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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잃어버린 시간주권을 찾아서

2023-01-05
조회수 1201

[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_여성노동팀

 

 

잃어버린 시간주권을 찾아서

 

 

 

코로나19를 지나오며 재택근무, 시차출퇴근제 등 다양한 유연근무제가 도입되었다. 특히 경력 단절 방지, 육아 병행을 이유로 여성노동자에겐 육아휴직 및 육아기단축근로, 재택근무 등의 유연근무제가 더욱 권해지기도 했다. 이는 많은 여성노동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자녀를 등원·등교 시키고 출근하거나 하원·하교 시간에 맞춰 퇴근해 돌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 속 여성노동자는 시간주권을 갖고 있을까? 돌봄이 여전히 여성만의 몫으로 상정되는 사회에서 양육을 위해 노동시간을 조정한 것이 오롯한 ‘자의’가 될 수 있을까. 올해 여성노동팀은 여성노동자의 일경험을 통해 노동시간과 유연근무제 현황을 들어보고,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로 시간주권 담론을 확산하고자 했다.

 

유연근무제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 유연근무제가 있긴 하지만 쓸 수 없었던 사람, 야근(夜勤)과 조근(朝勤)을 밥 먹듯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사무직부터 서비스직, 생산직, 사무직 등 다양한 직군과 계약 형태를 반영하여 20명의 여성노동자를 만났다.

 

 

 

여성노동자의 시간, 주인은 누구?

 

서빙 일은 오래 해도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엔 ‘값싸게’ 쓸 수 있는 대학생, 경력단절 여성, 장년 여성 등이 계속 유입되기 때문에 노동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대답, 자녀 돌봄을 위해 육아기단축근무를 사용했지만 출장이 2배 쯤 늘어 실제론 제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다는 사례까지. 마치 ‘여성노동자가 일하면서 겪는 101가지 어려움’을 보는 듯했다. 그런 중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려움이 있었으니 바로 모두가 너무 오랜시간 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터뷰이 중 73.7%(14명)는 국제노동기구에서 장시간 노동 기준으로 제시한 주 48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었다.

 

“마케팅 업계에선 야근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냥 하는 거죠” (박소라/20대/SNS 마케팅)1)

“저희는 납품 일정이 있어서 그 틀에 맞춰진 채로 일이 진행돼요.

발주처가 원하는 조건, 디자인이나 설계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시간 내에 완수를 해야 돼서…” (윤수미/40대/제품 설계)

“영업일 이틀 내로 모든 정산 업무가 다 결재 올라가있어야 해서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새벽) 1시, 2시까지 하죠” (김영아/30대/물류서비스)

 

많은 회사가 유연근무제의 이점을 ‘자유로운 시간 활용’으로 꼽는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확인했을 때, 장시간 노동과 유연근무제가 결합되면 유연근무제는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도구가 되기 쉬웠다. 시차출퇴근제를 이용하는 한 인터뷰이는 외근직이 사무실에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회의 시간이 잡히기 때문에 본인이 퇴근할 때 회의가 잡힌다고 했다. 시차출퇴근제가 실제 작동했을 때 어떤 보완책이 필요한지 조직이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심지어는 일찍 퇴근하고 회식 장소에 먼저 가 ‘정시 출퇴근자’를 기다리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혹은 너무 ‘유연’하게 일하기 때문에 노동시간과 일상의 경계가 흐려져 일을 멈추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다.

 

 

 

노동하는 시간 너머를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인터뷰를 통해 만난 상당수 여성노동자가 구조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고 싶다는(“정년은 해보고 싶어요”) 김복주 님과의 인터뷰에서는 왜인지 힘을 받기도 했다. 9년차 제조업 노동자 김복주 님의 사업장은 주야 맞교대(하루 12시간 노동)를 하다 하루 8~9시간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됐다. 노동조합이 ‘내 삶을 윤택하게’라는 슬로건을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적게 일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월급이나 줄어들지” 냉소했지만, 실제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그야말로 여가시간이 생기자 김복주 님은 남는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과연 시간이 남아돌 때 그 시간을 잘 활용할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생기니까 ‘나 하고 싶은 거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래요. 저도 맞교대 할 때는 자전거를 못 탔어요. 이제는 좀 더 자유롭게 내 시간을 쓸 수 있달까요? 그리고 빨래를 아무 날이나 해도 돼요. 맞교대 때는 예약해놓고 퇴근해서 (빨래를) 널었는데 그러니까 구김이 많이 가죠. 아무 때나 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 ‘이게 인간들 사는 거 아닌가’ 우리끼리는 그 말 많이 해요”

(김복주/40대/제조업)

 

이런 김복주 님의 말에선 일상을 살뜰히 살아가는 사람의 힘과 즐거움이 느껴졌다. 올해가 시작될 때만 해도 ‘시간주권’은 굉장히 낯선 단어였다. 실은 지금도 시간주권이 무엇인지 그럴 듯한 문장으로 정리할 재간은 없지만, 노동자가 시간주권을 잃었을 때 무엇이 무너지는지는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가사, 온전한 즐거움을 위한 취미, 소중한 사람과 나누는 저녁식사, 자기 성취를 위한 학습… 우리는 삶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생산성 회복에 쓰이는 시간 외 ‘잉여’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 생기자 활용을 상상하게 된 김복주 님처럼 노동을 넘어선 시간주권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시간이, 반드시 단축되어야 한다.

 

▲ 토론회, '내 시간의 주인은 누구?: 종송과 자율 사이, 여성노동자의 시간주권찾기' 에서 발제중인 은사자 활동가


1) 이름과 직종은 인터뷰이가 특정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출처: “내 시간의 주인은 누구?: 종속과 자율 사이, 여성노동자의 시간주권 찾기” 소책자, 2022)

 

 

은사자

❚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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