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임대주택도 감지덕지? 다른 집은 없을까
30대에 들어서니 시간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느낌이다. (언니들 죄송. 그냥 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목표가 없어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에는 졸업과 취업을, 취업 후에는 그곳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살아갔는데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까 그 다음 목표가 없어서 허전했나 보다. 너무 아등바등 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간 감각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서 35세 목표를 만들어보고 있다. 5년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일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35세의 나를 떠올리면서 제일 필요한 물건(?)이 집이었다. 2년에 한번씩 이사를 고민하지 않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크기의, 내가 들어갈 집. 이 고민을 공유했을 때 주변에서는 '지금 사는 집에서 좀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니?'라고 했다.
공공임대주택에 7년을 살아보니…
나는 임대주택 7년차 거주자이다. 정부가 봐도 돈이 없는 부모님을 두었고 다양한 주거정책에 관심이 있었던 덕분에 운 좋게 공공임대주택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부 다른 유형의 공공임대주택을 거쳐 왔으며, 지금은 세번째 공공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공임대주택은 '매입임대주택'이다. 건물주가 공공에 다세대주택을 판매하면 공공에서 그 주택을 매입하여 싼 가격으로 시민에게 집을 임대해주는 유형이다. 서울시에서는 매입임대주택을 일반형∙원룸형∙신혼부부형∙청년형∙공공전세형으로 나누어 대상에 따라 선정기준을 다르게 운영하고 있다.
끝도 모르고 수직상승하는 집값이나 전세대출규제, 주거난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지금, 나는 임대주택에 진입한 것 자체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느낀다. 고정비용이 최소한으로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2년 전 퇴사를 고민하고 다음 진로를 고민할 때, ‘임대주택에 있는 동안은 폭넓은 진로선택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값 때문에 대출이 있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나의 거취가 대출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니까. 그런 고민 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다. 보증금을 떼먹힐 일도 없다. 공공임대주택에서 살게 된 근 몇 년간 보증금을 떼먹힐까봐 밤잠 못 자는 상황은 겪어본 적 없다. 보증금을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임대주택에 살아서 좋겠다!”라고 말하면 또 선뜻 “좋다”고 말할 순 없다. 내가 보고 겪은 공공임대주택의 주거환경이 그랬다. 내가 살았던 두 번째 주택은 전용면적이 베란다 포함 14㎡(약 4.2평)였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찬다고나 할까. 친구 몇 명 데리고 와서 밥 먹고 싶은데 한 명 이상 들어올 수가 없는 크기였다. 그나마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은 훨씬 넓어진 23㎡(약 6.9평)인데, 부엌과 화장실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방은 두 번째 주택과 비슷한 크기라서 차라리 두 번째 집이 낫다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사했을 때는 그나마 지금까지 당첨되었던 매입임대주택보다는 훨씬 낫겠다는 심정이었다. 이사 전 두 군데 매입임대주택에 당첨되어 현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주택은 4평도 안 되어 보이는 일체형 원룸이었고 두 번째 주택은 복도가 너무 넓고 방은 매우 작은 희한한 구조의 주택이어서 매번 입주를 포기했었다. (두 번째 주택은 거동이 힘든 고령자를 위한 복도 넓은 분리형 원룸인 것 같았지만, 빌라 내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질 낮은 거주 공간에 대한 불만뿐 아니라 정책 집행 과정이 비합리적이라는 점도 공공임대주택을 마냥 추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공공임대주택인 서울시 여성안심주택에 입주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서울시가 ‘여성안심특별시’라며 홍보했던 핵심정책 가운데 내가 입주한 여성안심주택이 있었다. 처음 여성안심주택을 짓기 시작했을 때 “‘여성안심’주택이니 1층에 파출소를 놓자”, “보육시설을 놓자”는 등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1층에 어린이집을 입주시켰다. ‘여성’과 ‘파출소’와 ‘어린이집’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좁은 임대주택의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지덕지였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같은 외관에 놀랐다. 1층에 경비실도 있고, 공용공간도 있고, 베란다에 외부침입감지 시스템도 있고. 4평의 좁디 좁은 공간이지만 고시원보다는 낫고, 나름대로 거주하는 사람을 고려한 시설이 있구나 싶었다. 이곳에서는 장기거주를 고려하며 잘 정착하며 살아보려고 아파트 관리인과 얼굴도 익히고 적정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사 첫날부터 이마를 짚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친척이 이삿짐을 옮겨주고 있었는데, 관리인이 출입을 막았다. 주민등록상 성별이 남성이라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부모님일 경우 주민등록등본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외모가 남성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여성이 안심할 수 있는 건가. 단순한 발상에 이마를 짚었다. 몇 달 후에는 또 다른 이유로 다시 이마를 짚었다. 몇 달간 관리실을 지키고 있던 분이 하루아침에 교체된 것이다. 아무래도 격일마다 관리실에서 당직을 하는 업무다 보니 일이 힘들었나 싶었다. 두세 달쯤 뒤 또 다른 분이 관리실 담당자가 되었다. 알고 보니 이곳의 건물 관리 업무는 하청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안정한 고용조건과 강도 높은 노동에 몇 개월 주기로 노동자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내가 사는 집은 건물 관리인이 있으니 안전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 담당자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는데 어떻게 관리인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7년째 공공임대주택에 살고 있고, 또 한동안은 공공임대주택에 살 예정이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안정감도 느끼고 있지만 ‘앞으로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민간주택에서 살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내 집을 찾아서 즐겁게 이사할 수 있다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 ‘공공주택에서 생애를 시작하고 마칠 수 있는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와 성별, 장애 여부와 관련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설계된 다양한 공공주택들이 있고, 나에게 맞는 주거환경을 찾아 즐거운 마음으로 이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혼부부가 아니라도 비혼이라도 청약을 통해 적당한 크기의 공공주택을 구할 수 있다면. 전국민에게 인생의 최대 과제가 된 ‘주거’를 국가가 해결해준다면 얼마나 멋질까.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지구 어느 곳에는 내가 상상해본 주거정책을 실제로 시행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독일에서는 베를린에 아파트 등 주택 3000채 이상을 보유한 민간 부동산업체의 주택을 강제 수용해 공공임대로 돌리는 방안에 대해 주민투표를 진행하였고, 56.4%가 찬성표를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를린의 공공주택 거주 비율은 80%에 달한다고 하던데도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은 ‘시민의 주거권을 조금이라도 위협한다면 민간주택시장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5년 뒤 우리나라의 지자체에서 주거 공공성에 대한 주민투표가 진행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베를린 저 끄트머리 어드메라도 따라가고 있기를 바란다.
잠
❚ 여는 민우회 회원 / 노조에서 일하는 중
서울 사는 1인가구입니다. 취미가 잠입니다.
[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임대주택도 감지덕지? 다른 집은 없을까
30대에 들어서니 시간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느낌이다. (언니들 죄송. 그냥 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목표가 없어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에는 졸업과 취업을, 취업 후에는 그곳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살아갔는데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까 그 다음 목표가 없어서 허전했나 보다. 너무 아등바등 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간 감각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서 35세 목표를 만들어보고 있다. 5년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일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35세의 나를 떠올리면서 제일 필요한 물건(?)이 집이었다. 2년에 한번씩 이사를 고민하지 않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크기의, 내가 들어갈 집. 이 고민을 공유했을 때 주변에서는 '지금 사는 집에서 좀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니?'라고 했다.
공공임대주택에 7년을 살아보니…
나는 임대주택 7년차 거주자이다. 정부가 봐도 돈이 없는 부모님을 두었고 다양한 주거정책에 관심이 있었던 덕분에 운 좋게 공공임대주택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부 다른 유형의 공공임대주택을 거쳐 왔으며, 지금은 세번째 공공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공임대주택은 '매입임대주택'이다. 건물주가 공공에 다세대주택을 판매하면 공공에서 그 주택을 매입하여 싼 가격으로 시민에게 집을 임대해주는 유형이다. 서울시에서는 매입임대주택을 일반형∙원룸형∙신혼부부형∙청년형∙공공전세형으로 나누어 대상에 따라 선정기준을 다르게 운영하고 있다.
끝도 모르고 수직상승하는 집값이나 전세대출규제, 주거난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지금, 나는 임대주택에 진입한 것 자체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느낀다. 고정비용이 최소한으로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2년 전 퇴사를 고민하고 다음 진로를 고민할 때, ‘임대주택에 있는 동안은 폭넓은 진로선택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값 때문에 대출이 있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나의 거취가 대출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니까. 그런 고민 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다. 보증금을 떼먹힐 일도 없다. 공공임대주택에서 살게 된 근 몇 년간 보증금을 떼먹힐까봐 밤잠 못 자는 상황은 겪어본 적 없다. 보증금을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임대주택에 살아서 좋겠다!”라고 말하면 또 선뜻 “좋다”고 말할 순 없다. 내가 보고 겪은 공공임대주택의 주거환경이 그랬다. 내가 살았던 두 번째 주택은 전용면적이 베란다 포함 14㎡(약 4.2평)였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찬다고나 할까. 친구 몇 명 데리고 와서 밥 먹고 싶은데 한 명 이상 들어올 수가 없는 크기였다. 그나마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은 훨씬 넓어진 23㎡(약 6.9평)인데, 부엌과 화장실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방은 두 번째 주택과 비슷한 크기라서 차라리 두 번째 집이 낫다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사했을 때는 그나마 지금까지 당첨되었던 매입임대주택보다는 훨씬 낫겠다는 심정이었다. 이사 전 두 군데 매입임대주택에 당첨되어 현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주택은 4평도 안 되어 보이는 일체형 원룸이었고 두 번째 주택은 복도가 너무 넓고 방은 매우 작은 희한한 구조의 주택이어서 매번 입주를 포기했었다. (두 번째 주택은 거동이 힘든 고령자를 위한 복도 넓은 분리형 원룸인 것 같았지만, 빌라 내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질 낮은 거주 공간에 대한 불만뿐 아니라 정책 집행 과정이 비합리적이라는 점도 공공임대주택을 마냥 추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공공임대주택인 서울시 여성안심주택에 입주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서울시가 ‘여성안심특별시’라며 홍보했던 핵심정책 가운데 내가 입주한 여성안심주택이 있었다. 처음 여성안심주택을 짓기 시작했을 때 “‘여성안심’주택이니 1층에 파출소를 놓자”, “보육시설을 놓자”는 등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1층에 어린이집을 입주시켰다. ‘여성’과 ‘파출소’와 ‘어린이집’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좁은 임대주택의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지덕지였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같은 외관에 놀랐다. 1층에 경비실도 있고, 공용공간도 있고, 베란다에 외부침입감지 시스템도 있고. 4평의 좁디 좁은 공간이지만 고시원보다는 낫고, 나름대로 거주하는 사람을 고려한 시설이 있구나 싶었다. 이곳에서는 장기거주를 고려하며 잘 정착하며 살아보려고 아파트 관리인과 얼굴도 익히고 적정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사 첫날부터 이마를 짚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친척이 이삿짐을 옮겨주고 있었는데, 관리인이 출입을 막았다. 주민등록상 성별이 남성이라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부모님일 경우 주민등록등본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외모가 남성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여성이 안심할 수 있는 건가. 단순한 발상에 이마를 짚었다. 몇 달 후에는 또 다른 이유로 다시 이마를 짚었다. 몇 달간 관리실을 지키고 있던 분이 하루아침에 교체된 것이다. 아무래도 격일마다 관리실에서 당직을 하는 업무다 보니 일이 힘들었나 싶었다. 두세 달쯤 뒤 또 다른 분이 관리실 담당자가 되었다. 알고 보니 이곳의 건물 관리 업무는 하청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안정한 고용조건과 강도 높은 노동에 몇 개월 주기로 노동자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내가 사는 집은 건물 관리인이 있으니 안전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 담당자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는데 어떻게 관리인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7년째 공공임대주택에 살고 있고, 또 한동안은 공공임대주택에 살 예정이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안정감도 느끼고 있지만 ‘앞으로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민간주택에서 살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내 집을 찾아서 즐겁게 이사할 수 있다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 ‘공공주택에서 생애를 시작하고 마칠 수 있는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와 성별, 장애 여부와 관련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설계된 다양한 공공주택들이 있고, 나에게 맞는 주거환경을 찾아 즐거운 마음으로 이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혼부부가 아니라도 비혼이라도 청약을 통해 적당한 크기의 공공주택을 구할 수 있다면. 전국민에게 인생의 최대 과제가 된 ‘주거’를 국가가 해결해준다면 얼마나 멋질까.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지구 어느 곳에는 내가 상상해본 주거정책을 실제로 시행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독일에서는 베를린에 아파트 등 주택 3000채 이상을 보유한 민간 부동산업체의 주택을 강제 수용해 공공임대로 돌리는 방안에 대해 주민투표를 진행하였고, 56.4%가 찬성표를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를린의 공공주택 거주 비율은 80%에 달한다고 하던데도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은 ‘시민의 주거권을 조금이라도 위협한다면 민간주택시장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5년 뒤 우리나라의 지자체에서 주거 공공성에 대한 주민투표가 진행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베를린 저 끄트머리 어드메라도 따라가고 있기를 바란다.
잠
❚ 여는 민우회 회원 / 노조에서 일하는 중
서울 사는 1인가구입니다. 취미가 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