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이야기
빻은 뮤지컬계 속 페미니스트를 위한 안내서
매이(서명숙) | 여는 민우회 회원
30대 후반, 비정규직, 비혼. 언제나 무언가를 덕질하고 있으며 최근 어느 배우와 뮤지컬에 동시 입덕함.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이라는 수식어 답게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는 작품이 있다. 그 유명한 뮤지컬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배경은 사창가다.
여성: 느낌이 다르죠, 주교님?
남성: (거친 호흡) 응~ 달라, 지난 번 아이와는 확실히 달라.
여성: 아주 깜찍한 계집애에요. 크면 대단한 물건이 될 거라니까요. 주교님은 그 첫 손님이 되신 거고요.
대화 속에 등장하는 ‘크면 대단한 물건이 될’ 여성은 내내 훌쩍이며 성직자 옷을 입은 남성의 손을 피해 도망 다닌다. 대사는 비명소리 뿐이다. 이견의 여지없이 미성년자 성폭력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지난 15년 간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린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1막 마지막에 등장한다.
나는 이 어이없는 뮤지컬을 이번 시즌에 이미 여섯 번을 봤다. 내가 ‘덕질’ 중인 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인데 일명 피켓팅(피 튀기는 경쟁률의 티켓 예매)을 뚫고 표를 구한 내게 ‘뮤덕’ 선배들은 미리 주의를 줬다. ‘워낙 낡은 극이라 실망할 수 있다’고. 그런데 막상 보니 배우의 연기와 넘버1)의 수준은 최고였다. 다만 이 극은 낡은 게 아니라 ‘빻은’ 것이었다.
언급한 미성년자 성폭력 씬은 물론 사창가 묘사, 성녀와 창녀 이분법에 갇힌 여성 캐릭터들 등. 극을 보러 갈 때마다 내 안에선 덕질 자아와 페미니스트 자아가 지킬과 하이드처럼 대립했다. 결국 타협한 것이 성폭력 장면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이 통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문제의 장면에 등장하는 주교 역할의 배우가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미성년자 성폭력 씬(본인이 등장해서)을 꼽았으며, 주인공 엠마에 대해 ‘그런 여성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다’고 대답한 것이다. 황당하게도 이 인터뷰는 제작사에서 직접 만들어 올린 콘텐츠였다.
제작사 SNS 계정에는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멘션이 줄줄이 달렸다. 단지 배우 개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어느 뮤지컬 공연장을 가도 여성들이 객석을 채우지만 무대 위에서는 빈번하게 성차별 표현이 등장한다. 여자 주머니 털어 ‘여혐극’을 만드는 뮤지컬계에 대한 환멸은 ‘뮤덕’들 사이에 꽤 넓게 퍼져있다. 그리고 문제의 제작사는 그쪽 방면으론 특히 유명했다.
누군가는 ‘극중 여혐은 원작 문제가 아니라 제작사의 성향이었다’라고 혀를 찼고, 많은 사람들이 미성년자 성폭력 묘사 장면의 축소와 수정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로또에 당첨되면
지킬앤하이드 판권을 사서 아무도 공연 못하도록 처박아두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힌 사람도 있었다.
제작사는 사건이 벌어지고 하루 뒤, 마지막 티켓 예매 오픈 2시간 전에야 해당 콘텐츠를 삭제하고 사과문을 내놨다. 그러나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사과한다’고 했을 뿐 많은 이들이 요구한 배우 하차나 장면 수정에 대해서는 전혀 피드백하지 않았다.
문제가 된 〈지킬앤하이드〉 제작사의 인터뷰 콘텐츠.
과연 빻은 극은 빻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니까
아무리 어여쁜 내 배우라도 그 무대 위에 선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곱 번째 관극 예정이었던 티켓을 양도했다. 표를 취소하지 않고 늘 전석매진인 공연장에 뻐끔한 빈자리 하나 만들 작정도 했지만, 이번에도 현명한 ‘뮤덕’ 선배가 ‘한강물을 한 바가지 푸는 수준’이라며 돈이라도 챙기라고 했다.
행복한 ‘덕후’가 되고 싶던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 즈음 새로운 뮤지컬을 만났다. 극단 걸판의 〈헬렌앤미〉. 헬렌 켈러와 앤 셜리번의 여성 연대 그리고 성장의 서사다. 넘버 가운데 무려 제목이 ‘생리통’인 곡이 있다. 그 단어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던 남성들이 ‘독서와 사색은 배를 차갑게 만들어 생리통이 심해진다’며 그럴 때는 ‘가벼운 집안일을 해보라’고 조언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가 끝나면 그 꼴(!)을 지켜보던 여성이 객석을 향해 말한다. “걱정 마세요, 이건 백 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이에요!” 그리고 관객과 함께 ‘생리통 맨스플레인’을 비웃는다.
〈헬렌앤미〉 뿐 아니라 여성 서사극도 늘고 있고 기존에 남성 배우가 하던 역할을 여성 배우가 하는 ‘젠더프리(gender–free)’ 캐스팅도 드물지 않으니, 정신만 바짝 차리면 보다 나은 ‘덕질’을 할 수도 있겠지. 아, 물론 내가 애정 하는 그 배우가 〈지킬앤하이드〉 이후 다음 작품은 뭘 선택할지 벌써 걱정이긴 하다. 제발….
약 5개월 간 본 뮤지컬 티켓들.
1) 뮤지컬에 들어가는 노래를 말한다.
*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각각의 글(텍스트)로 연결됩니다
함께가는 여성 2019 상반기 (227호)
‘강간문화’에 대한 무지도 부정도 거부한다
모람활짝
나는 민우회원모임 OOO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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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칼럼
중요한 건, 완전한 정답은 없다는 것 – 민우회 특별휴가 개정에 부쳐
활동가다이어리
숨을 비워내니 눈물이 났다
아홉개의 시선
#페미니스트동네친구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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빻은 뮤지컬계 속 페미니스트를 위한 안내서
매이(서명숙) | 여는 민우회 회원
30대 후반, 비정규직, 비혼. 언제나 무언가를 덕질하고 있으며 최근 어느 배우와 뮤지컬에 동시 입덕함.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이라는 수식어 답게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는 작품이 있다. 그 유명한 뮤지컬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배경은 사창가다.
여성: 느낌이 다르죠, 주교님?
남성: (거친 호흡) 응~ 달라, 지난 번 아이와는 확실히 달라.
여성: 아주 깜찍한 계집애에요. 크면 대단한 물건이 될 거라니까요. 주교님은 그 첫 손님이 되신 거고요.
대화 속에 등장하는 ‘크면 대단한 물건이 될’ 여성은 내내 훌쩍이며 성직자 옷을 입은 남성의 손을 피해 도망 다닌다. 대사는 비명소리 뿐이다. 이견의 여지없이 미성년자 성폭력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지난 15년 간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린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1막 마지막에 등장한다.
나는 이 어이없는 뮤지컬을 이번 시즌에 이미 여섯 번을 봤다. 내가 ‘덕질’ 중인 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인데 일명 피켓팅(피 튀기는 경쟁률의 티켓 예매)을 뚫고 표를 구한 내게 ‘뮤덕’ 선배들은 미리 주의를 줬다. ‘워낙 낡은 극이라 실망할 수 있다’고. 그런데 막상 보니 배우의 연기와 넘버1)의 수준은 최고였다. 다만 이 극은 낡은 게 아니라 ‘빻은’ 것이었다.
언급한 미성년자 성폭력 씬은 물론 사창가 묘사, 성녀와 창녀 이분법에 갇힌 여성 캐릭터들 등. 극을 보러 갈 때마다 내 안에선 덕질 자아와 페미니스트 자아가 지킬과 하이드처럼 대립했다. 결국 타협한 것이 성폭력 장면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이 통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문제의 장면에 등장하는 주교 역할의 배우가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미성년자 성폭력 씬(본인이 등장해서)을 꼽았으며, 주인공 엠마에 대해 ‘그런 여성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다’고 대답한 것이다. 황당하게도 이 인터뷰는 제작사에서 직접 만들어 올린 콘텐츠였다.
제작사 SNS 계정에는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멘션이 줄줄이 달렸다. 단지 배우 개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어느 뮤지컬 공연장을 가도 여성들이 객석을 채우지만 무대 위에서는 빈번하게 성차별 표현이 등장한다. 여자 주머니 털어 ‘여혐극’을 만드는 뮤지컬계에 대한 환멸은 ‘뮤덕’들 사이에 꽤 넓게 퍼져있다. 그리고 문제의 제작사는 그쪽 방면으론 특히 유명했다.
누군가는 ‘극중 여혐은 원작 문제가 아니라 제작사의 성향이었다’라고 혀를 찼고, 많은 사람들이 미성년자 성폭력 묘사 장면의 축소와 수정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로또에 당첨되면
지킬앤하이드 판권을 사서 아무도 공연 못하도록 처박아두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힌 사람도 있었다.
제작사는 사건이 벌어지고 하루 뒤, 마지막 티켓 예매 오픈 2시간 전에야 해당 콘텐츠를 삭제하고 사과문을 내놨다. 그러나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사과한다’고 했을 뿐 많은 이들이 요구한 배우 하차나 장면 수정에 대해서는 전혀 피드백하지 않았다.
문제가 된 〈지킬앤하이드〉 제작사의 인터뷰 콘텐츠.
과연 빻은 극은 빻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니까
아무리 어여쁜 내 배우라도 그 무대 위에 선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곱 번째 관극 예정이었던 티켓을 양도했다. 표를 취소하지 않고 늘 전석매진인 공연장에 뻐끔한 빈자리 하나 만들 작정도 했지만, 이번에도 현명한 ‘뮤덕’ 선배가 ‘한강물을 한 바가지 푸는 수준’이라며 돈이라도 챙기라고 했다.
행복한 ‘덕후’가 되고 싶던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 즈음 새로운 뮤지컬을 만났다. 극단 걸판의 〈헬렌앤미〉. 헬렌 켈러와 앤 셜리번의 여성 연대 그리고 성장의 서사다. 넘버 가운데 무려 제목이 ‘생리통’인 곡이 있다. 그 단어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던 남성들이 ‘독서와 사색은 배를 차갑게 만들어 생리통이 심해진다’며 그럴 때는 ‘가벼운 집안일을 해보라’고 조언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가 끝나면 그 꼴(!)을 지켜보던 여성이 객석을 향해 말한다. “걱정 마세요, 이건 백 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이에요!” 그리고 관객과 함께 ‘생리통 맨스플레인’을 비웃는다.
〈헬렌앤미〉 뿐 아니라 여성 서사극도 늘고 있고 기존에 남성 배우가 하던 역할을 여성 배우가 하는 ‘젠더프리(gender–free)’ 캐스팅도 드물지 않으니, 정신만 바짝 차리면 보다 나은 ‘덕질’을 할 수도 있겠지. 아, 물론 내가 애정 하는 그 배우가 〈지킬앤하이드〉 이후 다음 작품은 뭘 선택할지 벌써 걱정이긴 하다. 제발….
약 5개월 간 본 뮤지컬 티켓들.
1) 뮤지컬에 들어가는 노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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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문화’에 대한 무지도 부정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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