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개의 시선
#페미니스트동네친구만들기
서희(이서희) | 인천여성민우회 회원
올해는 영양제를 열심히 챙겨먹는 건강한 봄을 지내고 있어요.
황량했던 지역민 생활에서
오랫동안 떠나있던 인천으로 돌아온 지 몇 개월이 되었을 때,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부모님뿐인 동네의 일상은 생각보다 지루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SNS에서 혹하는 문구를 발견했어요. ‘#페미니스트동네친구만들기’
민우회에서 진행하는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 강의 홍보 문구였습니다. 정말 저 해시태그의 모든 단어가 맘에 들었어요. 마침 민우회 회원가입도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어색하지만 가보자 싶었죠. 인천지부에서는 이현재 선생님이 강의를 진행해주셨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다들 어디 숨어있었나 싶었던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것도, 자리를 안내해주던 활동가 분들도 내심 모든 게 반가웠습니다.
다만세 이후엔 자체적으로 결성된 독서 모임이 있다기에 조심스럽게 참여여부를 밝혔고, 그렇게 조금씩 민우회 인천지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여성민우회 사무실 한 켠에는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었고, 각종 익숙한 피켓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아, 여기선 숨을 쉬겠다 싶은 공간이었어요. 그렇게 독서 소모임 ‘지비’에 참여하면서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책을 읽고 발제자와 함께 토론을 진행했고, 두 시간 남짓한 모임이 끝나면 저녁 겸 술을 먹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정말 황량했던 저의 지역민 생활에 큰 오아시스였어요. 그리고 아마 다들 그랬나 봐요. 활동가 분들도 새로 온 사람들을 한껏 반겨주었고, 다들 꾸준히 출석체크를 늘려갔습니다.
18년 하반기부터 『여성혐오 그 후』(2016)를 시작으로,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2017), 『나는 페미니스트인가』(2018),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2018), 『백래시』(2017), 『더 나은 논쟁을 위한 권리』(2018), 『걸 페미니즘』(2018), 『남자 없는 출생』(2019) 등을 읽고 토론했고, 관심 있는 영화를 함께 보거나 각자 눈여겨보던 강연을 공유하고 같이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소모임이 있는 날이면 관심 있던 분야의 이슈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항상 밤 12시를 넘겨서 헤어졌어요. 어떤 날은 속이 확 풀리는 현명한 답을 얻는 날도 있고, 또 어떤 날은 함께 분노하고, 또 어떤 날은 각자 활동하는 분야에서 서로 지지와 연대를 약속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처음으로 인천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다들 약간의 어색함과 설레는 기분으로 모였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곧 광장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폭행과 혐오발언, 경찰의 방관은 충격적이었고, 그날만큼 ‘우리’가 절실했던 날도 없었습니다. 항상 ‘우리’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날만큼은 같이 소리쳐주는 ‘우리’가 있어서 정말 든든하고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이후에도 소모임 회원들과 광주, 제주지역의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고, 인천지역의 스쿨미투 캠페인이나 집회에서 피켓을 들었습니다. 광화문 등 서울에서 집회가 있는 날에도 어디선가 하나 둘 모여서 함께 구호를 외치며 걸었습니다. 어딘가에 참여하고, 나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부담을 갖고 있던 ‘지역민1’이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무척이나 고무적인 경험들이었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세계를 공유하고 서로 지지하는 사람들
한 동안은 인천이라는 곳에 정붙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임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길 했어요. 이곳에 계속 살았지만 정 붙이기는 어려웠고, 다시 돌아왔지만 낯설기도 하고, 또는 새롭게 이사를 와서 딱히 인천이라는 지역이 이렇게 좋아질 줄은 몰랐다고요. 결혼하지 않을 나, 결혼한 친구들,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 프리랜서라 직장의 인간관계조차도 없고, 무엇보다도 일상에서 비슷한 가치관을 나눌 사람이 없고, 각자의 세계를 공유해 갈 사람이 없다는 것. 내가 이 공간에서 어떻게 발붙이고 살아야할지 가늠할 수 없는 것 같았어요. 지금은 민우회 활동가들을 보면서, 같이 모임을 시작한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삶을 나누고 지지를 요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무척이나 좋아요.
마지막으로, 올해 2회차가 될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도 다 함께 참여해 연대하고 즐길 수 있으면 좋겠고, 인천여성민우회에서 진행 중인 성평등 워크숍도 성공리에 잘 마무리되면 좋겠고요. 기획하고 있는 인천 페미니즘 페스티벌도 무리 없이 잘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올해에도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민우회 독서 소모임 ‘지비’가 되면 좋겠어요.
‘지비’는 2019년 한국여성민우회 총회에서 ‘반짝반짝 활동상’을 받았다.
*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각각의 글(텍스트)로 연결됩니다
함께가는 여성 2019 상반기 (227호)
‘강간문화’에 대한 무지도 부정도 거부한다
모람활짝
나는 민우회원모임 OOO을 원한다!
회원 이야기
빻은 뮤지컬계 속 페미니스트를 위한 안내서
민우칼럼
중요한 건, 완전한 정답은 없다는 것 – 민우회 특별휴가 개정에 부쳐
활동가다이어리
숨을 비워내니 눈물이 났다
아홉개의 시선
#페미니스트동네친구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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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시선
#페미니스트동네친구만들기
서희(이서희) | 인천여성민우회 회원
올해는 영양제를 열심히 챙겨먹는 건강한 봄을 지내고 있어요.
황량했던 지역민 생활에서
오랫동안 떠나있던 인천으로 돌아온 지 몇 개월이 되었을 때,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부모님뿐인 동네의 일상은 생각보다 지루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SNS에서 혹하는 문구를 발견했어요. ‘#페미니스트동네친구만들기’
민우회에서 진행하는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 강의 홍보 문구였습니다. 정말 저 해시태그의 모든 단어가 맘에 들었어요. 마침 민우회 회원가입도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어색하지만 가보자 싶었죠. 인천지부에서는 이현재 선생님이 강의를 진행해주셨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다들 어디 숨어있었나 싶었던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것도, 자리를 안내해주던 활동가 분들도 내심 모든 게 반가웠습니다.
다만세 이후엔 자체적으로 결성된 독서 모임이 있다기에 조심스럽게 참여여부를 밝혔고, 그렇게 조금씩 민우회 인천지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여성민우회 사무실 한 켠에는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었고, 각종 익숙한 피켓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아, 여기선 숨을 쉬겠다 싶은 공간이었어요. 그렇게 독서 소모임 ‘지비’에 참여하면서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책을 읽고 발제자와 함께 토론을 진행했고, 두 시간 남짓한 모임이 끝나면 저녁 겸 술을 먹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정말 황량했던 저의 지역민 생활에 큰 오아시스였어요. 그리고 아마 다들 그랬나 봐요. 활동가 분들도 새로 온 사람들을 한껏 반겨주었고, 다들 꾸준히 출석체크를 늘려갔습니다.
18년 하반기부터 『여성혐오 그 후』(2016)를 시작으로,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2017), 『나는 페미니스트인가』(2018),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2018), 『백래시』(2017), 『더 나은 논쟁을 위한 권리』(2018), 『걸 페미니즘』(2018), 『남자 없는 출생』(2019) 등을 읽고 토론했고, 관심 있는 영화를 함께 보거나 각자 눈여겨보던 강연을 공유하고 같이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소모임이 있는 날이면 관심 있던 분야의 이슈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항상 밤 12시를 넘겨서 헤어졌어요. 어떤 날은 속이 확 풀리는 현명한 답을 얻는 날도 있고, 또 어떤 날은 함께 분노하고, 또 어떤 날은 각자 활동하는 분야에서 서로 지지와 연대를 약속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처음으로 인천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다들 약간의 어색함과 설레는 기분으로 모였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곧 광장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폭행과 혐오발언, 경찰의 방관은 충격적이었고, 그날만큼 ‘우리’가 절실했던 날도 없었습니다. 항상 ‘우리’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날만큼은 같이 소리쳐주는 ‘우리’가 있어서 정말 든든하고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이후에도 소모임 회원들과 광주, 제주지역의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고, 인천지역의 스쿨미투 캠페인이나 집회에서 피켓을 들었습니다. 광화문 등 서울에서 집회가 있는 날에도 어디선가 하나 둘 모여서 함께 구호를 외치며 걸었습니다. 어딘가에 참여하고, 나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부담을 갖고 있던 ‘지역민1’이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무척이나 고무적인 경험들이었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세계를 공유하고 서로 지지하는 사람들
한 동안은 인천이라는 곳에 정붙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임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길 했어요. 이곳에 계속 살았지만 정 붙이기는 어려웠고, 다시 돌아왔지만 낯설기도 하고, 또는 새롭게 이사를 와서 딱히 인천이라는 지역이 이렇게 좋아질 줄은 몰랐다고요. 결혼하지 않을 나, 결혼한 친구들,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 프리랜서라 직장의 인간관계조차도 없고, 무엇보다도 일상에서 비슷한 가치관을 나눌 사람이 없고, 각자의 세계를 공유해 갈 사람이 없다는 것. 내가 이 공간에서 어떻게 발붙이고 살아야할지 가늠할 수 없는 것 같았어요. 지금은 민우회 활동가들을 보면서, 같이 모임을 시작한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삶을 나누고 지지를 요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무척이나 좋아요.
마지막으로, 올해 2회차가 될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도 다 함께 참여해 연대하고 즐길 수 있으면 좋겠고, 인천여성민우회에서 진행 중인 성평등 워크숍도 성공리에 잘 마무리되면 좋겠고요. 기획하고 있는 인천 페미니즘 페스티벌도 무리 없이 잘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올해에도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민우회 독서 소모임 ‘지비’가 되면 좋겠어요.
‘지비’는 2019년 한국여성민우회 총회에서 ‘반짝반짝 활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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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는 여성 2019 상반기 (227호)
‘강간문화’에 대한 무지도 부정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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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우회원모임 OOO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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빻은 뮤지컬계 속 페미니스트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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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완전한 정답은 없다는 것 – 민우회 특별휴가 개정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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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비워내니 눈물이 났다
아홉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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