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국여성민우회 일고민상담실로 들어온 노동상담은 총 147건이다. 직장 내 성희롱이 98건(66.67%)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직장 내 괴롭힘 21건(14.29%), 고용형태에 의한 차별 7건(4.76), 모집‧고용상 성차별 6건(4.08%)이며 이외 기타 노동사안이 15건(10.2%)이다.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 정서, 코로나19 상황과 맞물려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은 더 교묘해지고 확장되고 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중심으로 2021년 노동상담 경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글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상담사례를 각색하여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Ⅰ. 21년도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의 주목할만한 경향
1. 성희롱과 괴롭힘의 복합성, 확장성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단순히 성희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힘으로 확장되어 성희롱과 괴롭힘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 성희롱에 거부 의사를 밝혔을 때 보복의 일환으로 괴롭힘이 발생하기도 하고, 동료들이 성희롱을 성희롱으로 인지하지 못하여 피해자에게 괴롭힘을 행하는 사례도 있었다.
# “고백을 거절한 이후 직장에서 괴롭힘이 시작됐다”
# “성희롱 이후로 업무 관련해서 어떤 지시도 하지 않고 말도 안 하더라”, “또 갑자기 괜히 트집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더라”
# “그건 분명히 성희롱이었는데 행위자인 상사로부터 내가 애정을 받는다는 식으로 소문이 났다”, “그랬더니 상사 중 한 분이 언제부턴가 기분 나쁘게 대한다. 인사도 안 받고, 갑자기 나한테만 존댓말하고”, “남들과 똑같은 행동을 해도 유독 날카롭게 반응하더라”
이렇듯 직장 내 성희롱은 괴롭힘으로 이어지거나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고용노동부는 접수된 사안에 대해 단순히 성희롱인지, 괴롭힘인지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 사건의 맥락에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분리하여 처리하고 있다.
# “동료들로부터 겪는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해 나간 관리자와의 면담 자리에서 성희롱을 겪었다”, “노동청에 접수했더니 무조건 괴롭힘이랑 성희롱 따로 분리해서 사건 진행해야 한다더라”
# “내가 겪은 일이 성희롱이랑 괴롭힘이 섞여 있는데 근로감독관은 계속 나눠서 얘기하라는 게 말이 되냐?”
고용노동부는 성희롱, 괴롭힘 사건을 각각 개별로 접수하더라도 사건 판단은 전후맥락을 고려하여 통합적으로 해야 한다. 한 노동자가 겪은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삭제된다면 각각의 성희롱과 괴롭힘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
2. 여성혐오 정서에서 비롯되는 노동권 침해
최근의 반페미니즘정서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노동현장에서도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형태로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30대 남성커뮤니티 문화가 소규모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를 향한 여성혐오성 괴롭힘과 성희롱으로 이어진 사례들이 있었다.
# (행위자가 말하길) “너 페미냐? 나한테서 접근금지”, “(그만하라고 했더니) 너의 반응이 재밌는데 너 말고 다른 누구를 괴롭히겠니?”
# “신체접촉을 자주 겪었는데 예민하다고 그럴까봐, 또 페미년이라고 할까봐 무서워서 참았다”
# (행위자가 말하길) “지금 네가 겪은 일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될걸? CCTV 앞에서 성폭행하는 정도는 되어야 고소할 수 있어”
위 사례처럼 여성혐오 문화가 팽배한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나 멸칭으로 낙인찍히며 문제제기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노동자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이자 노동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반페미니즘 정서가 노동현장에서 어떻게 실질적인 노동권 침해로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적극적인 인지와 개입이 필요하다.
3. 공직사회 내 성폭력 사건이 노동현장에 미치는 영향
몇 년간 연이어 발생한 지방자치단체 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전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여론이 형성되거나 조직에서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일터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특히 공무원 조직에 있는 여성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제기 이후 어려움을 겪는 피해당사자의 상황을 언론을 통해 지켜보면서, 본인에게 성희롱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하고 위축되는 사례가 있었다.
# (공무원) “서울시장 뉴스를 접하다 보니 피해사실을 알리는 게 결국 나한테도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더라”, “그냥 조용히 가해자랑 분리만 되면 좋겠다”
이처럼 공직사회 내 성폭력 사건이 대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사건의 제대로된 해결은 매우 중요하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가 비호받거나 사건이 왜곡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한다면 노동자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일선 노동현장의 여성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정치권과 정부, 사법부는 이에 책임감을 갖고 ‘직장 내 성희롱 금지’라는 법의 취지를 상기하며 공직사회 내 성폭력 문제를 잘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4.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을 통한 부정적 소문 확산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앱에서 회사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을 가십처럼 소비하는 사례들이 확인되었다.
# “블라인드에 내 사건 글이 올라왔는데 거기에 나에 대한 악성 댓글이 달렸다. 내가 상사를 음해하려고 성희롱으로 몰고가는 거라면서”
# “블라인드에 상대방이 쓴 것으로 유추되는 글이 올라왔다. 내가 부장이랑 사귀는 사이라면서, 전혀 사실이 아닌데 진짜인 것처럼 써놓았더라”, “회사에 글 내리도록 조치 취해달라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 “블라인드에 나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의 게시물에 댓글로 성희롱 피해자를 암시하는 듯한 비하 내용이 달렸더라. 다른 사람들이 지금 이 일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 여기는 잘못된 통념이 작동하는 회사들이 여전히 많다. 때문에 올바른 사건 해결과 피해자 보호를 위하여 회사는 사건 처리 전 과정에 걸쳐 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한다는 책무를 갖는다. 그러나 블라인드 커뮤니티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사실과 다른 추측성 정보나 개인의 잘못된 의견도 여과없이 게시되어 사건 해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회사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부정적인 소문 확산을 중단할 수 있도록 사내 공지로 요청하는 등 피해자가 블라인드앱으로 인한 2차 피해를 겪지 않도록 적극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5. 코로나19가 성희롱/괴롭힘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2020년부터 지속된 코로나19는 서비스직, 시간제,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에 다수 종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에게 더 큰 여파를 미쳤다. 무급휴직을 강요당하거나 계약해지, 해고로 이어지는 등 여성노동자 실업률은 2020년 4%로 전년대비 11.1%p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희롱/괴롭힘 피해를 겪더라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조건이라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아 고통을 감내하며 버티는 사례들이 있었다.
# “성희롱이랑 괴롭힘 때문에 너무 힘든데 사장한테 솔직하게 말을 못 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게 구한 곳인데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할까봐”
코로나19 상황에 따른 불안한 일자리라는 인식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더욱 주저하도록 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는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출발점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회적 명제가 대사회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필요하다.
Ⅱ.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의 주요 특성
1.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성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은 직장 내 위계에 기반한 힘의 차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신입/인턴, 비정규직, 파견직이라는 취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경우가 많다. 신입이나 사회초년생의 위치에 있는 노동자는 성희롱 피해를 입었을 때 업무역량을 쌓지 못하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는 등 안정적인 직업적 전망을 갖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정규직, 파견직 노동자들은 취약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는데, 계약직이었다가 계약 갱신이 되지 않아 해고로 이어지거나 파견직으로서 제대로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등 모든 문제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 “인턴”, “사회초년생”, “내가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 “한달 전에 입사했다”, “출근한지 이제 4주차다”, “2-3개월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정직원 된 지 한 달 됐다”
# “3년간 일했고 1년씩 매년 근로계약을 갱신했는데 성희롱 이후로 갱신을 안 해준다”
# “계약직이었는데 괴롭힘 신고한 이후에 계약연장을 안 해주고 그대로 만료되었다”
# (비정규직) “성희롱 문제제기한 이후에 퇴직금 안 주려고 일한 기간이 1년이 되기 직전에 나를 해고했다”
# (파견직) “파견업체는 지금 내가 일하는 회사가 갑이니까 회사 눈치를 보더라. 또 회사는 내가 가해자랑 분리시켜 달라고 해도 파견업체랑 상의해봐야 한다고 핑계 대면서 지연시키더라”, “파견업체는 나보고 지금 회사랑 싸우지 마라고 하더라”
특히 프리랜서, 특수고용노동자 등 근로기준법 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형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성희롱이나 괴롭힘을 겪더라도 법의 보호망 바깥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문제제기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 (방송계 스태프) “사건 후에 시간이 지나고 다른 곳에 일하러 갔는데 사람들끼리 얘가 누구 신고한 애다, 이런 말들을 하더라. 소문 때문에 일을 계속 하기가 어렵다”
# (골프장 캐디) “성희롱 겪고 나서 너무 힘든데 나의 휴가가 길어지니까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그냥 일을 그만두라고 하더라”
또한 5인 미만 등 영세사업장의 경우 사장의 권한이 막강하며 성희롱 가해자와의 분리나 업무이동 등의 조치가 어려운 노동환경일 가능성이 크다 보니, 피해자가 일을 계속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았다.
# “사장이랑 나랑 둘이서 일한다. 이제 어떡하냐?”
# “사장이 나를 성희롱을 했는데 그럼 내가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렇게 현재의 근로기준법은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근로자’ 정의에서 배제될 때가 많고,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적용이 제외되기 때문에, 법 개정을 통해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고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2. 가해자의 영향력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에 비해 가해자는 높은 직급이나 연차, 혹은 정규직처럼 안정적인 고용형태에 있으며 직장 내에서 더 많은 자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인에게 미칠 가해자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 “가해자가 자진퇴사 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 지었는데, 같은 업계에서 그 사람의 소식이 들려오니까 나중에 혹여나 나랑 마주치지 않을까,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두렵다”
# (도제식 사업장) “만드는 방법을 가해자한테 배워야 하는데, 알려달라고 해도 계속 안 알려주고, 가해자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가해자 눈치를 보는지 나한테 안 알려주려는 것 같더라”
이러한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실제로 피해자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사는 사건을 처리한 이후에도 가해자가 지위를 이용하여 피해자를 압박하지는 않는지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3.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고, 동료들의 말들로 문제제기를 주저하게 되는 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은 일터에서, 동료 간에 발생하는 일이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해 피해자의 노동환경이 침해되었음에도 오히려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쉽게 노출된다. 그것은 가해자의 말, 동료들의 이야기로 형성되기도 하고, 피해자 스스로 ‘몰인정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해자가 오히려 문제제기하려는 피해자에게 자살을 암시하거나 운운하는 사례는 최근 눈에 띄는 또 다른 직장 내 성희롱 가해의 행위로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부에 신고했을 때 근로감독관이 ‘가해자의 자살’을 언급한 사례는 더욱 문제적이다.
#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 했더니 가해자가 그럼 자기는 자살할 거라더라“
# "가해자가 나보고 '너 때문에 내가 힘들어서 OO강에 뛰어들고 싶다'고 했다“
# “난 공무원인데 특수한 직렬이라 이 사람들과 오래도록 일해야 한다. 그 집 부인이나 자식들과도 모두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 "노동부에 신고했더니 근로감독관이 가해자가 자살하면 어떡하냐고 되려 나에게 묻더라"
성회롱과 괴롭힘을 문제제기하려는 피해자는 회사와 동료로부터 “주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정당한 문제해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 노동현장에서는 피해자가 사소한 일을 큰 문제로 만드는 사람이라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다. 그래서 피해자가 이 모든 부당한 상황을 그대로 떠안게 되는 사례가 많았다.
# “가해자가 중징계를 받았다. 별거 아닌데 내가 인사팀에 얘기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며 다른 팀 선배가 나를 나무랐다”
# “본부장님(이 가해자는 아니지만) 퇴임식에서 이런 일(성희롱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 분이 연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해서 참았다”
# “가해자교육 하기로 해놓고는 계속 미루길래 교육 언제 하냐고 회사에 물었다. 그랬더니 ‘OO이 저렇게 바쁜데 교육 받을 시간이 어디 있니? 넌 너만 생각하니?’라고 하더라”
# “팀장님이 '너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랑 잘 지내는 모습도 보여줘야 할 거'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문제를 알리고자 고민할 때 망설이는 이유 중에 또 하나는 함께 문제제기하고 대응해줄 동료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 "사무실에서 폭력적인 말들이 오가는 편이다. OO대리도 나처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물어봤는데 자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면서 괜찮다더라"
# "평소 분위기를 봤을 때 내 의견만으로 노조가 움직여줄까? 확신이 안 든다"
성희롱 사실을 조직에 알리기 위해서는 해당 주제를 꺼내놓았을 때 동료들과 조직이 함께 반응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필요하다. 특히 노조는 성차별 및 성희롱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노동자들에게 내가 겪는 문제도 중요하게 다뤄질 거라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나의 문제에 공감하면서 목소리를 낸다면 피해자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한편 행위자가 사과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회사나 동료가 나서서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과 자리를 성급히 마련하려는 경우들이 많았다. 사과받기를 주저하는 피해자를 오히려 책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 "‘김부장이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하는데 네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냐’며 나를 탓하더라"
# "주변에서는 사과를 받으라고 하는데 근데 나는 그 사람 목소리조차 듣기 싫다"
# "사과를 하긴 했다. 근데 나는 싫다고, 만나기 싫다고 했더니 그냥 메일로 사과하더라"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과의 필요성과 시점,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과를 원하는지 아닌지, 원한다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면 좋겠는지가 당사자의 충분한 고민 속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사과는 대면, 이메일, 공개사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며 만약 피해자가 사과를 원치 않는다면 그러한 입장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점이 충분히 고민된 뒤에 사과가 이뤄져야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사과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건 해결 과정에서 소극적이고 문제적인 회사
1) 사건 처리의 이해가 부족한 회사
사건처리 과정은 피해자의 노동환경을 회복시킨다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취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사건처리를 형식적으로만 접근하려는 회사들이 많았다.
# "인사팀에서 나보고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묻더라. 회사가 먼저 어떤 방안이 있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회사에서 당연히 처리해줘야 하는 일들을 왜 내가 다 찾아서 요구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그 요구를 할 때조차 안 좋은 시선을 받아가면서 요구해야 하는 것인지?", "회사 입장에서는 '너가 말한 거 다 들어줬는데 너 왜 그래?' 이런 식이다"
# "인수인계를 가해자한테서 받으라고 하더라. 내가 항의를 하니까 내가 제출한 진술서 요구사항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면서 내 탓을 하더라"
# “회사가 사건처리 ‘절차’만은 철저히 지킨다. 근데 법적으로 딱 걸리지 않는 선에서 한다. 그럼 문제가 없는 거냐?”
직장 내 성희롱, 괴롭힘을 인지한 회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회사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되 피해자가 이 과정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건 처리과정이 불합리하거나 미흡할 경우 피해자는 회사를 신뢰하거나 회복에 온전히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러한 사례들이 다수 포착되었다.
# “피해자인 나는 인사위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가해자인 부장은 참석한다고 한다. 팀장에게만 소명의 기회를 주는 것 같아서 나도 참석하려고 한다”
# “조사위원회 구성이 죄다 남성들이다. 믿을 수 있을까?”
# “내가 현재 임신출산으로 직장에서 장기 부재중인데 과연 회사가 사건을 제대로 검토할지 의문이 든다”
2) 사건 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는 회사
성희롱 사건에 대한 조사와 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고 책무를 회피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 “회사에서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행위자랑 나랑 주장이 서로 상반되고 모호하고 증거가 없다고 성희롱으로 인정 못 받았다”
직장 내 성희롱은 일상적인 직장생활 와중에 당사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물리적인 증거나 목격자가 있기 어려운 특성을 갖는다. 또한 피해자와 행위자의 진술도 상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할 지를 판단하는 것은 회사의 몫이다. 성인지감수성을 바탕으로 해당 행위가 이루어진 구체적인 상황과 전후맥락, 당사자들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회사가 판단해야 할 것이다.
3) 외부기관의 판단에 기대어 노동권 보장의 책무를 저버리는 회사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경찰, 검찰 등 외부법령이나 기관을 통하여 절차가 진행될 경우, 회사가 손을 놓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사례들이 있었다.
# “외부 법률을 통해서 사건이 조사/처리중이라면 회사가 사내 조사를 중지할 수 있다는 내부 규정이 있다면서 내 사건을 조사하지 않겠다고 하더라”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책무가 사업주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회사는 성희롱 피해 노동자가 안전하고 평등하게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노동환경을 조성할 의무를 갖는다. 따라서 외부의 법적 소송과 별개로 남녀고용평등법의 취지를 살려 사건이 직장 내에서 금지하고 있는 행위인지 여부를 판단하고 이에 수반되는 피해자 보호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법적으로 성폭력 범죄로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 피해자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 “형사결과가 불기소로 나왔으니 나의 부서이동 요구는 들어줄 수가 없다더라. 피해 사실 확인이 안 된다면서”
# “소송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나에게 수시로 묻더라. 그러다가 형사 불기소 판결이 나오자마자 내가 직장 내 분위기를 흐렸다는 이유로 징계하겠다고 하더라”
성폭력이 범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고의성, 증거 등 직장 내 성희롱보다 더 엄격한 성립요건이 요구된다. 따라서 불기소 처분 등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성희롱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회사는 이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직장 내 성희롱으로서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해야 한다.
4) 가해자 분리 조치를 적절히 이행하지 않는 회사
성희롱 발생 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조치는 피해노동자가 안전하게 일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 “인사팀에 얘기했더니 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다른 팀으로 발령났다. 이건 내 의사에 반하는 거 아니냐?”
# “가해자는 맡고 있는 업무가 많아서 우리팀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난 어떡해야 하냐?”
그리고 분리 등의 인사 조치는 피해노동자 뿐만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므로 조정 과정에서 조직 내 충분한 소통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피해자로 인해 부담이 증가한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피해자를 원망하는 여론이 조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피해자의 위축감으로 돌아오게 된다.
# “제가 OO팀으로 발령이 나면서 갑자기 보직이 맞변경된 동료가 지속적으로 고충을 토로하는데 너무 죄책감이 든다”
조정의 당사자가 되는 구성원들에게는 이것이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이에 파생되는 여러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회사가 적극 나서야 한다.
5) 피해자 휴가제도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
성희롱 발생 후 피해자는 심신의 안정을 위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사건 조사기간 동안 혹은 사실 확인 후 회사가 휴가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피해자가 처한 조건이나 상황, 사건의 양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단순히 피해자는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며 직장생활이 불가할 것이라는 통념으로 인해 평소처럼 출근을 하고 싶어도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을까봐 출근을 망설이는 노동자가 있을 수도 있다. 다음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휴가를 강요당한 사례이다.
# “나는 내가 왜 사무실을 나가지 말아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잘못은 가해자가 했는데, 그 사람이 나오지 말아야지”
경우에 따라서는 회사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보 접근성이 저하된다거나 피해자에게 불리한 역동이 생길까 우려될 수 있다. 때문에 회사는 피해자가 휴가를 사용하고자 할 때에 회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식이 무엇인지 충분히 협의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5. 노동자를 배척하는 회사, 그 결과로서의 ‘성희롱 경력단절’
용기 내어 사건을 신고하였을 때 피해자는 별일 아닌 문제로 ‘조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낙인이 가해지는 사례가 많았다. 회사가 성희롱을 심각한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고 ‘불화’로 정의하기도 했다.
# “나보고 문제 일으켰다면서,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더라”
# “앞으로 내가 직장생활을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보라고 하더라”
# “나는 성희롱 피해자인데 대표가 사직서에 퇴직 사유를 ‘직원들 간의 불화’라고 쓰라고 하더라”
온갖 트집을 잡아 문제제기를 무력화시키거나, 피해자를 고립시키며 해고를 운운하고 고용상 불이익을 가하는 심각한 사례도 많았다.
# “사장이 갑자기 논점을 흐리면서 ‘너 전에 회계장부에서 00만원 비었잖아? 그거 어떻게 할 거야?’라며 조용히 넘어가라는 식으로 압박하더라”
# “나의 거취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중요한 일을 맡기겠냐면서 원래 내가 담당하는 업무를 몇 달째 주지 않았다”
# “업무 손해 발생하면 내 책임이라면서, 권고사직 염려도 하라고 사장이 그러더라”
# “신고한 이후에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더라.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다”, “점심식사나 회식 때 나를 부르지 않더라”
또한 사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법적 소송을 통해 피해를 확인받았음에도 회사는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끝까지 노동자를 상대로 싸움을 이어가는 괘씸한 사례도 있었다.
# “부당해고라고 1심에서 인정받았는데도 회사는 불복하지 않고 2심을 제기했다”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이렇게 압박받는 상황이 누적될 때 피해노동자는 이 직장에서 본인이 계속 버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겉으로는 자발적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벼랑으로 내몰려서 하게 되는 ‘비자발적 퇴사’인 것이다.
# “그 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일을 못하는 중이다. 그래서 그냥 내가 퇴사한다고 했다”
#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보고 참으라는 답변만 받았다. 결국 사직서 제출했다”
# “가해자가 징계는 받았는데 복직하고 나서도 내가 그 사람을 보는 것이 힘들더라. 다른 방법이 없어서 퇴사를 고민중이다”
# “계속 이렇게 일을 주지 않는데 나보고 나가라는 뜻이지 않겠나 싶어서 그만두게 됐다”
퇴사 이후에도 이직을 하려는 새 회사에 성희롱 피해자에 대해 부적절하고 잘못된 낙인을 가하여 불이익을 겪게 하는 사례도 있었다.
# “성희롱으로 퇴사하고 나서 이직을 준비했다. 이직 과정에서 새로 들어가려는 회사가 이전 직장에 평판조회를 했는데, 나를 ‘스캔들을 일으키고 나간 사람’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말했다고 하더라. 성희롱을 스캔들이라고 표현하다니 너무 화가 난다”
6.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동자가 문제제기하는 이유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은 노동자의 업무환경을 악화시킨다. 직장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보내야 하는 공간으로서, 피해가 누적된 상황에서 행위자를 계속해서 마주쳐야 한다면 고통이 가중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상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한다.
# “흉통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 때도 있다. 잠을 잘 못자고 매일 악몽을 꾼다”
# “계속 여기 있는게 무섭고 소름이 돋는다. 그 사람이 퇴사하든 말든 나는 그만 나오고 싶다”
# “우울이랑 공황이 왔다”
그리고 행위자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일임에도 성폭력은 피해자에게도 원인이 있다는 잘못된 통념의 영향으로 본인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것 같다며 자책하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 “강하게 밀치고 거부의사를 표현했어야 하는데 후회스럽다”
# “평소에 직장에서 깍듯하게 대했던 것처럼 당시에도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바보같다”
예상치 못한 폭력적인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지위가 높은 상사에게 당신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며 곧바로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업무를 하기 위해 만난 공간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예의있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이를 지키지 않은 가해자의 잘못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도 본인의 평소 행동이나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곱씹으며 자책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결코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전하고 싶다.
한편 심리적‧신체적 고통과 회사의 압박, 온갖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계속하여 싸움을 이어나가는 노동자들도 있다.
# “그동안 내 명예가 실추된 것 같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라도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 같다”
# “예전에는 내가 혹시라도 짤리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이제 나는 아쉬울 것이 없다. 계약이 끝나면 그냥 그만두면 되니까. 나는 계속 그 사람들이 긴장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이 조직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내가 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왔을 때 너 나은 근무환경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지만 남아있는 다른 여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회사가 잘못했다는 것을 법적으로 일깨워주고 싶다”
본인이 겪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해소하고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더 나아가 정당한 해결을 통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정의로운 뜻에서 이 싸움의 의미를 찾으려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이런 피해노동자들의 간절함과 정의로운 바람을 회사는 알아야 한다.
7. 모두의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문화
한국여성민우회 일고민상담실에는 ‘이것이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문의하는 상담이 많이 들어온다.
# (다른 직원들 간의 대화) “예쁘면 맨날 하냐?”, “싸이코패스 아니야? 쟤 좀 내보내야겠네”
# “팀장님이 농담이랍시고 듣기 불편한 얘기들을 자꾸 한다.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소변 보는 모습을 봤다’, ‘○○에서 어떤 여자가 나체로 돌아다녔다’ 등등”
# “아랫사람을 너무 막 대한다. 욕설은 없지만 충분히 폭언으로 느껴진다”
# “갑자기 ‘웍’ 하는 등 일부러 놀래키는 장난을 친다. 그만하라고 해도 계속 한다”, “용건이 있을 때 내 의자를 갑자기 자기쪽으로 확 당긴다”
# “사장이 자기 여친이랑 모텔 간 얘기를 나한테 한다”
# “이웃 사무실에 일하는 어떤 여성의 몸매가 어쩌고 저쩌고 품평을 하더라”
#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거나 팔꿈치로 나에게 기대려고 한다”
위 사례처럼 해당 사건이 성희롱/괴롭힘인지 아닌지 여부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성희롱/괴롭힘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이는 더 이상 조직 내에서 문제가 아닌 행위로 학습·강화되게 되는 경우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겪는 노동자들은 모두들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직장은 모두의 언행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적 공간이다. 상대방의 업무환경을 저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차별적인 호칭과 말투를 쓰지는 않는지, 누군가 무엇인가 불편하다고 말했을 때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리지는 않는지, 나의 언행이 동료의 노동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러한 질문들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상황이 누적되면 언제든 성희롱과 괴롭힘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편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별 고정관념과 성역할을 구분짓는 인식을 기반으로 회사 내 업무와 규범을 정하고 암묵적으로 따라주길 요구하는 사례들도 많았다. 심지어 여성 동료에게만 하대하거나 폭압적인 언행을 가하는 사례도 있었다.
# “가슴이 좀 파인 상의를 입었는데 나이 든 사람들 눈 밖에 난 거 같다. 나를 불러 면담하면서 여기는 보수적인 조직이라며 내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
# “‘여기는 여자들이 많아서 OO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길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더니, 정색하면서 ‘그럼 니가 하든가’라고 하더라”
# “회사에서 화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직원인 내가 관리한다. 물뿌리개를 샀는데 왜 하필 그 물뿌리개를 샀냐며 딴지를 걸더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더니 욕하면서 자기 무시하냐고 버럭하더라. 평소에도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 여직원들한테만 심하게 간섭한다”
# “같이 협의하고 있는데 나보고 말대꾸를 하지 마라며 듣기만 하라더라. 심지어 내가 그 사람보다 지위가 더 높은데. 내가 남자였다면 그렇게까지 안 했을 거 같다”
8. 노동자의 문제제기에 소극적인 고용노동부
가해자 징계는 해당 회사의 인사규정, 정의로운 조직규범의 확립, 피해자의 피해 회복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회사가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영역이다. 지금도 많은 회사들이가해자 편에서 솜방망이와 같은 형식적 징계를 하여도 피해자가 이를 이의제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회사가 법의 취지에 맞게 내린 가해자 징계에 대해 오히려 고용노동부가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는 잘못된 경우들이 있었다.
# “회사가 사건을 조사해서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리고 부서를 이동시켰다. 근데 가해자가 노동위원회에 부서이동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고 부서이동은 과하다며 다시 원래 부서로 돌려놓으라는 결과가 나왔다. 피해자인 나는 어떡해야 하냐?”
# “징계위에서 가해자 해고 결과가 나왔다. 가해자가 노동부에 부당해고 진정했고 다시 재입사 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회사가 선제적으로 피해자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의 상을 만들고 그에 맞는 판단을 내렸을 때, 고용노동부는 이러한 회사의 의지와 노력을 결코 훼손해서는 안 된다. 회사의 이러한 시도가 좌절된다면 조직 구성원들은 성희롱을 문제제기해도 소용없겠다는 인식이 쌓이고,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성희롱 사건 해결에도 회사가 소극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을 때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회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기계적으로만 판단하고 증거에 연연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 “괴롭힘, 성희롱 사건을 회사가 외부 노무사 기용해서 조사했다. 근데 실제로는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성희롱 아니라는 결과만 가지고 근로감독관이 그대로 종결했다. 근로감독관한테 따지니까 ‘외부 조사는 결과를 뒤집기 힘들다’고만 하더라”
# “대표가 내 짐을 싸놓고 나가라고 했다. 근데 녹음을 들려줬더니 근로감독관이 ‘해고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나가라는 말만 한 것에 대해서는 해고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이러한 사례들이 반복된다면 노동자는 일터에서 겪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고용노동부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피해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문제를 해결하여 안전한 노동환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2021년 한국여성민우회 일고민상담실 주요 상담사례 분석
발행일: 2022년 6월 3일
*목차
Ⅰ. 21년도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의 주목할만한 경향
1. 성희롱과 괴롭힘의 복합성, 확장성
2. 여성혐오 정서에서 비롯되는 노동권 침해
3. 공직사회 내 성폭력 사건이 노동현장에 미치는 영향
4.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을 통한 부정적 소문 확산
5. 코로나19가 성희롱/괴롭힘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Ⅱ.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의 주요 특성
1.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성
2. 가해자의 영향력
3.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고, 동료들의 말들로 문제제기를 주저하게 되는 노동자
4. 사건 해결 과정에서 소극적이고 문제적인 회사
1) 사건 처리의 이해가 부족한 회사
2) 사건 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는 회사
3) 외부기관의 판단에 기대어 노동권 보장의 책무를 저버리는 회사
4) 가해자 분리 조치를 적절히 이행하지 않는 회사
5) 피해자 휴가제도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
5. 노동자를 배척하는 회사, 그 결과로서의 ‘성희롱 경력단절’
6.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동자가 문제제기하는 이유
7. 모두의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문화
8. 노동자의 문제제기에 소극적인 고용노동부
2021년 한국여성민우회 일고민상담실로 들어온 노동상담은 총 147건이다. 직장 내 성희롱이 98건(66.67%)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직장 내 괴롭힘 21건(14.29%), 고용형태에 의한 차별 7건(4.76), 모집‧고용상 성차별 6건(4.08%)이며 이외 기타 노동사안이 15건(10.2%)이다.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 정서, 코로나19 상황과 맞물려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은 더 교묘해지고 확장되고 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중심으로 2021년 노동상담 경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글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상담사례를 각색하여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Ⅰ. 21년도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의 주목할만한 경향
1. 성희롱과 괴롭힘의 복합성, 확장성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단순히 성희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힘으로 확장되어 성희롱과 괴롭힘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 성희롱에 거부 의사를 밝혔을 때 보복의 일환으로 괴롭힘이 발생하기도 하고, 동료들이 성희롱을 성희롱으로 인지하지 못하여 피해자에게 괴롭힘을 행하는 사례도 있었다.
# “고백을 거절한 이후 직장에서 괴롭힘이 시작됐다”
# “성희롱 이후로 업무 관련해서 어떤 지시도 하지 않고 말도 안 하더라”, “또 갑자기 괜히 트집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더라”
# “그건 분명히 성희롱이었는데 행위자인 상사로부터 내가 애정을 받는다는 식으로 소문이 났다”, “그랬더니 상사 중 한 분이 언제부턴가 기분 나쁘게 대한다. 인사도 안 받고, 갑자기 나한테만 존댓말하고”, “남들과 똑같은 행동을 해도 유독 날카롭게 반응하더라”
이렇듯 직장 내 성희롱은 괴롭힘으로 이어지거나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고용노동부는 접수된 사안에 대해 단순히 성희롱인지, 괴롭힘인지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 사건의 맥락에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분리하여 처리하고 있다.
# “동료들로부터 겪는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해 나간 관리자와의 면담 자리에서 성희롱을 겪었다”, “노동청에 접수했더니 무조건 괴롭힘이랑 성희롱 따로 분리해서 사건 진행해야 한다더라”
# “내가 겪은 일이 성희롱이랑 괴롭힘이 섞여 있는데 근로감독관은 계속 나눠서 얘기하라는 게 말이 되냐?”
고용노동부는 성희롱, 괴롭힘 사건을 각각 개별로 접수하더라도 사건 판단은 전후맥락을 고려하여 통합적으로 해야 한다. 한 노동자가 겪은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삭제된다면 각각의 성희롱과 괴롭힘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
2. 여성혐오 정서에서 비롯되는 노동권 침해
최근의 반페미니즘정서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노동현장에서도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형태로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30대 남성커뮤니티 문화가 소규모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를 향한 여성혐오성 괴롭힘과 성희롱으로 이어진 사례들이 있었다.
# (행위자가 말하길) “너 페미냐? 나한테서 접근금지”, “(그만하라고 했더니) 너의 반응이 재밌는데 너 말고 다른 누구를 괴롭히겠니?”
# “신체접촉을 자주 겪었는데 예민하다고 그럴까봐, 또 페미년이라고 할까봐 무서워서 참았다”
# (행위자가 말하길) “지금 네가 겪은 일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될걸? CCTV 앞에서 성폭행하는 정도는 되어야 고소할 수 있어”
위 사례처럼 여성혐오 문화가 팽배한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나 멸칭으로 낙인찍히며 문제제기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노동자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이자 노동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반페미니즘 정서가 노동현장에서 어떻게 실질적인 노동권 침해로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적극적인 인지와 개입이 필요하다.
3. 공직사회 내 성폭력 사건이 노동현장에 미치는 영향
몇 년간 연이어 발생한 지방자치단체 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전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여론이 형성되거나 조직에서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일터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특히 공무원 조직에 있는 여성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제기 이후 어려움을 겪는 피해당사자의 상황을 언론을 통해 지켜보면서, 본인에게 성희롱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하고 위축되는 사례가 있었다.
# (공무원) “서울시장 뉴스를 접하다 보니 피해사실을 알리는 게 결국 나한테도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더라”, “그냥 조용히 가해자랑 분리만 되면 좋겠다”
이처럼 공직사회 내 성폭력 사건이 대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사건의 제대로된 해결은 매우 중요하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가 비호받거나 사건이 왜곡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한다면 노동자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일선 노동현장의 여성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정치권과 정부, 사법부는 이에 책임감을 갖고 ‘직장 내 성희롱 금지’라는 법의 취지를 상기하며 공직사회 내 성폭력 문제를 잘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4.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을 통한 부정적 소문 확산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앱에서 회사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을 가십처럼 소비하는 사례들이 확인되었다.
# “블라인드에 내 사건 글이 올라왔는데 거기에 나에 대한 악성 댓글이 달렸다. 내가 상사를 음해하려고 성희롱으로 몰고가는 거라면서”
# “블라인드에 상대방이 쓴 것으로 유추되는 글이 올라왔다. 내가 부장이랑 사귀는 사이라면서, 전혀 사실이 아닌데 진짜인 것처럼 써놓았더라”, “회사에 글 내리도록 조치 취해달라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 “블라인드에 나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의 게시물에 댓글로 성희롱 피해자를 암시하는 듯한 비하 내용이 달렸더라. 다른 사람들이 지금 이 일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 여기는 잘못된 통념이 작동하는 회사들이 여전히 많다. 때문에 올바른 사건 해결과 피해자 보호를 위하여 회사는 사건 처리 전 과정에 걸쳐 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한다는 책무를 갖는다. 그러나 블라인드 커뮤니티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사실과 다른 추측성 정보나 개인의 잘못된 의견도 여과없이 게시되어 사건 해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회사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부정적인 소문 확산을 중단할 수 있도록 사내 공지로 요청하는 등 피해자가 블라인드앱으로 인한 2차 피해를 겪지 않도록 적극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5. 코로나19가 성희롱/괴롭힘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2020년부터 지속된 코로나19는 서비스직, 시간제,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에 다수 종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에게 더 큰 여파를 미쳤다. 무급휴직을 강요당하거나 계약해지, 해고로 이어지는 등 여성노동자 실업률은 2020년 4%로 전년대비 11.1%p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희롱/괴롭힘 피해를 겪더라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조건이라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아 고통을 감내하며 버티는 사례들이 있었다.
# “성희롱이랑 괴롭힘 때문에 너무 힘든데 사장한테 솔직하게 말을 못 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게 구한 곳인데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할까봐”
코로나19 상황에 따른 불안한 일자리라는 인식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더욱 주저하도록 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는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출발점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회적 명제가 대사회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필요하다.
Ⅱ.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의 주요 특성
1.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성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은 직장 내 위계에 기반한 힘의 차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신입/인턴, 비정규직, 파견직이라는 취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경우가 많다. 신입이나 사회초년생의 위치에 있는 노동자는 성희롱 피해를 입었을 때 업무역량을 쌓지 못하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는 등 안정적인 직업적 전망을 갖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정규직, 파견직 노동자들은 취약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는데, 계약직이었다가 계약 갱신이 되지 않아 해고로 이어지거나 파견직으로서 제대로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등 모든 문제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 “인턴”, “사회초년생”, “내가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 “한달 전에 입사했다”, “출근한지 이제 4주차다”, “2-3개월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정직원 된 지 한 달 됐다”
# “3년간 일했고 1년씩 매년 근로계약을 갱신했는데 성희롱 이후로 갱신을 안 해준다”
# “계약직이었는데 괴롭힘 신고한 이후에 계약연장을 안 해주고 그대로 만료되었다”
# (비정규직) “성희롱 문제제기한 이후에 퇴직금 안 주려고 일한 기간이 1년이 되기 직전에 나를 해고했다”
# (파견직) “파견업체는 지금 내가 일하는 회사가 갑이니까 회사 눈치를 보더라. 또 회사는 내가 가해자랑 분리시켜 달라고 해도 파견업체랑 상의해봐야 한다고 핑계 대면서 지연시키더라”, “파견업체는 나보고 지금 회사랑 싸우지 마라고 하더라”
특히 프리랜서, 특수고용노동자 등 근로기준법 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형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성희롱이나 괴롭힘을 겪더라도 법의 보호망 바깥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문제제기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 (방송계 스태프) “사건 후에 시간이 지나고 다른 곳에 일하러 갔는데 사람들끼리 얘가 누구 신고한 애다, 이런 말들을 하더라. 소문 때문에 일을 계속 하기가 어렵다”
# (골프장 캐디) “성희롱 겪고 나서 너무 힘든데 나의 휴가가 길어지니까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그냥 일을 그만두라고 하더라”
또한 5인 미만 등 영세사업장의 경우 사장의 권한이 막강하며 성희롱 가해자와의 분리나 업무이동 등의 조치가 어려운 노동환경일 가능성이 크다 보니, 피해자가 일을 계속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았다.
# “사장이랑 나랑 둘이서 일한다. 이제 어떡하냐?”
# “사장이 나를 성희롱을 했는데 그럼 내가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렇게 현재의 근로기준법은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근로자’ 정의에서 배제될 때가 많고,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적용이 제외되기 때문에, 법 개정을 통해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고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2. 가해자의 영향력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에 비해 가해자는 높은 직급이나 연차, 혹은 정규직처럼 안정적인 고용형태에 있으며 직장 내에서 더 많은 자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인에게 미칠 가해자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 “가해자가 자진퇴사 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 지었는데, 같은 업계에서 그 사람의 소식이 들려오니까 나중에 혹여나 나랑 마주치지 않을까,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두렵다”
# (도제식 사업장) “만드는 방법을 가해자한테 배워야 하는데, 알려달라고 해도 계속 안 알려주고, 가해자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가해자 눈치를 보는지 나한테 안 알려주려는 것 같더라”
이러한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실제로 피해자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사는 사건을 처리한 이후에도 가해자가 지위를 이용하여 피해자를 압박하지는 않는지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3.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고, 동료들의 말들로 문제제기를 주저하게 되는 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은 일터에서, 동료 간에 발생하는 일이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해 피해자의 노동환경이 침해되었음에도 오히려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쉽게 노출된다. 그것은 가해자의 말, 동료들의 이야기로 형성되기도 하고, 피해자 스스로 ‘몰인정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해자가 오히려 문제제기하려는 피해자에게 자살을 암시하거나 운운하는 사례는 최근 눈에 띄는 또 다른 직장 내 성희롱 가해의 행위로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부에 신고했을 때 근로감독관이 ‘가해자의 자살’을 언급한 사례는 더욱 문제적이다.
#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 했더니 가해자가 그럼 자기는 자살할 거라더라“
# "가해자가 나보고 '너 때문에 내가 힘들어서 OO강에 뛰어들고 싶다'고 했다“
# “난 공무원인데 특수한 직렬이라 이 사람들과 오래도록 일해야 한다. 그 집 부인이나 자식들과도 모두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 "노동부에 신고했더니 근로감독관이 가해자가 자살하면 어떡하냐고 되려 나에게 묻더라"
성회롱과 괴롭힘을 문제제기하려는 피해자는 회사와 동료로부터 “주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정당한 문제해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 노동현장에서는 피해자가 사소한 일을 큰 문제로 만드는 사람이라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다. 그래서 피해자가 이 모든 부당한 상황을 그대로 떠안게 되는 사례가 많았다.
# “가해자가 중징계를 받았다. 별거 아닌데 내가 인사팀에 얘기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며 다른 팀 선배가 나를 나무랐다”
# “본부장님(이 가해자는 아니지만) 퇴임식에서 이런 일(성희롱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 분이 연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해서 참았다”
# “가해자교육 하기로 해놓고는 계속 미루길래 교육 언제 하냐고 회사에 물었다. 그랬더니 ‘OO이 저렇게 바쁜데 교육 받을 시간이 어디 있니? 넌 너만 생각하니?’라고 하더라”
# “팀장님이 '너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랑 잘 지내는 모습도 보여줘야 할 거'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문제를 알리고자 고민할 때 망설이는 이유 중에 또 하나는 함께 문제제기하고 대응해줄 동료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 "사무실에서 폭력적인 말들이 오가는 편이다. OO대리도 나처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물어봤는데 자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면서 괜찮다더라"
# "평소 분위기를 봤을 때 내 의견만으로 노조가 움직여줄까? 확신이 안 든다"
성희롱 사실을 조직에 알리기 위해서는 해당 주제를 꺼내놓았을 때 동료들과 조직이 함께 반응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필요하다. 특히 노조는 성차별 및 성희롱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노동자들에게 내가 겪는 문제도 중요하게 다뤄질 거라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나의 문제에 공감하면서 목소리를 낸다면 피해자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한편 행위자가 사과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회사나 동료가 나서서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과 자리를 성급히 마련하려는 경우들이 많았다. 사과받기를 주저하는 피해자를 오히려 책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 "‘김부장이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하는데 네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냐’며 나를 탓하더라"
# "주변에서는 사과를 받으라고 하는데 근데 나는 그 사람 목소리조차 듣기 싫다"
# "사과를 하긴 했다. 근데 나는 싫다고, 만나기 싫다고 했더니 그냥 메일로 사과하더라"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과의 필요성과 시점,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과를 원하는지 아닌지, 원한다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면 좋겠는지가 당사자의 충분한 고민 속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사과는 대면, 이메일, 공개사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며 만약 피해자가 사과를 원치 않는다면 그러한 입장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점이 충분히 고민된 뒤에 사과가 이뤄져야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사과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건 해결 과정에서 소극적이고 문제적인 회사
1) 사건 처리의 이해가 부족한 회사
사건처리 과정은 피해자의 노동환경을 회복시킨다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취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사건처리를 형식적으로만 접근하려는 회사들이 많았다.
# "인사팀에서 나보고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묻더라. 회사가 먼저 어떤 방안이 있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회사에서 당연히 처리해줘야 하는 일들을 왜 내가 다 찾아서 요구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그 요구를 할 때조차 안 좋은 시선을 받아가면서 요구해야 하는 것인지?", "회사 입장에서는 '너가 말한 거 다 들어줬는데 너 왜 그래?' 이런 식이다"
# "인수인계를 가해자한테서 받으라고 하더라. 내가 항의를 하니까 내가 제출한 진술서 요구사항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면서 내 탓을 하더라"
# “회사가 사건처리 ‘절차’만은 철저히 지킨다. 근데 법적으로 딱 걸리지 않는 선에서 한다. 그럼 문제가 없는 거냐?”
직장 내 성희롱, 괴롭힘을 인지한 회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회사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되 피해자가 이 과정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사건 처리과정이 불합리하거나 미흡할 경우 피해자는 회사를 신뢰하거나 회복에 온전히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러한 사례들이 다수 포착되었다.
# “피해자인 나는 인사위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가해자인 부장은 참석한다고 한다. 팀장에게만 소명의 기회를 주는 것 같아서 나도 참석하려고 한다”
# “조사위원회 구성이 죄다 남성들이다. 믿을 수 있을까?”
# “내가 현재 임신출산으로 직장에서 장기 부재중인데 과연 회사가 사건을 제대로 검토할지 의문이 든다”
2) 사건 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는 회사
성희롱 사건에 대한 조사와 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고 책무를 회피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 “회사에서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행위자랑 나랑 주장이 서로 상반되고 모호하고 증거가 없다고 성희롱으로 인정 못 받았다”
직장 내 성희롱은 일상적인 직장생활 와중에 당사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물리적인 증거나 목격자가 있기 어려운 특성을 갖는다. 또한 피해자와 행위자의 진술도 상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할 지를 판단하는 것은 회사의 몫이다. 성인지감수성을 바탕으로 해당 행위가 이루어진 구체적인 상황과 전후맥락, 당사자들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회사가 판단해야 할 것이다.
3) 외부기관의 판단에 기대어 노동권 보장의 책무를 저버리는 회사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경찰, 검찰 등 외부법령이나 기관을 통하여 절차가 진행될 경우, 회사가 손을 놓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사례들이 있었다.
# “외부 법률을 통해서 사건이 조사/처리중이라면 회사가 사내 조사를 중지할 수 있다는 내부 규정이 있다면서 내 사건을 조사하지 않겠다고 하더라”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책무가 사업주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회사는 성희롱 피해 노동자가 안전하고 평등하게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노동환경을 조성할 의무를 갖는다. 따라서 외부의 법적 소송과 별개로 남녀고용평등법의 취지를 살려 사건이 직장 내에서 금지하고 있는 행위인지 여부를 판단하고 이에 수반되는 피해자 보호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법적으로 성폭력 범죄로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 피해자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 “형사결과가 불기소로 나왔으니 나의 부서이동 요구는 들어줄 수가 없다더라. 피해 사실 확인이 안 된다면서”
# “소송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나에게 수시로 묻더라. 그러다가 형사 불기소 판결이 나오자마자 내가 직장 내 분위기를 흐렸다는 이유로 징계하겠다고 하더라”
성폭력이 범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고의성, 증거 등 직장 내 성희롱보다 더 엄격한 성립요건이 요구된다. 따라서 불기소 처분 등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성희롱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회사는 이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직장 내 성희롱으로서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해야 한다.
4) 가해자 분리 조치를 적절히 이행하지 않는 회사
성희롱 발생 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조치는 피해노동자가 안전하게 일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 “인사팀에 얘기했더니 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다른 팀으로 발령났다. 이건 내 의사에 반하는 거 아니냐?”
# “가해자는 맡고 있는 업무가 많아서 우리팀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난 어떡해야 하냐?”
그리고 분리 등의 인사 조치는 피해노동자 뿐만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므로 조정 과정에서 조직 내 충분한 소통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피해자로 인해 부담이 증가한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피해자를 원망하는 여론이 조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피해자의 위축감으로 돌아오게 된다.
# “제가 OO팀으로 발령이 나면서 갑자기 보직이 맞변경된 동료가 지속적으로 고충을 토로하는데 너무 죄책감이 든다”
조정의 당사자가 되는 구성원들에게는 이것이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이에 파생되는 여러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회사가 적극 나서야 한다.
5) 피해자 휴가제도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
성희롱 발생 후 피해자는 심신의 안정을 위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사건 조사기간 동안 혹은 사실 확인 후 회사가 휴가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피해자가 처한 조건이나 상황, 사건의 양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단순히 피해자는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며 직장생활이 불가할 것이라는 통념으로 인해 평소처럼 출근을 하고 싶어도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을까봐 출근을 망설이는 노동자가 있을 수도 있다. 다음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휴가를 강요당한 사례이다.
# “나는 내가 왜 사무실을 나가지 말아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잘못은 가해자가 했는데, 그 사람이 나오지 말아야지”
경우에 따라서는 회사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보 접근성이 저하된다거나 피해자에게 불리한 역동이 생길까 우려될 수 있다. 때문에 회사는 피해자가 휴가를 사용하고자 할 때에 회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더 나은 방식이 무엇인지 충분히 협의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5. 노동자를 배척하는 회사, 그 결과로서의 ‘성희롱 경력단절’
용기 내어 사건을 신고하였을 때 피해자는 별일 아닌 문제로 ‘조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낙인이 가해지는 사례가 많았다. 회사가 성희롱을 심각한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고 ‘불화’로 정의하기도 했다.
# “나보고 문제 일으켰다면서,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더라”
# “앞으로 내가 직장생활을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보라고 하더라”
# “나는 성희롱 피해자인데 대표가 사직서에 퇴직 사유를 ‘직원들 간의 불화’라고 쓰라고 하더라”
온갖 트집을 잡아 문제제기를 무력화시키거나, 피해자를 고립시키며 해고를 운운하고 고용상 불이익을 가하는 심각한 사례도 많았다.
# “사장이 갑자기 논점을 흐리면서 ‘너 전에 회계장부에서 00만원 비었잖아? 그거 어떻게 할 거야?’라며 조용히 넘어가라는 식으로 압박하더라”
# “나의 거취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중요한 일을 맡기겠냐면서 원래 내가 담당하는 업무를 몇 달째 주지 않았다”
# “업무 손해 발생하면 내 책임이라면서, 권고사직 염려도 하라고 사장이 그러더라”
# “신고한 이후에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더라.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다”, “점심식사나 회식 때 나를 부르지 않더라”
또한 사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법적 소송을 통해 피해를 확인받았음에도 회사는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끝까지 노동자를 상대로 싸움을 이어가는 괘씸한 사례도 있었다.
# “부당해고라고 1심에서 인정받았는데도 회사는 불복하지 않고 2심을 제기했다”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이렇게 압박받는 상황이 누적될 때 피해노동자는 이 직장에서 본인이 계속 버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겉으로는 자발적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벼랑으로 내몰려서 하게 되는 ‘비자발적 퇴사’인 것이다.
# “그 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일을 못하는 중이다. 그래서 그냥 내가 퇴사한다고 했다”
#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보고 참으라는 답변만 받았다. 결국 사직서 제출했다”
# “가해자가 징계는 받았는데 복직하고 나서도 내가 그 사람을 보는 것이 힘들더라. 다른 방법이 없어서 퇴사를 고민중이다”
# “계속 이렇게 일을 주지 않는데 나보고 나가라는 뜻이지 않겠나 싶어서 그만두게 됐다”
퇴사 이후에도 이직을 하려는 새 회사에 성희롱 피해자에 대해 부적절하고 잘못된 낙인을 가하여 불이익을 겪게 하는 사례도 있었다.
# “성희롱으로 퇴사하고 나서 이직을 준비했다. 이직 과정에서 새로 들어가려는 회사가 이전 직장에 평판조회를 했는데, 나를 ‘스캔들을 일으키고 나간 사람’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말했다고 하더라. 성희롱을 스캔들이라고 표현하다니 너무 화가 난다”
6.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동자가 문제제기하는 이유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은 노동자의 업무환경을 악화시킨다. 직장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보내야 하는 공간으로서, 피해가 누적된 상황에서 행위자를 계속해서 마주쳐야 한다면 고통이 가중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상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한다.
# “흉통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 때도 있다. 잠을 잘 못자고 매일 악몽을 꾼다”
# “계속 여기 있는게 무섭고 소름이 돋는다. 그 사람이 퇴사하든 말든 나는 그만 나오고 싶다”
# “우울이랑 공황이 왔다”
그리고 행위자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일임에도 성폭력은 피해자에게도 원인이 있다는 잘못된 통념의 영향으로 본인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것 같다며 자책하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 “강하게 밀치고 거부의사를 표현했어야 하는데 후회스럽다”
# “평소에 직장에서 깍듯하게 대했던 것처럼 당시에도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바보같다”
예상치 못한 폭력적인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지위가 높은 상사에게 당신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며 곧바로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업무를 하기 위해 만난 공간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예의있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이를 지키지 않은 가해자의 잘못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도 본인의 평소 행동이나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곱씹으며 자책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결코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전하고 싶다.
한편 심리적‧신체적 고통과 회사의 압박, 온갖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계속하여 싸움을 이어나가는 노동자들도 있다.
# “그동안 내 명예가 실추된 것 같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라도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 같다”
# “예전에는 내가 혹시라도 짤리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이제 나는 아쉬울 것이 없다. 계약이 끝나면 그냥 그만두면 되니까. 나는 계속 그 사람들이 긴장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이 조직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내가 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왔을 때 너 나은 근무환경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지만 남아있는 다른 여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회사가 잘못했다는 것을 법적으로 일깨워주고 싶다”
본인이 겪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해소하고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더 나아가 정당한 해결을 통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정의로운 뜻에서 이 싸움의 의미를 찾으려는 내담자들이 많았다. 이런 피해노동자들의 간절함과 정의로운 바람을 회사는 알아야 한다.
7. 모두의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문화
한국여성민우회 일고민상담실에는 ‘이것이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문의하는 상담이 많이 들어온다.
# (다른 직원들 간의 대화) “예쁘면 맨날 하냐?”, “싸이코패스 아니야? 쟤 좀 내보내야겠네”
# “팀장님이 농담이랍시고 듣기 불편한 얘기들을 자꾸 한다.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소변 보는 모습을 봤다’, ‘○○에서 어떤 여자가 나체로 돌아다녔다’ 등등”
# “아랫사람을 너무 막 대한다. 욕설은 없지만 충분히 폭언으로 느껴진다”
# “갑자기 ‘웍’ 하는 등 일부러 놀래키는 장난을 친다. 그만하라고 해도 계속 한다”, “용건이 있을 때 내 의자를 갑자기 자기쪽으로 확 당긴다”
# “사장이 자기 여친이랑 모텔 간 얘기를 나한테 한다”
# “이웃 사무실에 일하는 어떤 여성의 몸매가 어쩌고 저쩌고 품평을 하더라”
#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거나 팔꿈치로 나에게 기대려고 한다”
위 사례처럼 해당 사건이 성희롱/괴롭힘인지 아닌지 여부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성희롱/괴롭힘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이는 더 이상 조직 내에서 문제가 아닌 행위로 학습·강화되게 되는 경우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겪는 노동자들은 모두들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직장은 모두의 언행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적 공간이다. 상대방의 업무환경을 저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차별적인 호칭과 말투를 쓰지는 않는지, 누군가 무엇인가 불편하다고 말했을 때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리지는 않는지, 나의 언행이 동료의 노동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러한 질문들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상황이 누적되면 언제든 성희롱과 괴롭힘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편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별 고정관념과 성역할을 구분짓는 인식을 기반으로 회사 내 업무와 규범을 정하고 암묵적으로 따라주길 요구하는 사례들도 많았다. 심지어 여성 동료에게만 하대하거나 폭압적인 언행을 가하는 사례도 있었다.
# “가슴이 좀 파인 상의를 입었는데 나이 든 사람들 눈 밖에 난 거 같다. 나를 불러 면담하면서 여기는 보수적인 조직이라며 내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
# “‘여기는 여자들이 많아서 OO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길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더니, 정색하면서 ‘그럼 니가 하든가’라고 하더라”
# “회사에서 화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직원인 내가 관리한다. 물뿌리개를 샀는데 왜 하필 그 물뿌리개를 샀냐며 딴지를 걸더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더니 욕하면서 자기 무시하냐고 버럭하더라. 평소에도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 여직원들한테만 심하게 간섭한다”
# “같이 협의하고 있는데 나보고 말대꾸를 하지 마라며 듣기만 하라더라. 심지어 내가 그 사람보다 지위가 더 높은데. 내가 남자였다면 그렇게까지 안 했을 거 같다”
8. 노동자의 문제제기에 소극적인 고용노동부
가해자 징계는 해당 회사의 인사규정, 정의로운 조직규범의 확립, 피해자의 피해 회복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회사가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영역이다. 지금도 많은 회사들이가해자 편에서 솜방망이와 같은 형식적 징계를 하여도 피해자가 이를 이의제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회사가 법의 취지에 맞게 내린 가해자 징계에 대해 오히려 고용노동부가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는 잘못된 경우들이 있었다.
# “회사가 사건을 조사해서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리고 부서를 이동시켰다. 근데 가해자가 노동위원회에 부서이동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고 부서이동은 과하다며 다시 원래 부서로 돌려놓으라는 결과가 나왔다. 피해자인 나는 어떡해야 하냐?”
# “징계위에서 가해자 해고 결과가 나왔다. 가해자가 노동부에 부당해고 진정했고 다시 재입사 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회사가 선제적으로 피해자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의 상을 만들고 그에 맞는 판단을 내렸을 때, 고용노동부는 이러한 회사의 의지와 노력을 결코 훼손해서는 안 된다. 회사의 이러한 시도가 좌절된다면 조직 구성원들은 성희롱을 문제제기해도 소용없겠다는 인식이 쌓이고,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성희롱 사건 해결에도 회사가 소극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을 때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회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기계적으로만 판단하고 증거에 연연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 “괴롭힘, 성희롱 사건을 회사가 외부 노무사 기용해서 조사했다. 근데 실제로는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성희롱 아니라는 결과만 가지고 근로감독관이 그대로 종결했다. 근로감독관한테 따지니까 ‘외부 조사는 결과를 뒤집기 힘들다’고만 하더라”
# “대표가 내 짐을 싸놓고 나가라고 했다. 근데 녹음을 들려줬더니 근로감독관이 ‘해고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나가라는 말만 한 것에 대해서는 해고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이러한 사례들이 반복된다면 노동자는 일터에서 겪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고용노동부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피해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문제를 해결하여 안전한 노동환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