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수달을 떠올리며 작성하는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수달/여는 민우회 성평등복지팀
모두 엔프피인줄 알지만 알고보면 파워 인프피인귀염둥이먹보둥이 허둥지둥이 활동가
사진제공: 활동가 수달.
내가! 조선의 핑꾸 공주다!
8살의 나는 분홍색 샤랄라 드레스를 내내 입는 어린이였다. 핑크 드레스가 놀이터 미끄럼틀에 쓸려 너덜너덜해져서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도 외출을 할 때면 그것 말고 다른 옷은 입지 않았다. 다섯 살 터울 나는 언니는 씩씩했고 장래희망은 대통령이었다. 나는 우아한 핑크 곤쥬로 장래희망은 ‘아가씨’였다. 생각해보니 어릴 땐 공주였는데 커서 아가씨가 되는 수순은 계급의 몰락 아닌가? 예쁜 사람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인생에의 열정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언니와 나를 대하는 친권자인 두 성인의(이하 엄빠) 양육태도가 사뭇 달랐던 것이 내 공주 시절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증거 중 하나가 이름에 쓰인 한자인데 언니의 경우 정치인이나 지도자 될 운명을 담은 한자로 이름을 지은 반면 둘째 딸인 나는 '여자는 예술가가 되어야 부자 남편 만나 사랑받고 산다'고 생각해 예술가스러운(?) 한자로 이름을 지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나를 포함) 주변 예술가는 투잡, 쓰리잡을 뛰며 살고 있는데. 내 통장 잔고가 이 모양인 것은 이름 때문인가!
첫 번째 페미니스트 모먼트, 두둥
엄빠는 대한민국 보수 사람 스펙을 충실하게 갖추었다. 여덟살 어느 새벽, 일찍 일어난 나는 화장실에 가면서 거실에 낮게 깔리는 엄마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언니를 위한 기도 내용은 큰 뜻을 이루는 딸, 신의 큰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고 나를 위한 기도는 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사랑주는 ‘아름다운 여성’이 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여덟 살의 나는 그 기도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나에게 불쾌감과 서러움을 유발했는지 스스로 정확한 언어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생일선물로 받은 분홍색 비밀 일기장을 펼쳐서 그 당시 슬픔과 분노를 나름의 언어로 기록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언니는 왜 큰 사람 되게 해달라고 하고 나는 왜 사랑받는 여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걸까. 언니가 나보다 공부를 잘해서 그런가? 나는 언니보다 공부 못하니까 무시당하는 것 같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 모먼트, 콰쾅
어린시절 나는 문방구에서 이런저런 식물의 씨앗을 사서 키우는 것에 취미가 있었다. 까만 점에서 초록의 생명이 움트는 것이 세상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날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교회에 (끌려)가기 전 내가 키워낸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고 그런 나를 보며 아빠는 “우리 둘째 딸은 역시 천상여자야. 허허허허!” 하면서 웃었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순간에 격렬하던 내 몸의 반응을 잊지 못한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분명한 분노 그리고 역겨움에 전두엽으로 피가 쏠리고 식물에 물을 주던 손이 떨렸다. 나는 식물에 물을 주다 말았다. 하지만 이윽고 식물에 물을 주는 것과 ‘여자’가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잘못된 것은 아빠의 생각과 말이며 나의 친부가 나를 무엇보다 ‘여자’로 양육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실제로 역겨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화장실에 가서 한참 헛구역질을 했다. 이후 나는 급격한 ‘탈공주’의 취향으로 변했다. 엄빠와 세상이 나를 ‘여자’로 만들려는 음모를 일찍 알아채고 내 나름의 저항을 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식물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 핑크색 옷 입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 둘 다 아무 잘못이 없다. 문제는 어린 내가 생존을 위해서는 온전히 의존하고 신뢰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양육자들의 의도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이토록 분명한 페미니스트
이제 난 민우회 만 1년차 활동가이다. 지난 1년 간 올바른 혹은 바람직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살았는지 돌아보자면 사실 그렇지 못해서 찔리는 부분이 많다. 바른 마음, 바른 행동의 반듯한 나의 동료들이 알면* 경악을 금치 못할 상상을 가끔 하고 그런 상상을 구현해낸 콘텐츠를 보면서 은밀하게 즐거워하곤 한다. 페미대장부(?)란 무릇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어야 하는 것 같은데 난 역시 안되는 사람인가? 성평등 인권 활동가로서 자격이 있는 것인가! 자기비판의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쨌거나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로 아니 살기엔 세상의 참혹한 성차별 현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니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 같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난 억울하고 서러운 거 참기 싫고, 내가 아픈 걸 온 세상이 알면 좋겠고, 나보다 센 사람이 힘자랑 하는 건 꼴 보기 싫은데 그런 부조리를 속속들이 제일 정확하게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의 언어인 듯하여 그렇다면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첫 번째, 두 번째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아직도 자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정과 판단이 무엇이었는지 평생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편집팀 주: 모르긴 몰라도 모든 민우회 활동가가 24시간 ‘바른’ 마음, ‘바른’ 행동으로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물론 어딘가 있을 수도…)
어린시절의 수달을 떠올리며 작성하는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수달/여는 민우회 성평등복지팀
모두 엔프피인줄 알지만 알고보면 파워 인프피인귀염둥이먹보둥이 허둥지둥이 활동가
사진제공: 활동가 수달.
내가! 조선의 핑꾸 공주다!
8살의 나는 분홍색 샤랄라 드레스를 내내 입는 어린이였다. 핑크 드레스가 놀이터 미끄럼틀에 쓸려 너덜너덜해져서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도 외출을 할 때면 그것 말고 다른 옷은 입지 않았다. 다섯 살 터울 나는 언니는 씩씩했고 장래희망은 대통령이었다. 나는 우아한 핑크 곤쥬로 장래희망은 ‘아가씨’였다. 생각해보니 어릴 땐 공주였는데 커서 아가씨가 되는 수순은 계급의 몰락 아닌가? 예쁜 사람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인생에의 열정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언니와 나를 대하는 친권자인 두 성인의(이하 엄빠) 양육태도가 사뭇 달랐던 것이 내 공주 시절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증거 중 하나가 이름에 쓰인 한자인데 언니의 경우 정치인이나 지도자 될 운명을 담은 한자로 이름을 지은 반면 둘째 딸인 나는 '여자는 예술가가 되어야 부자 남편 만나 사랑받고 산다'고 생각해 예술가스러운(?) 한자로 이름을 지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나를 포함) 주변 예술가는 투잡, 쓰리잡을 뛰며 살고 있는데. 내 통장 잔고가 이 모양인 것은 이름 때문인가!
첫 번째 페미니스트 모먼트, 두둥
엄빠는 대한민국 보수 사람 스펙을 충실하게 갖추었다. 여덟살 어느 새벽, 일찍 일어난 나는 화장실에 가면서 거실에 낮게 깔리는 엄마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언니를 위한 기도 내용은 큰 뜻을 이루는 딸, 신의 큰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고 나를 위한 기도는 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사랑주는 ‘아름다운 여성’이 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여덟 살의 나는 그 기도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나에게 불쾌감과 서러움을 유발했는지 스스로 정확한 언어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생일선물로 받은 분홍색 비밀 일기장을 펼쳐서 그 당시 슬픔과 분노를 나름의 언어로 기록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언니는 왜 큰 사람 되게 해달라고 하고 나는 왜 사랑받는 여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걸까. 언니가 나보다 공부를 잘해서 그런가? 나는 언니보다 공부 못하니까 무시당하는 것 같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 모먼트, 콰쾅
어린시절 나는 문방구에서 이런저런 식물의 씨앗을 사서 키우는 것에 취미가 있었다. 까만 점에서 초록의 생명이 움트는 것이 세상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날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교회에 (끌려)가기 전 내가 키워낸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고 그런 나를 보며 아빠는 “우리 둘째 딸은 역시 천상여자야. 허허허허!” 하면서 웃었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순간에 격렬하던 내 몸의 반응을 잊지 못한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분명한 분노 그리고 역겨움에 전두엽으로 피가 쏠리고 식물에 물을 주던 손이 떨렸다. 나는 식물에 물을 주다 말았다. 하지만 이윽고 식물에 물을 주는 것과 ‘여자’가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잘못된 것은 아빠의 생각과 말이며 나의 친부가 나를 무엇보다 ‘여자’로 양육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실제로 역겨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화장실에 가서 한참 헛구역질을 했다. 이후 나는 급격한 ‘탈공주’의 취향으로 변했다. 엄빠와 세상이 나를 ‘여자’로 만들려는 음모를 일찍 알아채고 내 나름의 저항을 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식물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 핑크색 옷 입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 둘 다 아무 잘못이 없다. 문제는 어린 내가 생존을 위해서는 온전히 의존하고 신뢰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양육자들의 의도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이토록 분명한 페미니스트
이제 난 민우회 만 1년차 활동가이다. 지난 1년 간 올바른 혹은 바람직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살았는지 돌아보자면 사실 그렇지 못해서 찔리는 부분이 많다. 바른 마음, 바른 행동의 반듯한 나의 동료들이 알면* 경악을 금치 못할 상상을 가끔 하고 그런 상상을 구현해낸 콘텐츠를 보면서 은밀하게 즐거워하곤 한다. 페미대장부(?)란 무릇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어야 하는 것 같은데 난 역시 안되는 사람인가? 성평등 인권 활동가로서 자격이 있는 것인가! 자기비판의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쨌거나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로 아니 살기엔 세상의 참혹한 성차별 현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니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 같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난 억울하고 서러운 거 참기 싫고, 내가 아픈 걸 온 세상이 알면 좋겠고, 나보다 센 사람이 힘자랑 하는 건 꼴 보기 싫은데 그런 부조리를 속속들이 제일 정확하게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의 언어인 듯하여 그렇다면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첫 번째, 두 번째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아직도 자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정과 판단이 무엇이었는지 평생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편집팀 주: 모르긴 몰라도 모든 민우회 활동가가 24시간 ‘바른’ 마음, ‘바른’ 행동으로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물론 어딘가 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