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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나의 아름다운 덕질을 위하여

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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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01

 

나의 아름다운 덕질을 위하여

 

 

#1

“내가 어떤 사람이게? 세상에서 제일 바쁘다는 의대 교수한테 만날 바쁜 척하는 사람.”

“너 바쁜 거 맞잖아.”

“나 바쁜 거 맞나? 뭔가 계속 할 일이 있긴 한데, 실속은 하나도 없어.”

 

몇 년 전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그 며칠 전 재활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뇌성마비 장애의 특성상 근육 강직이 있고 근골격계의 균형이 맞지 않아 몸 여기저기에 통증이 찾아오곤 한다. 그즈음 골반 통증이 좀 심해져 있었고, 의사는 통증 치료를 처방해 줬다. 하지만 몸이 훨씬 편해질 걸 알면서도 치료 스케줄 하나 더 잡히는 게 달갑지 않았다.

“치료… 받아야죠.” 치료를 해주겠다는데도 한숨을 내쉬는 나에게, 의사는 “바쁘면 시간 될 때만 오라”며 토닥였다. 어느샌가 의사는 나를, 뭔지는 몰라도 뭔가 항상 많이 하고 돌아다니는 환자로 인식하게 됐다.

실제로 내가 한결같이 바쁘긴 했다. 이정표 하나 없이 길게만 뻗어있는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가야 할지, 불안도 크고 상념도 많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비슷한 또래에게 당연한 것이라면 나에게도 당연한 거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의사에게도 늘 바쁜 티를 냈다. “내가 바쁜 건 당연한 것이니, 그 대전제를 부정할 생각일랑 말라”고. 쉬어야 한다거나 일을 줄여야 한다는 처방은 수용할 수 없다고. “내가 바쁘다는 조건하에서 당신은 내 몸을 돌보아야 한다”고 매번 못을 박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헤매고 헤매 찾은 ‘글쓰기’라는 업은 내 통장을 채워주는 일은 아니었다. 글자 수를 따져 주어지는 원고료는 구상 시간까지 따지면 시급 계산하기도 민망한 정도였다. 투여하는 노동 시간과 나오는 성과를 비교했을 때, 글쓰기만큼 저효율을 기록하는 노동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매번 바쁜 척을 하지만, 사실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모니터 앞에 멍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매일 오전 10시쯤 출근해 앉아 있다가 오후 5시쯤 세 문장을 쓴다. 그러다 밤이 깊을 때쯤 두 문장을 지우고 퇴근한다. 참고로 글 안 쓰는 사람은 이상하게만 보일 테지만,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글 쓰는 인생들의 지극히 평범한 루틴임을 강조하고 싶다! 놀랍게도 이러다 결국은 마감 3일 전부터 하루에 세 페이지씩 써서 마감에 맞추고야 만다.

노트북 앞에서 3일 동안 젤리를 씹어먹다 보면 어떻게든 서너 장짜리 글 정도는 나오기 마련이고, 그러면 며칠 치 밥 값 정도는 벌 수 있다. 그러니 젤리를 씹어 먹으며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밤이면 집에 가는 나도 바쁜 건 바쁜 겁니다, 의사 선생님. 이것도 나름 전문 기술이라고요. (누가 뭐래?)

 

 

#2

골반에 스멀스멀 열이 오르고 오른팔이 뻐근하다. 왼손으로는 키보드를 칠 수가 없기 때문에, 유일한 생산수단인 오른팔을 특히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 아침에 운동을 다녀온다. 연구실 대신 집으로 돌아와 내 방 모니터 앞에서 끙끙댄다. 몇 시간 후 다시 골반이 쑤시기 시작하면 침대에 벌렁 누워 휴식을 취하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골반이 아프면 선 채로 자정까지 버텼고, 무릎과 발이 시큰거리면 요가 매트를 깔고 엎드려 키보드를 쳤다. 그러다 결국 팔꿈치와 손목으로까지 통증을 확산시키기를 반복했다. 실력 있고 빠릿빠릿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그들에게마저 미친 듯이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사회에서, 뭐든지 느리고 한 문장도 쉽게 쓰지 못하는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하지만 노동량에 따라 정확하게 반응하는 나의 몸은 “꼭 그들에게 맞춰야 하느냐”고, “정말 그래야 살 수 있는 거냐”고 똑똑하고 정당하게 따져 물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이유 있는 반항을 무시하는 데는 한계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반강제로 내 몸을 조금씩이라도 존중해 보기로 했다. 물론 몸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은 매번 어렵고, 아직도 열 번 중 여덟 번은 실패한다. 통증이 느껴질 때 가만히 노동을 멈추고 운동을 하거나 누워 쉬기 위해, 스트레스로 머릿속이 몽롱해질 때 생각을 멈추고 노트북 앞을 잠시 떠나기 위해, 나는 나 스스로와 세상을 신뢰해 보기로 매번 작정해야 한다.

사실 장애여성인 나에게는 ‘시간’이란 자원이 비장애인 남성에 비해 다섯 배쯤 더 필요하다. 실제로 작업 속도가 느리므로 일에 소요되는 시간이 더 많다. 또 한편으로는 장애여성이 주변 사람 사이에서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는 비장애인 남성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한 일꾼’으로 코스프레를 해도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나를 함께 일할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도 없지 않다. 내가 괜찮은 동료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적고, 인정받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동으로 결과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다. 글을 쓰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프리랜서 장애여성이 맘 편히 쉬기 힘든 이유다.

내가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으려면, 일이 내게 도착한 바로 그 순간부터 꾸준히 움직여야 한다. 꾸물대다 며칠 전에야 일을 시작하는 벼락치기는 사실상 가능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글을 쓰거나 일하는 기간에는 TV 앞에 앉더라도 1시간을 넘지 않고 노트북 앞으로 돌아온다. 마감 3일 전부터 움직여도 ‘마감이 일을 해주는’ 기적은 내게 없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판타지도 당연히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때문에 나의 전략은 늘 ‘성실함’ 하나뿐이었다. 혹시라도 제시간에 일을 해내지 못하면 나의 성실함을 근거로 비장애인 중심의 업무 속도를 공격할 계획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99.9%의 경우에는 세상이 아닌 나의 몸을 공격하여 기어이 마감을 맞추고야 마는 편이었다.

‘장애인은 함께 일할 만큼 충분히 강하거나 효율적이지 않다’는, 혹은 ‘치료 외에는 별 일상이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편견에 저항하고 싶었다. 장애가 있거나 아프면 치료하고 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남들 하는 걸 다 하면서 치료하고 운동하고 쉬느라 더 바쁘다고 계속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안간힘을 써서 결국은 비장애인과 건강인 중심의 질서와 속도만 지키고 있는 건 아닌지 억울해졌다.

 

 

#3

그제야 둘러보니 내 곁에 비장애인은 나보다 좀 더 많거나 비슷한 양의 일을 하면서, 나보다 드라마도 많이 보고 덕질도 많이 하고 있었다. 모르는 드라마가 없고 매일매일 세상 돌아가는 뉴스도 챙겨보고, 거기에 추가로 독특한 덕질 아이템도 하나씩은 보유하고 있었다.

저녁 먹을 때 식사 시간에 맞춰 드라마 한 편을 30분씩 끊어보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풍요로운 삶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불평등에 대해, 비장애인, 건강인을 대신하여 장애인과 질병인이 얼마나 큰 부담을 짊어지는지에 대해 말하고 쓰면서, 나는 그들이 누리는 삶의 질을 모두 놓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글을 쓰다가 문득 침대에 벌렁 누워 빈둥댔다. 초고를 마치고는 드라마 세 편을 넋 놓고 보았다. 덕분에 글 마무리가 하루 이틀 늦어지긴 했지만, 속도가 느리다는 강박 때문에 작업을 일찍 시작한 덕에 마감은 맞출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감을 맞추고 나서야 생각했다. 장애인과 질병인이 꼭 유능하고 바빠야 하나? 내가 꼭 그들의 마감과 물량에 이렇게 만날 맞춰야 하나? 비장애인들이 두 손으로 일할 때 한 손으로 일하다 팔이 아파서 좀 쉬느라 마감이 늦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또 뭔가?

예전에 친한 동료들과 농담 삼아 이야기한 대로, 장애인과 질병인에 맞춰 마감과 물량을 정하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일의 성과와 기한 대신 드라마 편수와 휴식 시간을 정해 놓으면, 나도 덕질 하나쯤 새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삶에 좀 더 설레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글을 쓰다가 이번에도 일요일 자정이 다 되어 간다. 당연히 골반이 쑤신다. 다음에 병원에 가면 아파서 일을 못 하겠다고 엄살떨게 아니라, 아파서 드라마 완주에 방해를 받는다고 엄살을 떨어볼까 보다.

 

 

 

박은영

❚ 공부하고 글 쓰는 장애여성.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온 삶을 엮어 책 《소란스러운 동거》(IVP)를 냈다. 사회단체 ‘다른몸들’ 산하 모임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5년째 다른 아픈 여성들과 함께, 다양한 몸을 가진 이웃들이 동등하게 존중받으며 함께 사는 길에 대해 수다 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