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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탈脫드랙

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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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03


 

탈脫드랙1)

 

 

▲ <래빗홀> 클럽에서 공연하는 내 모습 ⓒ 포토그래퍼 안종삼(@jonpongahn)

 

 

2022년 마침내, 드랙과 헤어질 결심

“드랙킹2)잉을 시작하면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당… 음…

체중 강박에서도 벗어났고…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 앞에도 나서는 걸 싫어했는데 요즘엔 완벽한 건 없고 그냥 미움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게 됨. 꼭 드랙을 해서는 아닐지도… 나이를 먹고, 정신병 치료 중이어서인지도… 그러나 내가 하루하루 더 나로서 살기 위해 드랙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다. 드랙이 나를 나이 먹을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게 해줬고… 미래의 일을 계획하는 방법도 알려줬지… 집은 지저분해졌지만… 좋은 친구다” 2021년 12월, 드랙에 관해 쓴 개인적인 글이다. 1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드랙과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싶다. 말이 좋아 재정의지 회피에 중독된 나에게 있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쎄한 말은, 그냥 ‘헤어지자’ 네 글자를 뱉을 깡이 없으니 시간을 조금 끌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2017년부터 드랙을 시작하고, 2018년부터 시스젠더3)게이남성 클럽 문화 외의 드랙 문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과 모여 ‘드랙킹콘테스트’를 기획했다. 각종 클럽, 인권 행사, 미술관, 심지어는 카메라 앞에서까지 공연했다. 굳이 네이버에 내 드랙킹 이름 ‘드랙킹 아장맨’을 등록해 놨다. 드랙킹 콘테스트가 ‘변태짓’이 아닌 퀴어예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판매 수수료를 떼이는 한이 있더라도 인XX크티켓을 통해 티켓을 팔았다. 미대를 졸업한 뒤 주변 사람에게는 “나 예술 포기했어”라고 말했지만 드랙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천지빼까리다. 돈과 시간, 체력을 쏟아가며 ‘드랙킹’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 했던 순간을 나는 외면할 수 없다. 수많은 여자와 트라우마틱한 이별(..., 2013, 2014, 2015, 2016, 2021)을 하고 그들을 죽은 셈 치며 살아왔던 나지만, 이 이별(2022)은 다른 이별과는 달리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 드랙킹콘테스트1 포스터가 현재는 사라진 홍대의 클럽 < MWG> 의 벽에 붙어 있는 모습. 드랙킹콘테스트는 클럽 MWG을 대관하여 1회, 2회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민망한 모습이… 나?

사실 ‘노력하면 아직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권태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긍정 회로를 돌리기도 했다. 최근 몇 달은 들어오는 공연 문의를 쳐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쇼를 위해 분장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진짜 온 마음을 다해, 너무 하기가 싫어서 아기처럼 울었다. 내가 내린 선택을 감당하지 못하고 거울 앞에서 운다는 게 쪽팔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몇 달 전에 하겠다고 승낙한 일이라 당일 엎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쌍욕을 하며 후회했다. 울면서 얼굴에 클라운 화이트(특수 분장 재료)를 바르느라, 눈물 때문에 번지는 눈화장과 돌아가는 렌즈를 수습하느라 고통스러웠다. 한때는 무대에서 받는 환희를 기대하며 드랙용 화장품과 소품을 하나둘 사 모았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을까?

드랙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꼭 거쳐야 하는 수치심 행렬이 떠오른다. 드랙 하고 택시 타기, 현관문 앞에서 엄마 마주치기, 교회에서 돌아온 이웃과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갇힌 채 어색한 침묵을 견디기, 그러다가 “연극 하는 분이신가 봐요?”라며 어색하게 말 붙이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치기, 땀에 절어서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가짜 가죽옷의 촉감을 견디기……. 가발과 머리 장식의 무게, 불편함도 짜증 났다. 에어컨이나 히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클럽 대기실에 소음에 시달리며 불편하게 오래 앉아 있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 공연이 끝난 이후 집 엘리베이터 앞에서 온갖 드랙 소품, 화장품, 옷가지를 들고있다. 제발 엘리베이터에서 누구도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도 주말엔 브런치4)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브런치를 먹는 사람 앞에서 ‘드랙 브런치’의 퍼포머가 되면 수치심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내 안의 여자와 화해하지 못해서 드랙을 하는 걸까?’ 내 정체성을 고민한다. ‘내가 좀 더 여자 수행에 성공할 수 있는 예쁜 여자였다면, 그냥 여자인 상태로 만족하면서 살았을 테니 굳이 이런 힘든 길을 안 갔겠지?’, ‘아, 나 지금 보수적인 레즈비언 연애 시장에서 실시간으로 미끄러지고 있겠지? 그냥 여자 되기에 실패해서 생긴 반항심 때문에 드랙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거 그만하고 지금 당장 여자한테 시집가고 싶다’ 이 속 시끄러운 상태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드랙은 내가 자기혐오를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동시에 내 안의 자기혐오를 직면하게 했다.

 

“그래서 드랙 사랑 안 하십니까?”

쓰다 보니 너무 드랙 욕만 한 것 같다. 이러라고 글 쓸 기회를 주신 건 아닐 텐데. 뒤늦게 수습해 보겠다. 나는 드랙을 하면서 내가 평생 느껴보리라 기대하지 못한 감정,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드랙을 한 날, 다른 자아를 빌려 일면식 없는 관객 앞에서 유두를 노출하고 춤추면서 받았던 순간의 강렬함은 계속 드랙을 하게 해준 원동력 중 하나다. 딸 부잣집에서 나이 터울 많이 나는 막내딸로 태어나자마자(1994) 남자 되기에도 실패하고, 그렇다고 여자 되기에도 실패한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 방법을 드디어 찾은 듯했다. 엄마는 5분에 한 번씩 본인의 눈에 거슬리는 내 외모를 지적해내는 능력을 가졌는데, 무대에서 악에 받쳐 립싱크5)하는 3분 30초 동안은 엄마로부터도 자유로웠다. (팟캐스트 ‘생방송여자가좋다’ 23화 참고)

문제는 내가 너무 딸로 키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팸6)으로 살고 있었다.(참고로 나는 십 대 시절 너무 부치7)처럼 행동했다가 부치 여자친구에게 잠수 이별을 당한 뒤로 자기 검열이 심해졌다) 조금만 방심하면 쇼에 어울리지 않는 곡선적이거나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공연의 흐름을 망쳤다. 금세 겸손한 표정, 낮은 자존감이 스며 나왔다. 쇼에 어울리는 당당함과 광기를 얻어내기 위해 가슴을 까고 거만한 표정을 훈련했다. 일부러 턱뼈를 더 내밀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 그 얼굴은 원래 나한테 없는 것임에도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내게 허락되지 않은 표정과 몸짓을 원래 타고난 ‘내 것’처럼 꾸미는 것은 재밌었다. 익숙한 것을 버리거나 뒤틀고, 금기를 깨는 짜릿함이 영원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시끄럽고 과장될 나를 견뎌주라!

그렇지만 당연히 돈도 벌어야 하니 출근해야 했고, 그 간극 때문에 일상의 나를 감당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주말 내내 ‘드랙킹 아장맨’으로 무대에서 시선을 받으면, 월요일 아침 얌전한 옷을 입고 출근한 내가 더 볼품없이 느껴졌다. 여자이기엔 부족한 부분을 불평하기는 멈췄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로 키워졌기 때문에 ‘완벽히’ 남자일 수 없는 부분을 불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자기혐오의 시대를 이겨낼 만큼 드랙이 알려준 새로운 아름다움에 나는 중독됐다. 드랙킹 문화가 수면 위로 노출되고, 여러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면 규범에서 미끄러진 나 같은 사람의 욕망(예를 들면 ‘티’나는 ‘부’치를 너무나 사랑하는) 또한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내가 좋아하는 게 메이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나와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끼리 커뮤니티를 만들면 그 안에서는 별 노력을 안해도 행복할 거라는 기대감, 실제로 드랙을 통해 만난 사람과 ‘사건’을 만들어 냈을 때의 뿌듯함, 외부인이자 내부인인 관객이 그걸 보고 남긴 집착적인 후기를 보고 느껴지는 두려움과 닮은 감정. 인조 가죽과 인조 보석들, 쇼를 위한 조명과 클럽 스탬프, 내 몸과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이 손에 쥐여주는 지폐와 무한 제공되는 술. 이 모든 것이 좋았다.

퍼포머로 불려갈 때마다 퀴어 커뮤니티에 필요한 일원이 되는 느낌이 좋았다. 내가 느끼는 혼란이, 내가 경험하는 정신병들이 ‘쇼’라는 형태로 전환되어 나타나면서 “의미 있다”고 인정받는 것 같았다. 쇼를 하는 순간에는 내가 완전히 내 존재에 대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모든 형태 없는 공포와 혼란 또한 ‘쇼를 위한 것’이라며 나 자신을 다독일 수 있었다. 드랙은 정말 내게 많은 것을 줬구나. 위에서 너무 심하게 욕했던 게 미안해진다. 내가 미래에 다시 드랙을 할지 어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드랙을 그만두더라도 드랙이 알려준 방식대로 계속 시끄럽고 과장된 방식으로 내 정체성을 노출하고 살련다. (코미디 팟캐스트 ‘생방송여자가좋다’ 많이 들어주세요) 그게 내 나름의 생존법인 것 같다.

▲ <셰어가 더 셰어할 수 있도록> 셰어 자립 파티에서 <생방송여자가좋다>의 mc로서 금개, 아장맨이 공연 진행자로 섭외되어 사회를 보는 모습이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1) 생물학적 성별에 기반하여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퍼포먼스에 반대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형태로 표출하는 행위 (출처: “내가 드랙(Drag)을 하는 이유”,https://www.ildaro.com/8310, 일다)

2)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행동, 패션, 역할 등을 가져와 연기에 활용하여 젠더 수행의 놀이적이고 연극적인 특성을 폭로하는 퍼포머

3) 지정성별(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

4) 브런치를 먹으며 드랙쇼를 보는 이벤트. 주로 해방촌 인근에서 많이 열린다.

5) 드랙 퍼포머는 퍼포머의 신체적 특성을 숨기기 위해 립싱크(lip sync)를 공연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목소리를 숨기면 무대 위에서 특정 성별로 패싱되기가 쉬워진다.

6) femme(여성)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실제 성별 이분법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이란 개념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듯…? 스펙트럼 양 끝에 부치(butch)와 팸이 있다고 생각하면 쉽다. 팸의 반대 개념으로서 스펙트럼의 끝에 있는 스톤 부치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가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는 시대에도 연초를 태운다. 스펙트럼의 끝에 있는 팸은…장식적이고…아, 아닌가? 잘못 설명했다간 여성혐오로 읽혀질까봐 말하지 못하겠다. 시스젠더 이성 연애와 달리 성별만으로는 상대에게 어필 포인트가 되지 않는 레즈비언 연애 시장 속에서 본인을 효율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7) butch(남자다운, 거친)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대표적으로 드라마 ‘오렌지이즈더뉴블랙’에 등장하는 캐릭터 빅부, 영화 ‘빌로우허마우스’에 등장하는 달라스 등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쉬워질 듯.

 

 

 

아장맨

❚ ‘아장맨’이라는 이름으로 퀴어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있다. 드랙킹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시스젠더 게이 클럽 문화 밖의 드랙 문화를 가시화하기 위해 ‘드랙킹콘테스트’, 티 나는 부치를 가시화시키고 애정을 드러내는 기획 ‘티부사진감상회’, 팟캐스트 〈생방송여자가좋다〉 등을 동료들과 함께 기획하고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