어요.
“장기요양보험이 시작된 지 10년이 되었지만, 현장에서 이용자의 인권과 요양보호사의 노동조건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어요. 현재 일하는 요양보호사의 대부분이 장시간 근무와 낮은 임금, 단시간 시급제라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민간기관과는 철저한 갑을 관계라서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가 어려워요. 노인장기요양보험은 국민 세금과 보험료로 운영되는 제도지만, 실제 서비스는 대부분 민간기관을 거쳐 제공되고 있어요."
"공공성을 당보하는 공공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얼마 전 관련법을 개정했지만, 여전히 시행에 있어서는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 공공 재가돌봄 기관을 늘리고, 장기요양원들의 8시간 노동, 월급제를 시행해야 정서적 지원을 포함한 ‘좋은 돌봄’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 지원가능 시간이 3시간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이용자의 상태나 욕구에 따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힘들어요. 사회서비스원과 같은 공단을 설립하여, 요양보호사 월급제를 시행하면 시간별 방문 수가체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서비스 사각지대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어요."
전희경(여성학자/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여성과 시간, 나이듦, 질병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다양한 대중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전희경님은
돌봄노동에 무임승차하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불편하고 아픈 몸을 ‘비참함’이 아니라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돌봄 받는 훈련의 필요성을 짚어주었어요.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나이듦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청중들이 이런 말을 해요. ‘여자와 남자의 노후에 필요한 것 세 가지가 다르다. 여자는 돈, 딸, 여자친구. 남자는 아내 마누라 와이프’ 하면서 깔깔깔 웃어요. 굉장히 흔하게 통용되는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가족을 통한 돌봄, 가족 안에서의 돌봄을 80%가 여성이 하는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비유죠."
"치매 국가 책임제라고 얘기하면서, 돌봄을 국가가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오만원 지폐가 와서 나를 돌봐주는 게 아니잖아요. 제도와 돈이 필요하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돌봄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 이거든요. 근데 그 사람의 얼굴이 무엇이고 누구이고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는가. ‘돌봄이 집 안에서 건 집 밖에서 건 여성들이 전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걸 이야기해 합니다. 남성들이 더 빠른 속도로 돌봄 노동 안으로 들어와야 되고 강제 되어야 하고, 돌봄의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문화·제도적인 압력 이 있어야 되요."
"늙은 사람, 노년, 노후가 따로 있지 않고. 우리는 지금도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고 있는 중이고 젊은 사람이라고 아프지 않은 게 아니거든요. ‘내 몸의 주인은 나다.’ 그렇지만 나의 주인은 내 몸이기도 해요. 내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내 몸을 내가 따라줘야 되거든요.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는데, 이것을 너무 좌절스럽고 모든 것을 잃었고 슬프게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 몸과 시간을 다시 사고해야, 마지막 순간까지 한명의 나이든 시민으로, 그 사람을 돌보는 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돌봄의 관계라는 것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플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플 준비, 폐 끼칠 준비, 앓을 준비, 돌봄을 받는 실력 쌓기 이런 것들. 돌봄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실력이에요. 돌보는 것도 실력이고 숙련이 필요한 것처럼.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성을 중심으로 자기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만들어온 사람이, 다시 아프고 병들어가는 몸에 적응해서 남의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는 몸으로 바꿔가는 과정들은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그런 노력들이 필요해요."
영화제에 함께 했던 혜영과 위즈덤님의 후기입니다 :)
최근 무릎뼈에서 발견한 악성종양으로 인해 수술과 항암치료를 마친 나는 일상의 변화를 아픈 몸, 회복되는 몸, 나이 들어갈 몸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경험하며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사고의 대부분은 방법을 고민하고 계획하는 것에 할애되는데 여성 1인 가구이자 프리랜서로서의 정체성이 그러한 몸과 결합되었을 때 고민과 계획 앞에 꽤나 많은 불안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 ‘불안 없는 오늘’이 가능할까 자문하게 되는 매일을 지내며 영화에 대한 궁금함과 패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참석하게 됐다.
영화 <상냥한 앨리스>에서 로봇 ‘앨리스’의 역할과 앨리스와 대화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저 작고 딱딱한 로봇일 뿐인 앨리스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던 할머니들은 어느새 서로 질문을 주고 받고 함께 축구중계를 보고 노래를 부르며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빈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존재가 사라질 때 아쉬움에 앨리스를 쓰다듬는 늙은 손과 다시 혼자가 될 이들의 외로움에 동화돼 울컥했다. 외로움이 주는 취약함에 익숙해져 이제는 단단해져 있을지 모를 저들의 시간을 말랑하게 만들었을 로봇 앨리스는 이후 그저 전원 스위치를 끄고 연구실 캐비닛에 들어갈 뿐이다.
이어진 토크 시간에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전희경, 비혼돌봄연구자 지은숙, 부모돌봄경험자 소영 세 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본에서의 연구경험을 말씀해주신 지은숙 님의 경험담이 꽤나 흥미로웠는데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돌봄노동에 있어서의 여성들(딸과 아내)의 무상적 노동이 당연시 되는 반면 ‘독신부인연맹’과 같은 여성노인독립가구들의 연대는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네트워킹 형태였다. 내 주변의 비혼친구들과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1인가구 간의 연대 형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랜 기간 어머니의 돌봄경험과 그로 인해 변화된 삶을 이야기해주신 소영님의 지난한 돌봄 과정을 들으며 아픈 자만이 아닌, 돌보는 자의 삶의 전환 또한 일상의 전복이며 불안과 고통을 동반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는 중대한 몫을 책임지며 나아갔던 경험담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해 마음으로 조심스레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여성학자이자 여성의 생애사를 연구하는 전희경 님은 돌봄은 단순히 노동만이 아닌 관계의 측면이 있음을 말씀해주셨다. 돌봄을 받는 자가 일방적으로 얻는 것이 아닌 다른 측면을 발견하고 그럴 수 있는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제는 남성들이 돌봄노동 안으로 제도적,문화적, 때로는 강제적으로라도 들어와야 하며 누군가의 돌봄노동이 격려되고 높게 평가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질문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했다.
돌봄과 돌봄을 받았던 지난 시간, 내가 엄마를 돌봤던 시기의 책임감과 이를 가족구성원 누군가와도 나눌 수 없었던 서러움, 내가 아팠을 때 나를 돌봐준 70대의 엄마, 친구들, 연인의 돌봄연대와 아픈 몸으로 살아갈 이후의 날을 상상하며 새롭게 정립된 관계를 떠올린다. 포럼 후 오늘의 불안이 내일과 노년의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금 나에게 가능한 형태의 일상 계획은 무엇이며 내가 지켜내야 할 관계망 안에서 나는 이들에게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질문해본다.
덧붙여서 묻자면, 비혼자연맹에 관심 있는 분?
- 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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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동안 복지나 돌봄 등을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영화와 GV를 보면서, 페미니즘과 복지가 충분히 함께 이야기 되어야 했지만.. 그동안 뒤로 미루고 미루어져왔구나..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페미니즘적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해야할까란 질문이 들었습니다. 패널분들에게 실질적인 한국의 복지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특히 부모와 함께 사는 비혼 여성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화<상냥한 앨리스>에서 나오는 노인 돌봄 시스템이 너무나 부럽고.. 더 나은 논의를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어떠한 운동을 이어가야할까 동료들과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위즈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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