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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1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활동가 다이어리_페미니스트가 한드를 보는 법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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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가 다이어리 

 

페미니스트가 한드를 보는 법


 

나의 드라마 사랑이 시작된 것은 2006년,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몰래 하면 더 재밌던 초등학생 시절이다. 엄마의 방어를 뚫고 몰래 〈궁〉을 봤다. 2009년 겨울엔 세기의 드라마 〈꽃보다 남자〉 본방송을 보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밤 10시까지 깨어있었고, 2010년 겨울엔 여행을 가서도 〈시크릿가든〉을 보겠다며 숙소에 눌러앉아 있었다.

 

“텔레비전 그만 보고 공부해야하지 않겠니?”라는 잔소리(?)에 “나는 나중에 PD될 거니깐 이것저것 많이 볼 거야!”라고 대답하던 중학생은 커서 PD가 되진 않았지만 여전히 이것저것 많이 보는 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가 되었다. TV에서 예능과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비롯한 각종 OTT1)도 많이 이용하지만, 특히 TV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다. 현실과 닮은 듯 아닌 듯 만들어진 세계가 재밌어서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지금까지 본 드라마 리스트를 작성해보니 최근 5년간 꾸준히 해마다 10개 내외의 드라마를 봤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특히 몇몇 드라마는 대사를 달달 외울 때까지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돌려보았다. ‘분명 난 안 바쁜데 왜 시간이 없지?’라는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페미니스트가 이 드라마를 좋아해도 될까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JTBC 〈뷰티인사이드〉 '한세계', 〈멜로가 체질〉 '임진주',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배타미', KBS 〈동백꽃 필 무렵〉 '동백', SBS 〈원 더 우먼〉 '조연주' * 출처: JTBC, tvN, KBS, SBS

이미지 설명: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JTBC 〈뷰티인사이드〉 '한세계', 〈멜로가 체질〉 '임진주',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배타미',

KBS 〈동백꽃 필 무렵〉 '동백', SBS 〈원 더 우먼〉 '조연주' * 출처: JTBC, tvN, KBS, SBS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한국 드라마엔 대충 95%의 확률로 로맨스가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일종의 ‘로맨스 공식’이 있는데 맘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실수하는 여자 주인공과 이를 나무라다 어느새 사랑에 빠지는 남자 주인공, 위기에 빠지는(주로 밤길에 괴한에게 쫓기거나 습격 당함) 여자 주인공과 위기로부터 그녀를 구해주는 남자 주인공. 의사도 연애하고 경찰도 연애하고 직장인도 연애하고, 모두가 연애하는 ‘기승전연애’ 스토리에 주인공 커플은 마지막 화에 결혼 또는 프러포즈로 해피엔딩.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이렇게 이성애가 듬뿍, 여성혐오가 곳곳에 들어간 한국 드라마를 볼 때 가끔 죄책감 또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 역시 한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게 된다. ‘나 페미니스트인데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에 몰입해도 되나?’, ‘이 사이다 전개 좀 ‘여적여’ 같은데... 근데 왜 재밌지?‘, ’서사를 너무 남자캐릭터한테만 몰아준 거 아냐? 아니 근데 슬프긴 슬프다.‘ 

 

이토록 문제 많은 드라마를 사랑하는 나의 혼란스런 마음을 1박2일 동안 읊을 수도 있건만, 그럼에도 나는 한국 드라마를 잃을 수 없었다. 학창시절 남들 다 읽는다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등장인물 이름이 낯설고 길어서 (그래서 누가 누군지 기억도 못하고 몰입도 못해서) 읽기를 포기한 나는 “헤이 톰~ 하이 메리!” 하는 외국 드라마보다 “동백씨!”, “용식씨!” 하는 한국 드라마가 좋다. 한국 문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관 속에서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는 항상 궁금했다. 

 

 

“한국 드라마 다 비슷하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왜 〈뷰티인사이드〉의 ‘한세계’에, 〈멜로가 체질〉의 ‘임진주’에,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배타미’에,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에, 〈원 더 우먼〉의 ‘조연주’에 몰입했을까. 그녀들이 겪는 위기와 어려움에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이 겪는 상황은 어찌 보면 판타지 같지만 사실은 현실을 닮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 캐릭터들은 그 상황을 고민하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 남일 같지 않아 응원할 수 밖에 없다.

 

‘한세계’는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이지만 동료 남자배우에게 ‘꽃’ 취급을 받고, 드라마 보조 작가인 ‘임진주’는 법적인 ‘노동자’가 아니라서 ‘퇴근’이라는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 결혼을 원하지 않는 ‘배타미’는 결혼을 꿈꾸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동백이’는 연쇄살인범 ‘까불이’ 때문에 밤길을 두려워한다. ‘조연주’는 사고로 기억을 잃고 깨어나보니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데 남편은 “당신이 참아”라고만 한다. 

 

이 여성 캐릭터들은 위기와 어려움들을 정면 돌파하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한다. ‘한세계’는 무례한 남자배우에게 “부러우시면 이 배우님이 ‘꽃 (역할)’을 하시지. 별 거 아니야. 빵긋빵긋 웃으면서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돼”라며 한방 먹인다. 꿈꾸던 대로 메인 작가가 된 ‘임진주’는 자신만의 출퇴근 룰을 만들어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의 경계를 만든다. ‘배타미’는 “사랑하는 사이가 결혼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라는 남자친구의 말에 "사랑하는 사이가 결혼을 안 하는 건 이상하고? 이상한 선택이란 없어. 우린 그냥 다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이고"라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켜간다. 동네 언니들에게 힘을 얻은 ‘동백이’는 직접 ‘까불이’를 때려(?)잡는다. ‘조연주’는 조용히 하라며 소리치는 시아버지에게 “언성 높은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왜 갑자기 소릴 질러! 아이구 깜짝이야!”라며 더 큰 목소리로 웃기게 받아친다. 

 

이렇듯 드라마 속 여성들은 위기와 어려움 앞에서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가 된다. 애써 남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떠냐”며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며, 자신을 지키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구구절절 쓰다 보니 ‘너무 작은 것에 의미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작은 마음이 들지만, 사람 좋은데 이유 없듯이 캐릭터 좋은데도 대단히 대단한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드라마 봤어? 어때?”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한국 드라마 다 비슷하지, 뭐”라고 그만 말하고 싶다. “여주 최고야! 말도 안 돼! 너무 재밌어! 야, 무조건 봐. 그냥 봐”라고 자주자주 말하고 싶다. 


 

보라(박지수)

❚ 여는 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막 살 거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사는 페미니스트. 로맨스 드라마 과몰입러로서 한 남성배우를 굉장히 애정하다가 최근 실체를 알고 화난 상태를 이겨내는 중

 


 1)  OTT란 Over The Top으로 넷플릭스, 왓챠, 티빙, 웨이브, 디즈니플러스 등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플랫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