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회원이야기
효녀네~ 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나는 지금 치매 노인을 돌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4개월 정도다.
2020년 12월, 약 2년간 요양병원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퇴원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할머니는 병원 로비 안에서, 우리는 바깥에서 유리 창문 사이로 답답한 면회를 이어 나간 지 1년 만이었다.
당뇨로 인한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으로 할머니는 점점 인지능력과 일생 생활 능력이 떨어졌었다. 자식들이 모두 분가해 각자 집에서 사는 중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돌봤고, 얼마 안 가 한계에 봉착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고 할머니는 잔 부상이 생겼다. 그 당시에는 요양병원에 가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역병이 돌면서 면회가 제한됐다.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로비가 크고 통유리창이라 그 너머로 얼굴이라도 봤지만 다른 요양병원은 면회가 아예 전면 금지였다.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노인이 많다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면서 삼촌(모친 집안의 유일한 아들)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할머니를 모셔오기로 했다.
어쩌다 간병인이 되어버리고
현재 할머니는 거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보호자가 늘 붙어 있어야 하는 상태다. 하지만 삼촌네 집은 맞벌이에 학생이 2명이다. 주간보호센터에 가려면 할머니를 씻기고, 입혀서, 휠체어에 앉힌 다음, 집 밖으로 나와 차를 태워야 한다. 보호센터의 등원 시간과 하원 시간은 삼촌 내외의 출퇴근 시간과 엇갈렸다. 난감하던 찰나, 식구들은 이 집안 여유 노동력을 떠올렸다. 바로 나.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진지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아침에 가서 할머니를 센터 차량에 모셔드리고, 오후에 차에서 데려와 삼촌 퇴근 시간까지 돌보고 있으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긴 했지만, 출근을 하지 않는 데다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백수가 그 역할을 맡는 건 타당해 보였다. 강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급노동으로 부려먹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가 힘들거나 무리가 될 거 같으면 그만둬도 된다는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정말로’ 거절할 수 있었을까?
내가 하지 않으면 방문 요양 서비스나 방문 간병인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 비용은 나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고 외부인을 지속적으로 집 안에 들여야 한다는 불편함도 발생했을 거다. 시간, 장소, 상황 모두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아도, 내가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도, 우리 식구 모두가 선량해도 압력은 존재했다. 그 압박은 마치 기압처럼 이 사회 전체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이 제안을 ‘좋게’ 거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매우 중요하면서도 타당한 이유와 단호한 의지가 필요했다. 얼렁뚱땅 살고 있는 백수에게 그런 게 있었을 리가. 그렇게 할머니의 임시&보조 간병인은 내가 됐다.
정말 무서운 건 그게 아니었어
처음 제일 걱정했던 건 기저귀 문제였다. 노인의 거대 용변을 내가 차분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겁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똥오줌을 치우는 일은 상상만큼 경악스럽지 않았다. 각종 자질구레한 일도 적응의 문제였다. 익숙해지니 쉽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노동의 강도는 받는 돈과 얼추 맞는 것 같았다.
정말 어려운 건 고립감과 반복 속에서 소모되는 감정이었다.
2월 중순에 할머니의 용태가 나빠져 잠시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집에 오셨을 때였다. 퇴원은 했지만 센터에 하루종일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진 건 아니어서 회복될 때까지 쉬기로 했다. ‘오전 잠깐, 오후 잠깐’이던 내 업무 시간은 ‘하루 온 종일’로 바뀌었다. 시간만 길어졌을 뿐 노동의 강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왜 아이를 낳고 집에서 온종일 육아하는 엄마들이 우울증에 걸리는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와 나, 돌봐야 하는 존재와 단 둘이서 하루 모든 시간을 보내는 건 굉장한 고립감을 줬다. 바깥세상과 차단되어 나를 갈아 넣어야 하는 환경에 선택의 여지 없이 머물러야 하는 현실은 묵직했다. 돌봄 대상을 사랑하고 어쩌고 하는 건 논점을 완전히 흐리는 얘기다. 애정이 있으면 돌봄 중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절대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열흘 만에 벗어났지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단된 공간 속에 고립되어 갉아 먹히고 있을까?
이런 환경 속에서는 사람이 정말 금방 고갈되어 버린다. 쉬거나, 타인에게 잠시 부탁할 수 있거나, 고립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돌봄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다. 스케줄 조절 때문이라도 내 상황을 주변에 알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듣는 소리가 “효녀네~ 착하네~”였다. 글쎄, 내가 효성스러워서 이걸 시작한 걸까. 내가 착해서 이 생활을 지속하는 중인가.
모두 아기였다. 그리고 모두 노인이 된다
인간의 일생 중에 혼자서 스스로를 돌보고 책임질 수 있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걸,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닦으며 매일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타인에게 의지해서 자랐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그 지점이 ‘효’나 ‘착함’의 단위로 얼버무려지지 않길 바란다. 그건 결국 개인의 문제로 종결된다. 누군가를 돌보고 있고 돌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걸 피곤한 와중에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혼자가 아니어야 우리 삶에 필연적인 이 노동을 받아들이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치드
❚ 공기 같은 존재감의 민우회원
다들 대체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사는지 너무 궁금한 사회부적응자, 돌봄노동 4개월 차 초보
[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회원이야기
효녀네~ 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나는 지금 치매 노인을 돌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4개월 정도다.
2020년 12월, 약 2년간 요양병원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퇴원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할머니는 병원 로비 안에서, 우리는 바깥에서 유리 창문 사이로 답답한 면회를 이어 나간 지 1년 만이었다.
당뇨로 인한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으로 할머니는 점점 인지능력과 일생 생활 능력이 떨어졌었다. 자식들이 모두 분가해 각자 집에서 사는 중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돌봤고, 얼마 안 가 한계에 봉착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고 할머니는 잔 부상이 생겼다. 그 당시에는 요양병원에 가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역병이 돌면서 면회가 제한됐다.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로비가 크고 통유리창이라 그 너머로 얼굴이라도 봤지만 다른 요양병원은 면회가 아예 전면 금지였다.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노인이 많다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면서 삼촌(모친 집안의 유일한 아들)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할머니를 모셔오기로 했다.
어쩌다 간병인이 되어버리고
현재 할머니는 거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보호자가 늘 붙어 있어야 하는 상태다. 하지만 삼촌네 집은 맞벌이에 학생이 2명이다. 주간보호센터에 가려면 할머니를 씻기고, 입혀서, 휠체어에 앉힌 다음, 집 밖으로 나와 차를 태워야 한다. 보호센터의 등원 시간과 하원 시간은 삼촌 내외의 출퇴근 시간과 엇갈렸다. 난감하던 찰나, 식구들은 이 집안 여유 노동력을 떠올렸다. 바로 나.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진지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아침에 가서 할머니를 센터 차량에 모셔드리고, 오후에 차에서 데려와 삼촌 퇴근 시간까지 돌보고 있으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긴 했지만, 출근을 하지 않는 데다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백수가 그 역할을 맡는 건 타당해 보였다. 강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급노동으로 부려먹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가 힘들거나 무리가 될 거 같으면 그만둬도 된다는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정말로’ 거절할 수 있었을까?
내가 하지 않으면 방문 요양 서비스나 방문 간병인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 비용은 나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고 외부인을 지속적으로 집 안에 들여야 한다는 불편함도 발생했을 거다. 시간, 장소, 상황 모두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아도, 내가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도, 우리 식구 모두가 선량해도 압력은 존재했다. 그 압박은 마치 기압처럼 이 사회 전체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이 제안을 ‘좋게’ 거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매우 중요하면서도 타당한 이유와 단호한 의지가 필요했다. 얼렁뚱땅 살고 있는 백수에게 그런 게 있었을 리가. 그렇게 할머니의 임시&보조 간병인은 내가 됐다.
정말 무서운 건 그게 아니었어
처음 제일 걱정했던 건 기저귀 문제였다. 노인의 거대 용변을 내가 차분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겁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똥오줌을 치우는 일은 상상만큼 경악스럽지 않았다. 각종 자질구레한 일도 적응의 문제였다. 익숙해지니 쉽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노동의 강도는 받는 돈과 얼추 맞는 것 같았다.
정말 어려운 건 고립감과 반복 속에서 소모되는 감정이었다.
2월 중순에 할머니의 용태가 나빠져 잠시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집에 오셨을 때였다. 퇴원은 했지만 센터에 하루종일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진 건 아니어서 회복될 때까지 쉬기로 했다. ‘오전 잠깐, 오후 잠깐’이던 내 업무 시간은 ‘하루 온 종일’로 바뀌었다. 시간만 길어졌을 뿐 노동의 강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왜 아이를 낳고 집에서 온종일 육아하는 엄마들이 우울증에 걸리는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와 나, 돌봐야 하는 존재와 단 둘이서 하루 모든 시간을 보내는 건 굉장한 고립감을 줬다. 바깥세상과 차단되어 나를 갈아 넣어야 하는 환경에 선택의 여지 없이 머물러야 하는 현실은 묵직했다. 돌봄 대상을 사랑하고 어쩌고 하는 건 논점을 완전히 흐리는 얘기다. 애정이 있으면 돌봄 중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절대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열흘 만에 벗어났지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단된 공간 속에 고립되어 갉아 먹히고 있을까?
이런 환경 속에서는 사람이 정말 금방 고갈되어 버린다. 쉬거나, 타인에게 잠시 부탁할 수 있거나, 고립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돌봄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다. 스케줄 조절 때문이라도 내 상황을 주변에 알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듣는 소리가 “효녀네~ 착하네~”였다. 글쎄, 내가 효성스러워서 이걸 시작한 걸까. 내가 착해서 이 생활을 지속하는 중인가.
모두 아기였다. 그리고 모두 노인이 된다
인간의 일생 중에 혼자서 스스로를 돌보고 책임질 수 있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걸,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닦으며 매일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타인에게 의지해서 자랐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그 지점이 ‘효’나 ‘착함’의 단위로 얼버무려지지 않길 바란다. 그건 결국 개인의 문제로 종결된다. 누군가를 돌보고 있고 돌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걸 피곤한 와중에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혼자가 아니어야 우리 삶에 필연적인 이 노동을 받아들이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치드
❚ 공기 같은 존재감의 민우회원
다들 대체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사는지 너무 궁금한 사회부적응자, 돌봄노동 4개월 차 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