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선거의 변수다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은 얼마전 페미니스트+퀴어 시사정치 토크쇼 ‘권손징악’의 첫 시즌 방송을 마쳤다. 권김현영과 손희정, 두 페미니스트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시작한 방송은 박용진, 이정미 등 정치인 게스트들까지 참여하면서 규모가 점점 커졌다.
그런 만큼 기대가 컸지만 사실 기획자로서 걱정도 있었다. 가장 우려했던 건 실시간 채팅창이 비방글로 도배되는 것이었다. 게스트들은 좋은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이 우호적이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정치’란 게 한국 사회에서 가장 여론이 양분되고 충돌이 잦은 분야가 아닌가. 다루는 주제가 민감할수록, 방송을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전 흥미로운 소식을 발견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의 조사 결과 한국인 10명 중 9명은 정치적 갈등이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는 뉴스다. 퓨리서치는 ‘지지 정당 차이에 따라 사회 갈등이 있는지’를 질문했는데 90%가 ‘심각’ 혹은 ‘매우 심각’을 골랐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공동 1위에 오른 나라는 미국이었는데, 한국과 미국의 공통점은 두 거대 정당이 권력을 거의 양분하는 사실상의 양당제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에서는 적대적이고 극단적인 정치 환경이 조성될 가능성이 높다. 경쟁자가 오직 하나뿐이라면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저 놈만 사라지면 내가 된다’ 혹은 ‘너만 꺾으면 내가 된다’.
물론 둘이든 여럿이든 간에 정치집단이 서로가 더 나음을 보여주고자 혁신을 반복한다면 경쟁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집단의 역할에 ‘선택받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치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사회적 갈등 조정이다. ‘갈등의 조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시끄러운 분쟁 상태를 해소하고 사회를 조용한 상태로 돌리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조정은 다르다. 조정은 책임자에 의한 ‘문제의 공정하고 근본적인 해결’이다.
가령 특정 지역 주민들이 이슬람 종교시설 건립을 반대하고 그 배경에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조정은 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반대자들을 조용히 시키는 게 아니다. “편견과 혐오는 사회적 정의에 반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몰아낼 수 없다”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 더 나아가 부정의한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조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의 일이다.

이미지 설명 : 페미니스트+퀴어 시사정치 토크쇼 ‘권손징악’의 사회자들
한국 정치가 조정을 포기하는 이유
하지만 양당이 지배하는 적대적 정치 환경에서 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득이 되기 어려운 이슈, 민감한 이슈를 정치집단이 꺼려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된 사안이 그렇다. 주요 후보의 숫자가 많고 지지층이 고르게 분산된다면 어떤 정치인들에게 소수자들은 중요한 지지집단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주요 후보의 숫자가 적고 지지층이 양분될수록 소수자들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그렇기에 머릿수에서나 정치력에 있어서나 힘이 미미한 소수자들이 엮인 갈등은 한국에서 아주 쉽게 방치된다. 정치인들이 차마 대놓고 혐오에 편승하지는 못하지만 혐오를 방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당이 지지집단 확장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듣기에 이 말은 현실과 달라보일지 모른다. 선거기간이 되면 정당들은 기존의 노선이나 친밀감과는 무관하게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었다고 평가되는 집단들을 쫓아가 늘 지지를 호소하지 않았는가. 상대적으로 낡은 이미지의 보수 정당이 20대를 찾고 진보정당의 후보가 갑자기 군부대를 찾아가 안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제스처는 전통적인 지지기반의 심기를 거스를 ‘선’을 넘지 않는다. ‘변수’가 중요한 건 맞지만 만능열쇠는 아니라는 뜻이다. 기존에 단단하게 확보한 지지기반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캐스팅 보터의 확보도 무의미해진다. 선거 초반에 다양한 사회 집단을 만나던 정치인들이 막바지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큰 파이를 붙잡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집단의 기성 지지층과 대립하거나 혹은 그들이 싫어하는 사회적 집단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이거나 혹은 지지하는 정당이 아주 뚜렷하고 견고하다면, 즉 캐스팅 보터의 역할조차 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은 자기 지지층의 편에 서서 이들을 적대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보수 정치인들이 노조나 시민사회 단체를 공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정을 포기한 정치가 만든 풍경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2022년 대통령 선거라는 새로운 이벤트가 점점 다가오지만 조정 능력을 상실한 정치의 모습은 여전하다. 심지어 몇몇 정치인들은 20대 남성의 표를 얻겠다는 명분으로 페미니즘 백래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지고 가산점이 없어져서 군인의 사기가 저하됐다”거나 “건강하지 못한 페미니즘이 남녀교제를 막는다”는 식의 발언만 있었던 게 아니다. 몇몇 후보들은 아예 ‘여성가족부 폐지’나 ‘성폭력특별법 무고조항 신설’ 등의 공약까지 내놓았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공정’이다. 편향된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을 없애고 성폭력만큼이나 무고도 엄정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이미 성평등 국가라서 성별에 따른 격차가 없거나 무고가 성폭력 수준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고서야 저 주장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둘 다 아니지 않나.
지난 4월 세계경제포럼의 ‘2021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성격차 지수 순위에서 156개국 가운데 102위에 그쳤다. 또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2017·2018 두 해 동안 이루어진 성폭력 무고 고소는 824건인데, 그나마 이들 중 84.4%는 불기소 처리되었고 실제로 유죄로 확인된 경우는 6.4%에 그쳤다. 건수나 심각성에 있어 무고는 성폭력과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렇듯 정치인들의 백래시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건 이들이 호응하고자 한 지지층의 불만 또한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면 이를 간파해야 하고 공동체에 해가 될 공약을 던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건대 이들에게는 조정의 의지가 전혀 없다. 그러니 되려 편견과 혐오만 강화할지라도 확실한 내 편을 만들 수 있다면 정치인들은 그 일을 한다.
우리는 이런 행동이 만든 최악의 결과를 이미 다른 나라에서 목도한 적이 있다. 바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다. 백인 우월주의자·성차별주의자·성소수자 혐오자들에게 노골적인 구애를 했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 사회의 최저선은 가차 없이 진창으로 직행했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던 이들이 위험한 정치 효능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편견과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그 결과 비백인·여성·성소수자들의 권리는 크게 후퇴하거나 아예 안전을 걱정할 수준으로 삶의 질이 저하되었다. 한국이라고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우리가 변수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 이 글의 결론이 무시무시한 경고나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변수가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우리다.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유의미한 정치세력이며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임을 보여주면 된다.
거대 양당과 그들의 지지층에 비하면 우리가 한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자. 고위공직자에 대한 용감한 미투가 있었던 이후 그에 합당한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여론을 환기했다. 우리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100일 동안 릴레이 시위를 벌이지 않았다면 과연 ‘낙태죄 헌법불합치’라는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유독 심각해진 디지털 성폭력을 쟁점으로 만들고 정치인들이 이에 대해 입을 열게 만든 것도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결과였다. 즉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 우리는 권력을 흔들어 보았다.
또한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집단과 계층, 특히 소수자들이 저항의 원동력으로 삼을 담론과 지식이 있다. 이는 더 많은 소수자들이 연결되어 무한히 연대를 확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도 페미니스트들은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연대하고 있다. 차별금지법과 故 변희수 하사의 복직투쟁이 첨예한 쟁점이 된 것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마이크의 크기를 키워보는 건 어떨까. 그 마이크로 편견과 혐오를 비판하고 어떤 정치인도 쉽게 거기에 편승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캠페인을 조직하고 주변을 설득하고 청원에 참여하거나 민원을 보내는 등 앞으로 대선까지 남은 시간 동안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며 낙담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변수다. 그리고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스머프
❚ 여는 민우회 회원,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 기획자
안 그런 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선거의 변수다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은 얼마전 페미니스트+퀴어 시사정치 토크쇼 ‘권손징악’의 첫 시즌 방송을 마쳤다. 권김현영과 손희정, 두 페미니스트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시작한 방송은 박용진, 이정미 등 정치인 게스트들까지 참여하면서 규모가 점점 커졌다.
그런 만큼 기대가 컸지만 사실 기획자로서 걱정도 있었다. 가장 우려했던 건 실시간 채팅창이 비방글로 도배되는 것이었다. 게스트들은 좋은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이 우호적이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정치’란 게 한국 사회에서 가장 여론이 양분되고 충돌이 잦은 분야가 아닌가. 다루는 주제가 민감할수록, 방송을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전 흥미로운 소식을 발견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의 조사 결과 한국인 10명 중 9명은 정치적 갈등이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는 뉴스다. 퓨리서치는 ‘지지 정당 차이에 따라 사회 갈등이 있는지’를 질문했는데 90%가 ‘심각’ 혹은 ‘매우 심각’을 골랐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공동 1위에 오른 나라는 미국이었는데, 한국과 미국의 공통점은 두 거대 정당이 권력을 거의 양분하는 사실상의 양당제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에서는 적대적이고 극단적인 정치 환경이 조성될 가능성이 높다. 경쟁자가 오직 하나뿐이라면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저 놈만 사라지면 내가 된다’ 혹은 ‘너만 꺾으면 내가 된다’.
물론 둘이든 여럿이든 간에 정치집단이 서로가 더 나음을 보여주고자 혁신을 반복한다면 경쟁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집단의 역할에 ‘선택받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치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사회적 갈등 조정이다. ‘갈등의 조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시끄러운 분쟁 상태를 해소하고 사회를 조용한 상태로 돌리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조정은 다르다. 조정은 책임자에 의한 ‘문제의 공정하고 근본적인 해결’이다.
가령 특정 지역 주민들이 이슬람 종교시설 건립을 반대하고 그 배경에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조정은 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반대자들을 조용히 시키는 게 아니다. “편견과 혐오는 사회적 정의에 반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몰아낼 수 없다”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 더 나아가 부정의한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조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의 일이다.
이미지 설명 : 페미니스트+퀴어 시사정치 토크쇼 ‘권손징악’의 사회자들
한국 정치가 조정을 포기하는 이유
하지만 양당이 지배하는 적대적 정치 환경에서 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득이 되기 어려운 이슈, 민감한 이슈를 정치집단이 꺼려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된 사안이 그렇다. 주요 후보의 숫자가 많고 지지층이 고르게 분산된다면 어떤 정치인들에게 소수자들은 중요한 지지집단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주요 후보의 숫자가 적고 지지층이 양분될수록 소수자들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그렇기에 머릿수에서나 정치력에 있어서나 힘이 미미한 소수자들이 엮인 갈등은 한국에서 아주 쉽게 방치된다. 정치인들이 차마 대놓고 혐오에 편승하지는 못하지만 혐오를 방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당이 지지집단 확장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듣기에 이 말은 현실과 달라보일지 모른다. 선거기간이 되면 정당들은 기존의 노선이나 친밀감과는 무관하게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었다고 평가되는 집단들을 쫓아가 늘 지지를 호소하지 않았는가. 상대적으로 낡은 이미지의 보수 정당이 20대를 찾고 진보정당의 후보가 갑자기 군부대를 찾아가 안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제스처는 전통적인 지지기반의 심기를 거스를 ‘선’을 넘지 않는다. ‘변수’가 중요한 건 맞지만 만능열쇠는 아니라는 뜻이다. 기존에 단단하게 확보한 지지기반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캐스팅 보터의 확보도 무의미해진다. 선거 초반에 다양한 사회 집단을 만나던 정치인들이 막바지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큰 파이를 붙잡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집단의 기성 지지층과 대립하거나 혹은 그들이 싫어하는 사회적 집단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이거나 혹은 지지하는 정당이 아주 뚜렷하고 견고하다면, 즉 캐스팅 보터의 역할조차 하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은 자기 지지층의 편에 서서 이들을 적대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보수 정치인들이 노조나 시민사회 단체를 공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정을 포기한 정치가 만든 풍경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2022년 대통령 선거라는 새로운 이벤트가 점점 다가오지만 조정 능력을 상실한 정치의 모습은 여전하다. 심지어 몇몇 정치인들은 20대 남성의 표를 얻겠다는 명분으로 페미니즘 백래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지고 가산점이 없어져서 군인의 사기가 저하됐다”거나 “건강하지 못한 페미니즘이 남녀교제를 막는다”는 식의 발언만 있었던 게 아니다. 몇몇 후보들은 아예 ‘여성가족부 폐지’나 ‘성폭력특별법 무고조항 신설’ 등의 공약까지 내놓았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공정’이다. 편향된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을 없애고 성폭력만큼이나 무고도 엄정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이미 성평등 국가라서 성별에 따른 격차가 없거나 무고가 성폭력 수준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고서야 저 주장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둘 다 아니지 않나.
지난 4월 세계경제포럼의 ‘2021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성격차 지수 순위에서 156개국 가운데 102위에 그쳤다. 또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2017·2018 두 해 동안 이루어진 성폭력 무고 고소는 824건인데, 그나마 이들 중 84.4%는 불기소 처리되었고 실제로 유죄로 확인된 경우는 6.4%에 그쳤다. 건수나 심각성에 있어 무고는 성폭력과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렇듯 정치인들의 백래시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건 이들이 호응하고자 한 지지층의 불만 또한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면 이를 간파해야 하고 공동체에 해가 될 공약을 던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건대 이들에게는 조정의 의지가 전혀 없다. 그러니 되려 편견과 혐오만 강화할지라도 확실한 내 편을 만들 수 있다면 정치인들은 그 일을 한다.
우리는 이런 행동이 만든 최악의 결과를 이미 다른 나라에서 목도한 적이 있다. 바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다. 백인 우월주의자·성차별주의자·성소수자 혐오자들에게 노골적인 구애를 했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 사회의 최저선은 가차 없이 진창으로 직행했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던 이들이 위험한 정치 효능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편견과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그 결과 비백인·여성·성소수자들의 권리는 크게 후퇴하거나 아예 안전을 걱정할 수준으로 삶의 질이 저하되었다. 한국이라고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우리가 변수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 이 글의 결론이 무시무시한 경고나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변수가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우리다.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유의미한 정치세력이며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임을 보여주면 된다.
거대 양당과 그들의 지지층에 비하면 우리가 한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자. 고위공직자에 대한 용감한 미투가 있었던 이후 그에 합당한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여론을 환기했다. 우리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100일 동안 릴레이 시위를 벌이지 않았다면 과연 ‘낙태죄 헌법불합치’라는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유독 심각해진 디지털 성폭력을 쟁점으로 만들고 정치인들이 이에 대해 입을 열게 만든 것도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결과였다. 즉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 우리는 권력을 흔들어 보았다.
또한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집단과 계층, 특히 소수자들이 저항의 원동력으로 삼을 담론과 지식이 있다. 이는 더 많은 소수자들이 연결되어 무한히 연대를 확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도 페미니스트들은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연대하고 있다. 차별금지법과 故 변희수 하사의 복직투쟁이 첨예한 쟁점이 된 것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마이크의 크기를 키워보는 건 어떨까. 그 마이크로 편견과 혐오를 비판하고 어떤 정치인도 쉽게 거기에 편승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캠페인을 조직하고 주변을 설득하고 청원에 참여하거나 민원을 보내는 등 앞으로 대선까지 남은 시간 동안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며 낙담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변수다. 그리고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스머프
❚ 여는 민우회 회원,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 기획자
안 그런 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