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02
내 몸에 새겨진 ‘혼혈’

국적을 부여받을 수 없는 몸
1986년 여름, 나는 필리핀 국적의 아버지와 한국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은 1948년에 제정된 부계혈통주의를 기본원칙으로 둔 최초의 국적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다. 1997년이 되어서야 부모양계혈통주의가 채택되면서 국적법은 전면 개정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조건 하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했으나 그 조차도 1988년 5월 4일 출생자부터 해당되었다. 국적법이 개정된 이후에도 나는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다.
1990년대 이주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의 경우 혼인부터 친자관계까지 한국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었고, 결혼함과 ‘동시에’ 이주여성은 자동으로 국적도 취득할 수 있었다. 1997년 국적법 개정이 되며 이주여성의 자동국적 부여는 결혼 ‘2년 후’ 국적취득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변경된다. 그러나 이주여성에게 쉽게 주어진 시민권은 이주남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주남성의 자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할 자격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순수’ 한국인의 혈통을 가진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남성과 결혼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국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내쳐지게 되었다. 여성호주(戶主)가 되었지만, 이주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처럼 가족에 대한 권리를 동등하게 갖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고, 한국에서 살았지만 아무런 법적 보호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한국의 주민등록등본에 오를 수 없었고 한국인 어머니의 자녀임에도 나는 한국에 기록될 수 없었다. 우리는 가족을 구성하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한국은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아 3개월마다 외국에 나가서 비자를 받고 재입국을 해야 했다. 어머니에게 여성호주(戶主)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와 결혼했음을 증명할 뿐 다른 권리는 없었다. 3개월마다 출국하고 재입국을 반복해야하는 불안정한 체류자격으로 인해 아버지가 정기적인 일자리를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혼 후 2년 이상을 거주’라는 국적 취득 기회는 안정적으로 체류하고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사회는 이주남성의 노동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기본적인 생계유지조차 보장하지 않았고 이는 가정의 경제적인 빈곤으로 이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몸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내가 앞으로 어떠한 차별을 겪게 될지 몰라 경기도 양주 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결정한다. 그러나 3개월마다 외국을 다녀와야 하는 아버지와 가정의 경제적인 빈곤은 한국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또 다시 필리핀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나는 4살 때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우리 가족은 3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는 운 좋게 필리핀 대사관에 취직하며 장기적으로 한국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시스템 안에서 다른 ‘인종’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은 가족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학교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육청을 찾아갔고 교육청에서는 나의 입학가능 여부가 학교 재량이라 대답했다. 어머니는 교육청의 답변이 담긴 공문을 들고 초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을 직접 만나 내가 입학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했다. 어머니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전 학년이 한 반 뿐이었던 작은 시골 학교였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교장선생님은 나의 입학을 허락했다.
나는 필리핀 사람으로 학교를 다니고 생활하며 지냈다. 국내 체류하는 필리핀 국적의 이주민이었다. 이제는 6개월 이상 체류한 외국인·재외국민의 경우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 가입이 당연히 되지만, 당시에는 가입할 수 없었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비자를 연장하며 체류만 할 수 있었을 뿐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내 친구에게 건강보험 카드를 빌려오라고 말씀하셨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몸이 되었다.
‘뿌리’를 숨겨야 하는 몸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차별을 덜 경험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 초등학교 시절 인종이나 피부색에 의한 차별 경험은 많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21명으로 구성된 한 반 뿐이었고 21명의 친구와 6년을 함께 했다. 보호자들도 서로 잘 알았고 나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차별 경험은 아버지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주변인으로부터 받은 시선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아버지를 불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나의 귀를 스스로 닫는 훈련을 했다.
어느덧 나는 무탈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은 시골 마을로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시내로 나가야 했다. 한 반 뿐이었던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에는 정말 많은 학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첫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가족생활 조사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라고 했다. 그런데 보호자의 이름을 적는 칸이 한글로 세 글자만 쓸 수 있도록 매우 작았다. 당시 아버지는 귀화 전으로 매우 긴 이름을 갖고 계셨다. 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아버지의 이름을 두 줄로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반 친구들이 볼 수 없게 다른 친구들의 조사서 가장 아래에 넣어 제출했다. 필리핀 출신의 아버지를 숨기기 시작한 것이 그 작은 네모 칸에서 시작했다.
인종과 피부색이라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차별받기가 너무나도 쉽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당당해지거나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숨기게 되었다. 지금 30대인 내가 여전히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아버지를 숨겼다는 것과 필리핀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더라도’ 나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세워야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국적으로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식당에서, 길거리에서, 가게에서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국말 잘하시네요” “다문화같이 안 생겼어요”라는 말은 가벼운 날씨 인사말처럼 자주 들었다. 심지어 주변인들이 추측하는 나의 출신 국가는 필리핀뿐만이 아니라 인도, 중국, 파키스탄 등 나를 세계인으로 보았다. 이렇듯 다른 피부색으로 인한 일상에서의 미세차별은 늘 있었지만 심각하게 물리적인 폭력까지 경험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순수’ 혈통 중심의 시민성과 정상성이라는 이념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고 이는 실제로 제도적인 차별로 이어졌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쌓여온 미세차별과 제도적 차별 속에서 겪어온 무시와 배제, 거부에 이미 익숙해졌다.
혼혈여성의 몸
마침내 2003년 나는 주민등록등본에 오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류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안정적인 가정생활과 생계유지를 위해 결국 귀화를 선택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귀화하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기에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지만, 그 결과 나는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려 했던 한국 사회의 ‘국민’이 된 것이다. 법 테두리 안에 들어가며 법적 보호와 정치적 혜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류상의 기록일 뿐 나의 몸과 피부색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필리핀 이주민’ 그리고 나는 ‘혼혈여성’이었다.
한국사회의 인종주의는 ‘인종’처럼 존재하지 않는 ‘혼혈’이라는 허상이 나타났을 때부터 존재한 것이라 생각한다. 혼혈이 ‘피부색’의 문제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피부색보다는 ‘혈통’ 중심주의에서 시작되며 인종적 배타성이 드러난다. 매년 3월 21일 세계인종차별철폐의 날에 혼혈인 나는 저항의 의미로 헌혈을 한다. 한국 사회의 부계를 중심으로 순수 혈통이 유지되는 방식에서 혼혈여성에 대한 배제가 존재해왔다. 분명한 인종주의적인 문제였으나 그동안 혼혈‘아’로 불린 이들은 없는 존재로 가시화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문제는 ‘다문화 이주 아동’ ‘무슬림 난민 아동’ 등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인종 그리고 피부색을 가진 한 가족이 제도적 차별에 맞서 대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노력해왔듯, 일상에서 인종주의를 경험하며 자란 나는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며 저항해왔다. 정체성에 대한 나의 혼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을 벗어나 필리핀으로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나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매우 소박한 하나의 진실. 국적, 인종, 피부색 등 모든 것을 떠나 나는 한낱 지구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를 깨닫기까지 성찰과 갈등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원고지 18매가 필요하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30년 전, 한국인의 몸이었지만 젠더, 인종, 계급 등으로 인해 다른 몸으로 분류되고 배제당한 어머니가 계셨다. 그녀는 누구보다 용기 있게 저항하며 살아왔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나 또한 30년이 지난 지금, 인종과 피부색 그리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배제당하는 다른 몸들과 연대하며 나만의 저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강슬기
❚이주민센터 의정부EXODUS 활동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대학교를 마쳤다. 그 뒤에 나 자신이 이주노동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했고, 지금은 한국에서 이주민,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에게 ‘이주’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02
내 몸에 새겨진 ‘혼혈’
국적을 부여받을 수 없는 몸
1986년 여름, 나는 필리핀 국적의 아버지와 한국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은 1948년에 제정된 부계혈통주의를 기본원칙으로 둔 최초의 국적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다. 1997년이 되어서야 부모양계혈통주의가 채택되면서 국적법은 전면 개정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조건 하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했으나 그 조차도 1988년 5월 4일 출생자부터 해당되었다. 국적법이 개정된 이후에도 나는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다.
1990년대 이주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의 경우 혼인부터 친자관계까지 한국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었고, 결혼함과 ‘동시에’ 이주여성은 자동으로 국적도 취득할 수 있었다. 1997년 국적법 개정이 되며 이주여성의 자동국적 부여는 결혼 ‘2년 후’ 국적취득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변경된다. 그러나 이주여성에게 쉽게 주어진 시민권은 이주남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주남성의 자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할 자격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순수’ 한국인의 혈통을 가진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남성과 결혼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국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내쳐지게 되었다. 여성호주(戶主)가 되었지만, 이주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처럼 가족에 대한 권리를 동등하게 갖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고, 한국에서 살았지만 아무런 법적 보호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한국의 주민등록등본에 오를 수 없었고 한국인 어머니의 자녀임에도 나는 한국에 기록될 수 없었다. 우리는 가족을 구성하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한국은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아 3개월마다 외국에 나가서 비자를 받고 재입국을 해야 했다. 어머니에게 여성호주(戶主)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와 결혼했음을 증명할 뿐 다른 권리는 없었다. 3개월마다 출국하고 재입국을 반복해야하는 불안정한 체류자격으로 인해 아버지가 정기적인 일자리를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혼 후 2년 이상을 거주’라는 국적 취득 기회는 안정적으로 체류하고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사회는 이주남성의 노동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기본적인 생계유지조차 보장하지 않았고 이는 가정의 경제적인 빈곤으로 이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몸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내가 앞으로 어떠한 차별을 겪게 될지 몰라 경기도 양주 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결정한다. 그러나 3개월마다 외국을 다녀와야 하는 아버지와 가정의 경제적인 빈곤은 한국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또 다시 필리핀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나는 4살 때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우리 가족은 3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는 운 좋게 필리핀 대사관에 취직하며 장기적으로 한국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시스템 안에서 다른 ‘인종’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은 가족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학교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육청을 찾아갔고 교육청에서는 나의 입학가능 여부가 학교 재량이라 대답했다. 어머니는 교육청의 답변이 담긴 공문을 들고 초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을 직접 만나 내가 입학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했다. 어머니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전 학년이 한 반 뿐이었던 작은 시골 학교였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교장선생님은 나의 입학을 허락했다.
나는 필리핀 사람으로 학교를 다니고 생활하며 지냈다. 국내 체류하는 필리핀 국적의 이주민이었다. 이제는 6개월 이상 체류한 외국인·재외국민의 경우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 가입이 당연히 되지만, 당시에는 가입할 수 없었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비자를 연장하며 체류만 할 수 있었을 뿐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내 친구에게 건강보험 카드를 빌려오라고 말씀하셨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몸이 되었다.
‘뿌리’를 숨겨야 하는 몸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차별을 덜 경험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 초등학교 시절 인종이나 피부색에 의한 차별 경험은 많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21명으로 구성된 한 반 뿐이었고 21명의 친구와 6년을 함께 했다. 보호자들도 서로 잘 알았고 나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차별 경험은 아버지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주변인으로부터 받은 시선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아버지를 불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나의 귀를 스스로 닫는 훈련을 했다.
어느덧 나는 무탈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은 시골 마을로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시내로 나가야 했다. 한 반 뿐이었던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에는 정말 많은 학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첫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가족생활 조사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라고 했다. 그런데 보호자의 이름을 적는 칸이 한글로 세 글자만 쓸 수 있도록 매우 작았다. 당시 아버지는 귀화 전으로 매우 긴 이름을 갖고 계셨다. 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아버지의 이름을 두 줄로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반 친구들이 볼 수 없게 다른 친구들의 조사서 가장 아래에 넣어 제출했다. 필리핀 출신의 아버지를 숨기기 시작한 것이 그 작은 네모 칸에서 시작했다.
인종과 피부색이라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차별받기가 너무나도 쉽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당당해지거나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숨기게 되었다. 지금 30대인 내가 여전히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아버지를 숨겼다는 것과 필리핀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더라도’ 나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세워야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국적으로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식당에서, 길거리에서, 가게에서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국말 잘하시네요” “다문화같이 안 생겼어요”라는 말은 가벼운 날씨 인사말처럼 자주 들었다. 심지어 주변인들이 추측하는 나의 출신 국가는 필리핀뿐만이 아니라 인도, 중국, 파키스탄 등 나를 세계인으로 보았다. 이렇듯 다른 피부색으로 인한 일상에서의 미세차별은 늘 있었지만 심각하게 물리적인 폭력까지 경험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순수’ 혈통 중심의 시민성과 정상성이라는 이념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고 이는 실제로 제도적인 차별로 이어졌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쌓여온 미세차별과 제도적 차별 속에서 겪어온 무시와 배제, 거부에 이미 익숙해졌다.
혼혈여성의 몸
마침내 2003년 나는 주민등록등본에 오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류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안정적인 가정생활과 생계유지를 위해 결국 귀화를 선택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귀화하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기에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지만, 그 결과 나는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려 했던 한국 사회의 ‘국민’이 된 것이다. 법 테두리 안에 들어가며 법적 보호와 정치적 혜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류상의 기록일 뿐 나의 몸과 피부색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필리핀 이주민’ 그리고 나는 ‘혼혈여성’이었다.
한국사회의 인종주의는 ‘인종’처럼 존재하지 않는 ‘혼혈’이라는 허상이 나타났을 때부터 존재한 것이라 생각한다. 혼혈이 ‘피부색’의 문제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피부색보다는 ‘혈통’ 중심주의에서 시작되며 인종적 배타성이 드러난다. 매년 3월 21일 세계인종차별철폐의 날에 혼혈인 나는 저항의 의미로 헌혈을 한다. 한국 사회의 부계를 중심으로 순수 혈통이 유지되는 방식에서 혼혈여성에 대한 배제가 존재해왔다. 분명한 인종주의적인 문제였으나 그동안 혼혈‘아’로 불린 이들은 없는 존재로 가시화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문제는 ‘다문화 이주 아동’ ‘무슬림 난민 아동’ 등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인종 그리고 피부색을 가진 한 가족이 제도적 차별에 맞서 대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노력해왔듯, 일상에서 인종주의를 경험하며 자란 나는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며 저항해왔다. 정체성에 대한 나의 혼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을 벗어나 필리핀으로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나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매우 소박한 하나의 진실. 국적, 인종, 피부색 등 모든 것을 떠나 나는 한낱 지구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를 깨닫기까지 성찰과 갈등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원고지 18매가 필요하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30년 전, 한국인의 몸이었지만 젠더, 인종, 계급 등으로 인해 다른 몸으로 분류되고 배제당한 어머니가 계셨다. 그녀는 누구보다 용기 있게 저항하며 살아왔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나 또한 30년이 지난 지금, 인종과 피부색 그리고 혼혈이라는 이유로 배제당하는 다른 몸들과 연대하며 나만의 저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강슬기
❚이주민센터 의정부EXODUS 활동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대학교를 마쳤다. 그 뒤에 나 자신이 이주노동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했고, 지금은 한국에서 이주민,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에게 ‘이주’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