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ing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제이(김진선) |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무리하지 않기가 목표였던 거 같은데. 무리일까요?
헌법재판소 선고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그럴 때면 ‘추측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변화한 시대정신에 발맞추어 위헌이 나올 거라 믿고 있다’고 힘주어 답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만약에 또 ‘합헌’이, 또는 꼼수로 ‘형법 낙태죄는 합헌, 모자보건법상 허용사유 조항만 위헌’이라는 기만적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떠올리기만 해도 분노의 심지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선고 전 날. 다섯 가지 예상 선고결과에 따른 다섯 가지 입장문을 준비했다. 당일 저녁엔 환영 집회 아니면 규탄 집회를 열 예정이었다. 과연 내일 밤 우리는 축하연에 함께하게 될까, 길바닥이나 유치장에 있게 될까 싱숭생숭한 심정을 다잡으며 실무를 챙겼다. 〈#4월11일에_낙태죄는_폐지된다〉, 삽시간에 퍼져나간 해시태그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심정으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민우회는 긴 논의 끝에, 마지노선을 새기는 마음으로, 선고 결과가 어떻든 밀고 나갈 선언으로, 집회 제목과 피켓의 문구를 하나로만 정했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며칠째 과로와 긴장이 범벅돼 수면부족 상태로 맞이한 선고 당일.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활동가들은 아침 7시부터 헌재 앞에 모였다. 9시부터 종일 여덟 건의 각계각층 낙태죄 위헌선고 촉구 기자회견이 연이어 열릴 예정이었다. 선고 직후 나가야 할 입장문 최종안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저녁 집회를 열기 위한 막판 준비도 한창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헌재 앞으로 왔다. 바쁘고, 떨렸다.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 모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온갖 순간이 무한한 주름처럼 한 공간에 저장된 차원을 묘사한 장면이 있다. 선고일 헌재 정문 앞이 꼭 그런 공간이었다. 많은 기억이 폭발적으로 모였다. 열흘 전 햇살과 우박이 한꺼번에 내리치는 기묘한 날씨에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를 외쳤던 집회. 270여 명이 참여한 133일간의 1인 시위. 300여 명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낸 〈형법 제269조 삭제 퍼포먼스〉.
그 넓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집회. 헌재 앞 수차례의 기자회견. 2016년 한국사회 최초로 광장에서 대놓고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검은 시위.’ 〈자, 이제 낙태죄 폐지타임〉 워크샵을 통해 전국 10개 지역에서 만난 또렷한 얼굴과 이야기들. 아르헨티나, 폴란드, 아일랜드– 각국의 임신중지권 쟁취 활동가들과 연대의 깃발을 서로 흔들어 보였던 순간.
이미 너무 길게 나열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임신중지가 독자적 몸들의 이슈임을 가시화한 수백 명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프로젝트 〈Battleground 269〉’. 서로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하며 힘을 얻은 〈달마다 작은이야기모임〉. 당사자 인터뷰, 그리고 ‘천 명의 임신중지에는 천 개의 사연이 있다’는 걸 세상에 드러낸 책 〈있잖아… 나, 낙태했어〉 발간. 상대 남성의 고발로 기소된 여성과 2심 재판까지 함께 분투했지만 결국 낙태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은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심정으로 민우회에 걸었을 전화들. 때론 어떻게 법이 이럴 수 있냐며 분통을 터뜨렸던, 혹은 분노할 만한 일이 맞는지를 질문해 오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병원에, 경찰서에, 법원에 동행했던 활동가들. 수많은 의견서, 성명서, 영화제, 포럼, 토론회…. 그 모든 현장에서 강력한 증언과 선언을 겹겹이 쌓아올려 온 여성들. 이외에도 낙태죄 폐지를 향해 함께 애쓴 변호인들과 의료인들의 행동, 주말마다 보신각에서 열린 임신중지 합법화 시위의 검은 물결, 23만 명의 청와대 청원처럼 다양한 줄기의, 각각의 귀중한 운동들이 있었다. 그 모든 기억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시험일처럼 초조하게 선고를 기다렸다. 물론 성적표를 받을 쪽은 우리가 아니라 헌재였다.
2016년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혜영
2017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여성들이 끝장낸 낙태죄의 시대
66년 전 한국에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임신중지는 처벌받아야 하는 범죄로 규정됐다. 피임도구도 상용화되지 않았던 때부터였다. 여자는 시민이 아니라 어머니였다. 가정과 국가를 위해 아이 낳는 게 당연했고, 낳은 다음 어떻게 길러낼지, 어떻게 피임할지는 (지금보다 더) 공공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이 계속 임신하고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고 또 어떻게든 임신을 중지했다. 다 낳을 순 없었다. 중절수술을 서너 번 이상 받은 경우도 허다했다. 국가가 인구를 줄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섰던 긴 세월 동안은 더했다. 동시에 ‘낙태’는 죄악이고 수치였다. 낙태죄가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아니었다. 여성들이 중절수술을 일곱 번씩 받아도 인구 문제가 없는 한 그것을 ‘사회적’ 문제로 생각지 않는 사회, 그럼에도 개개인의 ‘낙태’ 경험은 의료기록에도 남길 수 없고 가까운 사이에도 말 못하고 숨겨야 했던 사회, 즉 여성의 건강과 존엄한 삶에는 무관심하고 여성 통제를 통한 출산율 통제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가 낙태죄의 존재기반이었다. 낙태죄가 만들어진 50년대나, 적극적으로 묵인된 1970년대나, ‘낙태 고발 정국’으로 가시화된 2010년대나, 우리는 연속된 ‘낙태죄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50여 년의 억압을 뚫고 여성들이 하나 둘 자기 경험을 사회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던 거다. “나는 ‘낙태’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다” “내 몸과 내 삶은 범죄가 아니다”, “국가는 임신중지를 금지할 게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를 기본적 의료로 보장해야 한다” 법과 제도에 여성의 삶과 관점이 완전히 누락돼 있었음을 분명히 증언했다. 그런데도 정부와 의회는 ‘법이 아직 살아 있고’, ‘사회적 인식이 아직’이라며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출산 운운하며 헛발질이었다. 낙태죄로 처벌받은 시민들이 두 차례 위헌소송을 제기하기까지 국정 책임을 위임받은 자들은 손 놓고 있을 때, 여성들이 한국사회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헌재 판단과 상관없이 세상은 이미 변했고,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우리가 그 증거였다. 낙태죄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헌재 선고는 변화한 세상에 발맞춰 갈지, 억지로 과거를 다시 소환할지의 문제였다.
우리 스스로의 힘을 만끽하는 기쁨
2시에 시작한 선고공판에서 낙태죄에 관한 선고는 16번째였다. 공판 생중계 채팅창에는 6천 명이 동시 접속해 ‘낙태죄는 위헌이다’를 쓰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재판정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내 2시 20분쯤, 결정적 한 마디를 전달받았다. ‘헌법불합치’ 선고. 임신중지 처벌법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인데도 눈물이 나고 환호성이 터졌다.
환영 집회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신이 나서 손을 맞잡고 둥글게 돌며 춤을 추었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크게 웃으며 외칠 수 있었다. 물론 당장 낙태죄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과제도 많고 힘들 것이다. 임신중지 처벌법 폐지만이 아니라, 여성의 성과 재생산 전반에 걸친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결과는 분명 큰 한 걸음이자 좋은 출발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헌재 선고보다도 더 큰 것을 얻었다. 옆에 있는 서로를 든든해했던 무수한 순간들을 기억한다. 함께 목소리내고 움직이면 실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걸 믿는다.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를 어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2019년 4월 11일 저녁, 낙태죄 폐지 환영 집회/ⓒ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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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는 여성 2019 상반기 (227호)
‘강간문화’에 대한 무지도 부정도 거부한다
민우ing
싸우는 우리가 이뤄가는 것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일고민상담실에 들어오는 달라진 질문들
모두에게 1인분의 삶을
김기덕이 민우회를 고소했다
가해자는 숨지 말고 링 위로 올라올 것, 추종자들은 들을 것
세상이 페미니스트인 당신을 외롭게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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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ing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제이(김진선) |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무리하지 않기가 목표였던 거 같은데. 무리일까요?
헌법재판소 선고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그럴 때면 ‘추측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변화한 시대정신에 발맞추어 위헌이 나올 거라 믿고 있다’고 힘주어 답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만약에 또 ‘합헌’이, 또는 꼼수로 ‘형법 낙태죄는 합헌, 모자보건법상 허용사유 조항만 위헌’이라는 기만적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떠올리기만 해도 분노의 심지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선고 전 날. 다섯 가지 예상 선고결과에 따른 다섯 가지 입장문을 준비했다. 당일 저녁엔 환영 집회 아니면 규탄 집회를 열 예정이었다. 과연 내일 밤 우리는 축하연에 함께하게 될까, 길바닥이나 유치장에 있게 될까 싱숭생숭한 심정을 다잡으며 실무를 챙겼다. 〈#4월11일에_낙태죄는_폐지된다〉, 삽시간에 퍼져나간 해시태그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심정으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민우회는 긴 논의 끝에, 마지노선을 새기는 마음으로, 선고 결과가 어떻든 밀고 나갈 선언으로, 집회 제목과 피켓의 문구를 하나로만 정했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며칠째 과로와 긴장이 범벅돼 수면부족 상태로 맞이한 선고 당일.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활동가들은 아침 7시부터 헌재 앞에 모였다. 9시부터 종일 여덟 건의 각계각층 낙태죄 위헌선고 촉구 기자회견이 연이어 열릴 예정이었다. 선고 직후 나가야 할 입장문 최종안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저녁 집회를 열기 위한 막판 준비도 한창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헌재 앞으로 왔다. 바쁘고, 떨렸다.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 모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온갖 순간이 무한한 주름처럼 한 공간에 저장된 차원을 묘사한 장면이 있다. 선고일 헌재 정문 앞이 꼭 그런 공간이었다. 많은 기억이 폭발적으로 모였다. 열흘 전 햇살과 우박이 한꺼번에 내리치는 기묘한 날씨에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를 외쳤던 집회. 270여 명이 참여한 133일간의 1인 시위. 300여 명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낸 〈형법 제269조 삭제 퍼포먼스〉.
그 넓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집회. 헌재 앞 수차례의 기자회견. 2016년 한국사회 최초로 광장에서 대놓고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검은 시위.’ 〈자, 이제 낙태죄 폐지타임〉 워크샵을 통해 전국 10개 지역에서 만난 또렷한 얼굴과 이야기들. 아르헨티나, 폴란드, 아일랜드– 각국의 임신중지권 쟁취 활동가들과 연대의 깃발을 서로 흔들어 보였던 순간.
이미 너무 길게 나열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임신중지가 독자적 몸들의 이슈임을 가시화한 수백 명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프로젝트 〈Battleground 269〉’. 서로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하며 힘을 얻은 〈달마다 작은이야기모임〉. 당사자 인터뷰, 그리고 ‘천 명의 임신중지에는 천 개의 사연이 있다’는 걸 세상에 드러낸 책 〈있잖아… 나, 낙태했어〉 발간. 상대 남성의 고발로 기소된 여성과 2심 재판까지 함께 분투했지만 결국 낙태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은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심정으로 민우회에 걸었을 전화들. 때론 어떻게 법이 이럴 수 있냐며 분통을 터뜨렸던, 혹은 분노할 만한 일이 맞는지를 질문해 오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병원에, 경찰서에, 법원에 동행했던 활동가들. 수많은 의견서, 성명서, 영화제, 포럼, 토론회…. 그 모든 현장에서 강력한 증언과 선언을 겹겹이 쌓아올려 온 여성들. 이외에도 낙태죄 폐지를 향해 함께 애쓴 변호인들과 의료인들의 행동, 주말마다 보신각에서 열린 임신중지 합법화 시위의 검은 물결, 23만 명의 청와대 청원처럼 다양한 줄기의, 각각의 귀중한 운동들이 있었다. 그 모든 기억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시험일처럼 초조하게 선고를 기다렸다. 물론 성적표를 받을 쪽은 우리가 아니라 헌재였다.
2016년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혜영
2017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여성들이 끝장낸 낙태죄의 시대
66년 전 한국에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임신중지는 처벌받아야 하는 범죄로 규정됐다. 피임도구도 상용화되지 않았던 때부터였다. 여자는 시민이 아니라 어머니였다. 가정과 국가를 위해 아이 낳는 게 당연했고, 낳은 다음 어떻게 길러낼지, 어떻게 피임할지는 (지금보다 더) 공공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이 계속 임신하고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고 또 어떻게든 임신을 중지했다. 다 낳을 순 없었다. 중절수술을 서너 번 이상 받은 경우도 허다했다. 국가가 인구를 줄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섰던 긴 세월 동안은 더했다. 동시에 ‘낙태’는 죄악이고 수치였다. 낙태죄가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아니었다. 여성들이 중절수술을 일곱 번씩 받아도 인구 문제가 없는 한 그것을 ‘사회적’ 문제로 생각지 않는 사회, 그럼에도 개개인의 ‘낙태’ 경험은 의료기록에도 남길 수 없고 가까운 사이에도 말 못하고 숨겨야 했던 사회, 즉 여성의 건강과 존엄한 삶에는 무관심하고 여성 통제를 통한 출산율 통제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가 낙태죄의 존재기반이었다. 낙태죄가 만들어진 50년대나, 적극적으로 묵인된 1970년대나, ‘낙태 고발 정국’으로 가시화된 2010년대나, 우리는 연속된 ‘낙태죄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50여 년의 억압을 뚫고 여성들이 하나 둘 자기 경험을 사회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던 거다. “나는 ‘낙태’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다” “내 몸과 내 삶은 범죄가 아니다”, “국가는 임신중지를 금지할 게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를 기본적 의료로 보장해야 한다” 법과 제도에 여성의 삶과 관점이 완전히 누락돼 있었음을 분명히 증언했다. 그런데도 정부와 의회는 ‘법이 아직 살아 있고’, ‘사회적 인식이 아직’이라며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출산 운운하며 헛발질이었다. 낙태죄로 처벌받은 시민들이 두 차례 위헌소송을 제기하기까지 국정 책임을 위임받은 자들은 손 놓고 있을 때, 여성들이 한국사회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헌재 판단과 상관없이 세상은 이미 변했고,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우리가 그 증거였다. 낙태죄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헌재 선고는 변화한 세상에 발맞춰 갈지, 억지로 과거를 다시 소환할지의 문제였다.
우리 스스로의 힘을 만끽하는 기쁨
2시에 시작한 선고공판에서 낙태죄에 관한 선고는 16번째였다. 공판 생중계 채팅창에는 6천 명이 동시 접속해 ‘낙태죄는 위헌이다’를 쓰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재판정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내 2시 20분쯤, 결정적 한 마디를 전달받았다. ‘헌법불합치’ 선고. 임신중지 처벌법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인데도 눈물이 나고 환호성이 터졌다.
환영 집회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신이 나서 손을 맞잡고 둥글게 돌며 춤을 추었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크게 웃으며 외칠 수 있었다. 물론 당장 낙태죄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과제도 많고 힘들 것이다. 임신중지 처벌법 폐지만이 아니라, 여성의 성과 재생산 전반에 걸친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결과는 분명 큰 한 걸음이자 좋은 출발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헌재 선고보다도 더 큰 것을 얻었다. 옆에 있는 서로를 든든해했던 무수한 순간들을 기억한다. 함께 목소리내고 움직이면 실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걸 믿는다. 낙태죄 폐지, 새로운 세계,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를 어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2019년 4월 11일 저녁, 낙태죄 폐지 환영 집회/ⓒ혜영
*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각각의 글(텍스트)로 연결됩니다
함께가는 여성 2019 상반기 (227호)
‘강간문화’에 대한 무지도 부정도 거부한다
민우ing
싸우는 우리가 이뤄가는 것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일고민상담실에 들어오는 달라진 질문들
모두에게 1인분의 삶을
김기덕이 민우회를 고소했다
가해자는 숨지 말고 링 위로 올라올 것, 추종자들은 들을 것
세상이 페미니스트인 당신을 외롭게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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