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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1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_살고 싶은 사회를 이미 살고 있다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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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살고 싶은 사회를 이미 살고 있다

 

 

내겐 꿈이 없다

 

어느 때부턴가 나는 내일을 꿈꾸지 않는다. 64년이나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좋고, 언제 집어들거나 도착할지 모를 죽음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돈은 있다고 여겨져, 생존에 대한 불안도 더 갖고 싶은 욕망도 없다.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먼저 추락한 사람들’ 덕에 더 추락해도 그럭저럭 살아지겠구나 싶다. 그러다가 죽음이 오면 마침내 끝이어서 나름 또 좋은 거다. 이만하면 족하다 싶다.

 

국가사회에 대한 꿈도 없다. 5년의 시간 동안 차기 정권에 의해 주도되는 국가사회에 대해 대체 어떤 희망을 꼽을 수 있는가? 코로나19 팬데믹이 여전히 계속될 테고, 더 많은 사람들과 특히 가난한 여성들이 경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테고, 경계를 넘어 죽어갈 거다. “페미니스트 정권입네” 하던 정권이 이 지경이었으니, 여성주의자들에게 다음 5년은 ‘싸움의 꿀맛’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는 터널일 거다. 물론 그 동안의 오래고 질긴 싸움 덕에 21세기 국가사회로서 불가피한 면피성 진전이 법제도 영역에서 있을 테지만, 그 진전이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자리에서는 이미 다른 사회가 시작되었다

 

제도정치에 희망을 접은 후, 나는 인생이 아주 간단해졌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최대한 즐기다 죽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고 싶으며, 게다가 그들과 어우러지는 동안의 촉감(觸感)이 더없이 좋다. 

 

지난 35년의 사회운동, 그중 특히 최근 10여 년간 노인∙여성농민∙홈리스 등과 함께 한 구술생애사 작업 과정에서, ‘어둡고 지저분하고 위험하다’고 분류되는 사람과 장소에 대한 촉이 나를 이루는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함께 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그 촉과 정체성이 확실하고 중요해졌다. 게다가 그 촉의 출발 지점이 내 속 상처와 어두움과 혼돈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헐벗은 존재들과 장소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두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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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설명: 야학 식구들과 함께 즐긴 가을 소풍. 어린이대공원 구석구석을 다니며 ‘차별금지법 제정 #평등길 1110’을 함께 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존재들과 어울려 함께 나누고 돌보며 놀고 싸운다. 가족 타령이 유난히 심한 추석 명절에는, 가족에서 도망치거나 쫓겨나거나 도저히 가족들에게 안 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놀았다. 되는대로 전과 잡채와 돼지갈비를 만들고, 송편과 과일과 술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먹고 놀다가, 못 온 사람의 것을 챙겨 나눠주러 갔다. 얼마 전에는 빈민인권단체인 ‘홈리스행동’의 아랫마을야학 식구들이 어린이대공원으로 가을 소풍을 갔다. 마침 날씨도 좋고 단풍도 좋고, 코로나 지침도 좀 풀려 사람들이 바글대는 어린이대공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차별금지법 제정 #평등길1110’을 함께 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걸어온 길, 그 곁에서 여럿이 함께 만드는 길들, 장차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에 대해 쉽고 신나게 떠들었다. 

 

믿을 거라곤 돈과 가족밖에 없다고 아우성들인 무한경쟁과 각자도생 사회에서 맨 끝자리로 밀려나 몸도 마음도 망가져, 이젠 ‘근로자’로도 가족으로도 회복가능성도 의지도 잃어버린 사람들과 장소야말로, 페미니스트인 내가 다시 좇아가 함께 뒤엉켜 즐겁게 놀며 질문을 이어갈 곳이다. 

 

예를 들어 서울역 노숙인 광장은 생명의 근본 욕구이자 필요불가결한 조건인 먹고 잠자는 일 자체가 매일매일 재난인 사람들이 모인 장소다. 게다가 사회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불행이든 다행이든 빈곤이 유일한 밑천인 사람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가족중심주의가 이 사회의 근본 문제라면, 그 대열에서 쫓겨나 회복가능성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이는 노숙인 광장이야말로 근본적 변혁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터전이 불타버린 자리에서야말로 제대로 된 시작이 가능하다. 그곳은 광장 바깥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합의되고 통용되는 가치관과 욕망과 규범과 질서가 깨져버린 재난 공간이다. 내일도 꿈도 희망도 없이 늘 위험하고 불온하며 지금 당장의 불행과 다행만으로 삶이 이어지고 끊기는 공간이다. 

 

홈리스, 정신장애인, HIV·에이즈 감염인들과 함께 놀려면 경계를 넘어 내 길을 벗어나야 한다. 우선 내 삶의 터전과 언어를 떠나야 하고, 계급에 대한 관점과 페미니즘도 찢으며, 양심이니 윤리니 상식 따위는 물론 질병과 장애에 관한 규정과 구분도 의심하면서 처지에 주목해야 하고, 법과 사회질서가 누구를 위한 질서이고 보안인지를 노려보아야 한다. 여성다움이 학습된 것이라면 어떤 피해자성 또한 학습된 것이라는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여성홈리스 영주(가명, 16세부터 노숙을 시작한 46세 여성, 필자의 구술생애사 화자)에게 몸과 성(性)은 좀 나은 잠자리와 한 끼 밥을 얻기 위한 협상 수단이기도 했다. 임신 여부는 그저 재수에 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 재수는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꼭 한번 ‘낳을까’를 고민했는데 자신이 없었고, 여러 차례의 ‘낙태’ 수술을 거쳐 요즘은 피임시술을 하고 있다. 성폭력이나 혹은 성매매라 할 것도 없는 ‘하룻밤’들에 대해 낙인이나 자괴 따위는 없다. 경우에 따라 빡치고 화딱지가 날 뿐, 수치심 따위도 없다. 자유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생존전략이다. 살아내느라 생긴 힘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희망없이 하염없이, 나누고 놀고 돌보고 싸우자

 

모든 ‘비정상’에는 우울과 분노, 도발과 저항이 뒤엉킨다. 삿대를 단단히 쥐고 마음과 삶의 향방을 최대한 주도할 일이다. 불온함과 변태(變態)야말로, ‘돈과 가족이 최고’라는 세상의 끝에서 재난을 즐겁게 통과하고 다음 재난을 맞이할 힘을 키우는 잉여들의 ‘가오’다. 

 

그러니 머물든 드나들든 들여다보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견지할 태도는 ‘희망없음’과 ‘하염없음’이다. 어떤 실패나 실패들의 반복에도, 애초에 희망이 없었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있는 것 털고 생기는 것 받아 함께 즐기며 놀다 보면 다시 힘이 날 테고, 기회 봐서 가진 자들을 향해 한 번 더 싸우면 된다. 성취를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없고, 요행히 어떤 성취가 오면 꿀맛처럼 즐기면 된다. 어떤 실패에는 신경질도 나고 쌍욕도 내지르겠지만, 그건 사느라 싸우느라 그런 거다. 

 

다행히 나는 이곳에 이미 맛을 들였고, 향후 5년간 더 넓어지고 시끄러워질 헐벗은 자들의 광장들에서 나누고 놀고 돌보고 싸우는 친구들이 모여들 것을 기대한다. 물론 꼭 이 광장일 필요는 없다. 혹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터전을 불태울 수 있다면, 그 자리가 각자와 우리의 광장을 시작하는 곳이다. 


 

 

최현숙

❚ 구술생애사 작가 

『할배의 탄생』, 『억척의 기원』, 『작별일기』,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