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2027년으로 보내는 행운의 편지
어느 일요일 아침,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틀었다. 정세랑 작가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소개하며 “천년 전, 이천년 전의 여성 작가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언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흐름 속에 내가 있구나, 릴레이 같다는 생각을 해요.”(jtbc 「방구석1열」 141회)라고 말하고 있었다. 맞아, 그런 마음이 있지. 무심히 흘려 들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멋진 여성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언니’라는 호칭. 나이야 나보다 많을지 적을지 모르지만 중요치 않다. “멋있으면 다 언니”니까. 언니라는 호칭은 당신을 좋아한다고, 연결되고 싶다고, 당신의 길을 이어 걷고 싶다는 말의 압축이다. ‘언니’라는 단어에 담긴 여러 겹의 속뜻과 내 마음속의 언니들을 떠올려보면서,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른 이들은 언니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가 시작됐다. 평소 ‘언니’로 생각하던 작가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언니에 대해 편지를 써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뉴스레터 시스템을 이용해 언니들의 편지를 받아볼 구독자를 모집했다. 기대보다 많은 사람이 구독을 신청해주었고, 정세랑 작가를 비롯해 스무 명의 쟁쟁한 여성 창작자들이 흔쾌히 응해주었다. 좋아하는 동료 작가의 언니가 누구인지 듣고 싶다며 다음 주자를 추천하기도 했다. 정말로 ‘행운의 편지’가 된 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스무 통의 편지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아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희망과 절망, 분노와 연대의 마음이 편편이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수신인으로 원고를 열어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래, 우리는 혼자 걸을 때도 함께지.
언니들의 편지를 받기 위해 모인 독자들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침 출근길에 읽다 눈물이 글썽했다고, 좋은 언니를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얼굴은 모르지만 수천 명의 자매를 얻은 것 같았다. 같이 읽어준 이들도 그랬을까? 편지를 책으로 만들면서는 ‘이 편지가 이전 세대의 여성과 당신을, 당신과 다음 세대의 여성을 잇는 가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추신을 덧붙였다. 이 연결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지 설명: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표지, *출처: 창비출판사
쓸고 닦으면 나아지기 마련이지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는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 만날 언니들의 편지에는 어떤 말들이 담길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여성들에게 제20대 대선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선거가 될 것 같다. 분명 유권자의절반은 여성인데 여성 유권자를 의식한 공약이나 행보는 찾아보기 어렵고, 야권의 유력한 대선 후보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무고죄를 강화하겠다는 것을 ‘청년공약’으로 내놓는다. 이런 것이 백래시구나, 몸으로 실감하는 나날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지난 4년여를 돌아보며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다. 이 글을 쓰는 도중 故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 처분이 취소될 예정이라는 기사가 떴다.1)‘나중에’라는 말로 미루어진 미래에 변희수 하사는 없었다. 그처럼 ‘나중에’라는 말로 현재를 잃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아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빠질 일만 남은 것 같다. 내년 언니들의 편지는 행운은커녕 절망과 분노만 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 참여한 하미나 작가는 이렇게 썼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개미처럼 조금씩 천천히. 이 말은 요즘도 제가 절망할 때마다 속으로 되뇌는 말입니다. 그렇죠.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 않지요.”
그렇죠.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 않지요. 나는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매기 스미스(Maggie Smith)의 「좋은 뼈대」(Good Bones)라는 시를 되뇐다.
“세상은 적어도 / 오십 퍼센트 끔찍한 곳이다. (…) / 새 한 마리마다 새 한 마리가 맞을 돌이 있는 법이고, / 사랑받는 아이 한 명마다 부러지고 자루에 담겨 / 호수에 던져지는 아이 한 명 있는 법이다. (…) / 비록 내 아이들에겐 비밀이지만. 아이들에게 난 / 세상을 영업하는 중이다. 모름지기 괜찮은 공인중개사라면 / 똥통 같은 집을 소개할 때도, 이래 봬도 이 집이 / 뼈대는 좋아요, 하며 재잘대기 마련이지. 꾸미면 근사하겠죠, / 그렇죠? 근사하게 꾸미실 수 있을 거예요.”
단군이 10월 날씨만 보고 한반도를 계약했다더니, 공인중개사한테 속은 게 틀림없다. 그래도 이곳이 뼈대는 좋다. 셀 수 없이 많은 언니들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있으니까. 어쩌겠나 잘 꾸며봐야지. 아무리 지저분한 곳이라도 쓸고 닦으면 나아지기 마련이다.
최지수
❚ 편집자(창비 인문교양출판부)
무슨 소리. 겁이 나긴, 재밌지 뭐.
1) 2021년 10월, 육군은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를 포기했다. 이로써 변 하사의 인사기록은 ‘강제전역’이 아닌 ‘정상전역’으로 정정 절차를 밟게 되었다.(편집자 주)
[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2027년으로 보내는 행운의 편지
어느 일요일 아침,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틀었다. 정세랑 작가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소개하며 “천년 전, 이천년 전의 여성 작가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언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흐름 속에 내가 있구나, 릴레이 같다는 생각을 해요.”(jtbc 「방구석1열」 141회)라고 말하고 있었다. 맞아, 그런 마음이 있지. 무심히 흘려 들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멋진 여성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언니’라는 호칭. 나이야 나보다 많을지 적을지 모르지만 중요치 않다. “멋있으면 다 언니”니까. 언니라는 호칭은 당신을 좋아한다고, 연결되고 싶다고, 당신의 길을 이어 걷고 싶다는 말의 압축이다. ‘언니’라는 단어에 담긴 여러 겹의 속뜻과 내 마음속의 언니들을 떠올려보면서,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른 이들은 언니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가 시작됐다. 평소 ‘언니’로 생각하던 작가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언니에 대해 편지를 써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뉴스레터 시스템을 이용해 언니들의 편지를 받아볼 구독자를 모집했다. 기대보다 많은 사람이 구독을 신청해주었고, 정세랑 작가를 비롯해 스무 명의 쟁쟁한 여성 창작자들이 흔쾌히 응해주었다. 좋아하는 동료 작가의 언니가 누구인지 듣고 싶다며 다음 주자를 추천하기도 했다. 정말로 ‘행운의 편지’가 된 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스무 통의 편지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아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희망과 절망, 분노와 연대의 마음이 편편이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수신인으로 원고를 열어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래, 우리는 혼자 걸을 때도 함께지.
언니들의 편지를 받기 위해 모인 독자들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침 출근길에 읽다 눈물이 글썽했다고, 좋은 언니를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얼굴은 모르지만 수천 명의 자매를 얻은 것 같았다. 같이 읽어준 이들도 그랬을까? 편지를 책으로 만들면서는 ‘이 편지가 이전 세대의 여성과 당신을, 당신과 다음 세대의 여성을 잇는 가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추신을 덧붙였다. 이 연결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지 설명: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표지, *출처: 창비출판사
쓸고 닦으면 나아지기 마련이지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는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 만날 언니들의 편지에는 어떤 말들이 담길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여성들에게 제20대 대선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선거가 될 것 같다. 분명 유권자의절반은 여성인데 여성 유권자를 의식한 공약이나 행보는 찾아보기 어렵고, 야권의 유력한 대선 후보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무고죄를 강화하겠다는 것을 ‘청년공약’으로 내놓는다. 이런 것이 백래시구나, 몸으로 실감하는 나날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지난 4년여를 돌아보며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다. 이 글을 쓰는 도중 故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 처분이 취소될 예정이라는 기사가 떴다.1)‘나중에’라는 말로 미루어진 미래에 변희수 하사는 없었다. 그처럼 ‘나중에’라는 말로 현재를 잃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아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빠질 일만 남은 것 같다. 내년 언니들의 편지는 행운은커녕 절망과 분노만 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 참여한 하미나 작가는 이렇게 썼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개미처럼 조금씩 천천히. 이 말은 요즘도 제가 절망할 때마다 속으로 되뇌는 말입니다. 그렇죠.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 않지요.”
그렇죠.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 않지요. 나는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매기 스미스(Maggie Smith)의 「좋은 뼈대」(Good Bones)라는 시를 되뇐다.
“세상은 적어도 / 오십 퍼센트 끔찍한 곳이다. (…) / 새 한 마리마다 새 한 마리가 맞을 돌이 있는 법이고, / 사랑받는 아이 한 명마다 부러지고 자루에 담겨 / 호수에 던져지는 아이 한 명 있는 법이다. (…) / 비록 내 아이들에겐 비밀이지만. 아이들에게 난 / 세상을 영업하는 중이다. 모름지기 괜찮은 공인중개사라면 / 똥통 같은 집을 소개할 때도, 이래 봬도 이 집이 / 뼈대는 좋아요, 하며 재잘대기 마련이지. 꾸미면 근사하겠죠, / 그렇죠? 근사하게 꾸미실 수 있을 거예요.”
단군이 10월 날씨만 보고 한반도를 계약했다더니, 공인중개사한테 속은 게 틀림없다. 그래도 이곳이 뼈대는 좋다. 셀 수 없이 많은 언니들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있으니까. 어쩌겠나 잘 꾸며봐야지. 아무리 지저분한 곳이라도 쓸고 닦으면 나아지기 마련이다.
최지수
❚ 편집자(창비 인문교양출판부)
무슨 소리. 겁이 나긴, 재밌지 뭐.
1) 2021년 10월, 육군은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를 포기했다. 이로써 변 하사의 인사기록은 ‘강제전역’이 아닌 ‘정상전역’으로 정정 절차를 밟게 되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