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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3_하반기_함께가는 여성] 기획_노키즈존, 이미 뿌리내려버린 차별에 대해

2024-01-09
조회수 1592

[2023_하반기_함께가는 여성] 기획

 

 

키즈존,

이미 뿌리내려버린차별에 대해

 

 

둠코/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지음은 청소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인권운동을 펼쳐갑니다.

청소년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고나서' 인권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시민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좋은 어른이 많은 세상이 아니라 나쁜 어른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한국에 ‘노키즈존’이 등장한 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노키즈존을 둘러싼 논쟁 역시 끊이지 않지만, 좋든 싫든 한국 사회의 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이 글에서 언급할 노키즈존은 법률로 아동‧청소년의 출입 및 고용을 제한하는 경우가 아닌, 사업주 개인의 판단에 따라 일정 연령 이하의 아동‧청소년 및 동반자의 입장이 제한되는 공간이다. 법적으로는, 개인의 사업장에서 특정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거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불법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이, 성별, 종교, 외모,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출신 지역, 직업 등을 이유로 개인 사업장에 출입을 제한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차별이라 말해야 한다. 노키즈존은, 아동‧청소년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다.

 

 

누군가를 배제해야 얻을 수 있는 편안함

 

노키즈존으로 운영되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쾌적해서 일부러 노키즈존인 가게를 찾아간다는 사례, 식당이나 카페를 이용하다가 아동 동반 테이블이 소란하고 산만해서 불편했다는 사례 등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뉴스의 댓글에서 매우 흔히 접할 수 있다. 내 돈을 내고 가게의 서비스와 분위기 등을 누리는데, 그것을 다른 고객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식의 사고다.

 

하지만 가게에서 비청소년*간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아동이 아닌 연령대의 무리가 유독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피울 때는 속으로 불평하거나 눈을 흘길지언정, "저런 사람들을 모조리 출입 금지 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장 입장에서도 그런 비청소년 고객들 간의 싸움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개별 고객들을 제지하고 가게에서 나가도록 하는 경우는 있어도, 해당 연령대 고객의 출입 자체를 금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도 아동과 청소년은 경제적으로, 사회 인식적으로도 훨씬 만만하기 때문에 쉽게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소비한 돈의 가치를 온전히 누리겠다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타인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래서 조금 불편하거나 불쾌해도, 서로 양해하거나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아동‧청소년의 거슬리는 행동에는 유독 드러내 놓고 눈에 불을 켜고, 해당 공간에서 존재 자체를 배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동‧청소년이 비청소년보다 아래인 존재인데 ‘감히’ 비청소년들의 평화를 해친다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

비청소년*: 청소년이 아닌 사람. 보통 '성인'이라 부르는 연령대의 사람들

 

 

예스키즈존이 가리는 것들

 

“우리는 아동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아동이 공간에서 불편을 끼칠 때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관리할 의지가 없는 보호자가 오지 말라는 것이다.”라며 노키즈존 대신 ‘노배드패어런츠존’이라 명명하거나,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아동을 단속할 것을 전제로 출입을 허가하는 ‘키즈케어존’ 등 변종도 등장했다. 이 와중에, 아동의 편의를 중시하여 설계된 매장 혹은 아동을 환영하는 매장인 예스키즈존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아동을 환영하는 공간’ 또한 뭔가 석연치 않다. 노키즈존을 둘러싼 논쟁에서 많은 이들이 꺼내는 논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키즈 카페나 예스키즈존도 있는데, 왜 노키즈존으로 정해둔 가게에 꾸역꾸역 오려는 것이냐? 받아주는 가게에 가라”는 말은 노키즈존 찬성 의견으로 자주 등장한다. 언뜻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말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는 아동‧청소년이 존재해도 되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이 나뉘어 있다는 인식을 강화함과 동시에, 예스키즈존이 아동의 세계를, 아동을 받아들여 주는 특정한 공간으로 한정되는 효과를 가진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른 특정 구성원들에게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구분 지어 정해주는 것을, 차별이 아닌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가게, 공공시설, 버스의 좌석이나 식기까지도 유색인종 전용 시설과 백인 전용 시설을 나눠 사용하도록 했던 미국의 인종분리정책과 겹쳐 보이기까지 한다. 노키즈존이 공공의 영역에서, 법률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만, 논리만을 가지고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개인의 선택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없는

 

이미 노키즈존이라는 개념과 실체가 정착해 버린 지금, 관련한 논의는 언제나 ‘개인의 선택’이라는 말로 회귀하고 있다. 가게의 인테리어를 망칠 위험성이 높아서, 불이나 계단 경사, 난간 등이 아동에게는 위험해서, 가게의 컨셉과 분위기를 조용하고 차분하게 유지하기 위해, 아동 동반 손님보다 아동을 싫어하는 손님들이 많이 오는 쪽이 영업이익이 높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로 매장을 노키즈존으로 운영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개인의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찬성하는 이는 그 가게를 이용하고, 반대하는 이는 아동과 동반하지 않더라도 이 가게를 이용하지 않는 등 다시 ‘개인의 선택’을 하는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게 된다.

 

‘개인의 소유물’, ‘개인의 재산’, ‘영업이익을 얻기 위한 매장’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강력하다. 자신의 재산권 행사를 위해서 다른 존재를 차별하는 것이 사회문화적으로도 괜찮은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동에게 위험한 환경인 영업장에서, 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아동을 쫓아내면서까지 업주의 자유를 우선해도 되는가? 아동의 출입을 허가하냐, 허가하지 않느냐 이전에, 불특정 다수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장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음식을 판매하는 업종에 위생에 관한 기준선과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것처럼, 사업주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인테리어를 할 수 있는 자유 이전에 사람들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에 대한 기준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아동을, 그리고 다양한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신을 통제하는 데 능숙하고, 위험한 환경에서도 손발을 놀리는 데에 제약이 없고, 스스로 뭐든 할 수 있는 존재만 받아들이는 공간은, 아동 청소년 이외에도 많은 존재들을 밀어내게 된다. 장애가 있거나, 질환이 있거나, 키가 작거나 크거나, 몸이 약한 존재들은 명시적으로는 출입을 거부당하지 않겠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혹자는 개인의 업장이 세금으로 만든 시설도 아니고, 이윤을 위해 운영하는 공간이며 차별 금지라는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노키즈존을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의 사업장이 노동자 권리 보장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 아니어도 근로기준법/각종 고용차별 금지법의 규제를 받듯, 우리는 사회 구성원을 차별하지 않는 원칙을 만들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

 

드레스코드를 지정하는 레스토랑, 외모와 연령 규정을 두어 이른바 ‘뺀찌’를 먹이는 클럽 등을 주로 예시로 새삼 노키즈존이 뭐가 문제냐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우리는 곳곳에서 차별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외모지상주의적이고, 금전 만능주의적이다. 하지만 그런 차별이 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이를 옹호하고 강화해서는 안 된다.

 

외모, 소득, 장애 여부, 직업 등에 따른 차별이 이미 있기에 나이에 따라 아동을 차별해도 좋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차별들을 어떻게 해소할지,함께 논의해야 한다. 차별 하나를 더 얹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며 무시하거나, 차별적 시선을 긍정해서는 안 된다.

 

어리거나, 몸을 놀리는 것이 서투른 존재들,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들 또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이들을 공간에서 지워버리거나, 보호자에게 딸린 존재, 혹은 소유물인 양 보호자가 ‘제대로 단속’해서 거슬리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길 바라서만은 안 된다. 그 대신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