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갖기 전부터
나는 ‘딸’ 아니면 ‘아들’이었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까지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젠더이분법의 세계는 너무 거대해 보였다.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기 전까지
사회가 지정한 성별을 벗어나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올해 봄,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떠나 보냈다.
젠더이분법을 가로질러 자기 자신으로 살기로 선택한
용감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고작 염색체나 성기의 모양 따위로 결정되지 않는 세상,
젠더이분법의 장벽이 무너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숙제가 아닐까.
[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슬픔과 용기에 대해
어느 날 엄마가 예고 없이 나의 집을 찾아왔다. 내가 사는 동네에 우연히 방문한 김에 나에게 연락했지만 내 답장이 없자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 파트너와 살림을 차린 지 오래였다. 엄마는 당신 자식의 집으로 알았던 집에서 다른 사람이 나오자 적잖이 당황했고, 당신이 자식의 사는 곳도 모른다는 사실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뒤늦게 연락이 닿은 엄마는 그 날 반드시 나의 새 집을 방문해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엄마를 황급히 달래어 집 앞 공원에서 만나자고 설득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같이 살던 파트너는 그때부터 집에서 우리의 흔적을 모두 감추고 지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집엔 성인 남자 혼자만 살아온 것처럼 보여야 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엄마와 둘이 앉았다. 엄마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매일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이젠 사는 곳조차 모르네. 내가 이름과 나이 말고 너에 대해 아는 게 뭐니?” “혹시 지금껏 숨기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있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모두 말해줘. 부탁이야.” 엄마의 슬픔이 나에게 옮겨왔다. 엄마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엄마는 어떤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송두리째 숨겨왔다. “엄마, 나는 트랜스젠더야, 나는 남자가 아니야”로 시작되는 끝없을 이야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항상 엄마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길 바라왔다. 이 이야기가 엄마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무서웠다. 결국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엄마, 더이상 숨기는 건 없어. 엄마를 위로했다. 두려움과 슬픔이 내 몸에 켜켜이 쌓인다. 내 일상이 한 꺼풀 거짓말로 아슬아슬 유지되고 있는 듯한 느낌.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수록 내 삶이 위태롭고 좁아지는 듯한 감각.
이미지 설명 : 3월 11일 국방부 앞에서 열린 변희수 하사 추모행사
나는 그간 트랜스젠더로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고 많은 것에 무뎌져 왔다. 상당히 덩치가 큰 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미스젠더링(트랜스젠더·젠더퀴어를 본인이 원하지 않는 젠더로 지칭하는 행위)에 무뎌졌다. 식당에서 내가 목소리를 내면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분이셨네” 하며 터지곤 하는 직원의 웃음에도 익숙하다. 소변을 참는 데는 도가 텄다. 성별 분리 화장실은 어느 쪽이든 불편하다. 학교에서는 다른 과 건물의 장애인화장실을 도둑처럼 들락거렸다. 메이크업을 조금 하거나 치마를 입은 날에는 나의 몸에 날아와 꽂히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섰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성별을 추궁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 양 굴었다. 이 끝없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가끔 커밍아웃을 했고, 대개 침묵했다. 침묵은 그나마 나았다. 관공서·병원 등에서 나의 얼굴과 신분증을 대조하며 “여자예요? 남자예요?” 하며 대답을 요구받을 때, 내 입으로 “남자예요” 라는 말을 해야할 때, 나는 종종 무너지곤 했다.
이런 이야기는 끝도 없다. 나는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프랜차이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는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해본 적이 없다. 기업에 취업을 못할 것이라는 확신, 운좋게 취업하더라도 사람들이 내 성별을 단두대에 올려 끝없이 난도질할 것이란 예감, 여차하면 쫓겨날 것이란 불안은 애초부터 내가 취업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트랜스젠더임이 밝혀져 직장에서 쫓겨나고 이 사회에 있을 자리를 빼앗긴 이들을 자주 생각한다. 고(故) 김기홍 활동가가 그랬고, 고(故) 변희수 하사가 그랬다. 비정규직 음악교사였던 김기홍은 그의 외모와 화장과 옷차림이 ‘공무원의 품위’에 어긋난다며 직장에서 밀려났다. 변희수 하사는 성확정수술을 한 그의 몸이 “고의에 인한 신체 훼손”이자 “심신장애”에 해당한다며 직장인 군대에서 밀려났다. 참고로 성확정수술은 현재 법원이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데 핵심적으로 고려하는 사안이다. 법원은 수술한 몸을 요구하고 군대는 그 몸을 일할 수 없는 심신장애라고 쫓아내니, 그 사이에서 찢겨지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몸이었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고용 및 직장 영역만 보자면, 최근 5년간 구직활동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응답자 중 57.1%가 직장에 지원하는 것을 사전에 포기해본 적이 있다. 구직 활동을 해본 적 있는 이들은 “구직 및 채용 과정에서 외모 등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거나(48.2%)”, “주민등록번호에 제시된 성별과 자신의 성별 표현이 일치하지 않아서(37.0%)”, 혹은 “출신 학교 등을 기재해야 하는 지원 서류를 제출할 때(27.0%)”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 임금노동자 중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직장의 상사와 동료들이 모르고 있는 경우가 81.1%로 대다수였다. 나는 이 숫자들 아래에 흐르는 이야기와 감정을 느껴본다. 자신의 꿈을 미리 포기하는 마음. 삶의 가능성이 계속해서 좁아지는 감각. 자신의 몸을 평가하고 점수 매기는 채용담당자의 눈길을 마주하는 마음.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상적인 긴장과 노력. 그것에 실패할 경우 삶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
다시 마음 속으로 엄마 앞에 선다. 나는 왜 그 때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내 용기가 부족했던 탓일까.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에 대해 개인에게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용기를 뒷받침해줄 사회적인 제도가 없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최근 우리는 용기를 낸 트랜스젠더 개인들에게 어떠한 사회적인 모욕과 제도적인 처벌이 쏟아지는지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트랜스젠더들에게 더 이상 개인적인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잔인한 책임 방기다. 나는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의 삶 역시 존엄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제스쳐라도 보이길 희망한다. 지금까지 트랜스젠더 개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용기와 삶과 죽음에 성실하게 응답하길 바란다.
수엉
❚ 퀴어/트랜스 연구자
트랜스젠더의 일과 삶에 관심있는 학생. 좋아하는 것은 산책과 동물이 나오는 영상
이름을 갖기 전부터
나는 ‘딸’ 아니면 ‘아들’이었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까지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젠더이분법의 세계는 너무 거대해 보였다.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기 전까지
사회가 지정한 성별을 벗어나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올해 봄,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떠나 보냈다.
젠더이분법을 가로질러 자기 자신으로 살기로 선택한
용감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고작 염색체나 성기의 모양 따위로 결정되지 않는 세상,
젠더이분법의 장벽이 무너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숙제가 아닐까.
[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슬픔과 용기에 대해
어느 날 엄마가 예고 없이 나의 집을 찾아왔다. 내가 사는 동네에 우연히 방문한 김에 나에게 연락했지만 내 답장이 없자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 파트너와 살림을 차린 지 오래였다. 엄마는 당신 자식의 집으로 알았던 집에서 다른 사람이 나오자 적잖이 당황했고, 당신이 자식의 사는 곳도 모른다는 사실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뒤늦게 연락이 닿은 엄마는 그 날 반드시 나의 새 집을 방문해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엄마를 황급히 달래어 집 앞 공원에서 만나자고 설득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같이 살던 파트너는 그때부터 집에서 우리의 흔적을 모두 감추고 지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집엔 성인 남자 혼자만 살아온 것처럼 보여야 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엄마와 둘이 앉았다. 엄마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매일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이젠 사는 곳조차 모르네. 내가 이름과 나이 말고 너에 대해 아는 게 뭐니?” “혹시 지금껏 숨기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있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모두 말해줘. 부탁이야.” 엄마의 슬픔이 나에게 옮겨왔다. 엄마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엄마는 어떤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송두리째 숨겨왔다. “엄마, 나는 트랜스젠더야, 나는 남자가 아니야”로 시작되는 끝없을 이야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항상 엄마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길 바라왔다. 이 이야기가 엄마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무서웠다. 결국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엄마, 더이상 숨기는 건 없어. 엄마를 위로했다. 두려움과 슬픔이 내 몸에 켜켜이 쌓인다. 내 일상이 한 꺼풀 거짓말로 아슬아슬 유지되고 있는 듯한 느낌.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수록 내 삶이 위태롭고 좁아지는 듯한 감각.
이미지 설명 : 3월 11일 국방부 앞에서 열린 변희수 하사 추모행사
나는 그간 트랜스젠더로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고 많은 것에 무뎌져 왔다. 상당히 덩치가 큰 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미스젠더링(트랜스젠더·젠더퀴어를 본인이 원하지 않는 젠더로 지칭하는 행위)에 무뎌졌다. 식당에서 내가 목소리를 내면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분이셨네” 하며 터지곤 하는 직원의 웃음에도 익숙하다. 소변을 참는 데는 도가 텄다. 성별 분리 화장실은 어느 쪽이든 불편하다. 학교에서는 다른 과 건물의 장애인화장실을 도둑처럼 들락거렸다. 메이크업을 조금 하거나 치마를 입은 날에는 나의 몸에 날아와 꽂히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섰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성별을 추궁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 양 굴었다. 이 끝없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가끔 커밍아웃을 했고, 대개 침묵했다. 침묵은 그나마 나았다. 관공서·병원 등에서 나의 얼굴과 신분증을 대조하며 “여자예요? 남자예요?” 하며 대답을 요구받을 때, 내 입으로 “남자예요” 라는 말을 해야할 때, 나는 종종 무너지곤 했다.
이런 이야기는 끝도 없다. 나는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프랜차이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는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해본 적이 없다. 기업에 취업을 못할 것이라는 확신, 운좋게 취업하더라도 사람들이 내 성별을 단두대에 올려 끝없이 난도질할 것이란 예감, 여차하면 쫓겨날 것이란 불안은 애초부터 내가 취업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트랜스젠더임이 밝혀져 직장에서 쫓겨나고 이 사회에 있을 자리를 빼앗긴 이들을 자주 생각한다. 고(故) 김기홍 활동가가 그랬고, 고(故) 변희수 하사가 그랬다. 비정규직 음악교사였던 김기홍은 그의 외모와 화장과 옷차림이 ‘공무원의 품위’에 어긋난다며 직장에서 밀려났다. 변희수 하사는 성확정수술을 한 그의 몸이 “고의에 인한 신체 훼손”이자 “심신장애”에 해당한다며 직장인 군대에서 밀려났다. 참고로 성확정수술은 현재 법원이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데 핵심적으로 고려하는 사안이다. 법원은 수술한 몸을 요구하고 군대는 그 몸을 일할 수 없는 심신장애라고 쫓아내니, 그 사이에서 찢겨지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몸이었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고용 및 직장 영역만 보자면, 최근 5년간 구직활동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응답자 중 57.1%가 직장에 지원하는 것을 사전에 포기해본 적이 있다. 구직 활동을 해본 적 있는 이들은 “구직 및 채용 과정에서 외모 등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거나(48.2%)”, “주민등록번호에 제시된 성별과 자신의 성별 표현이 일치하지 않아서(37.0%)”, 혹은 “출신 학교 등을 기재해야 하는 지원 서류를 제출할 때(27.0%)”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 임금노동자 중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직장의 상사와 동료들이 모르고 있는 경우가 81.1%로 대다수였다. 나는 이 숫자들 아래에 흐르는 이야기와 감정을 느껴본다. 자신의 꿈을 미리 포기하는 마음. 삶의 가능성이 계속해서 좁아지는 감각. 자신의 몸을 평가하고 점수 매기는 채용담당자의 눈길을 마주하는 마음.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상적인 긴장과 노력. 그것에 실패할 경우 삶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
다시 마음 속으로 엄마 앞에 선다. 나는 왜 그 때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내 용기가 부족했던 탓일까.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에 대해 개인에게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용기를 뒷받침해줄 사회적인 제도가 없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최근 우리는 용기를 낸 트랜스젠더 개인들에게 어떠한 사회적인 모욕과 제도적인 처벌이 쏟아지는지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트랜스젠더들에게 더 이상 개인적인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잔인한 책임 방기다. 나는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의 삶 역시 존엄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제스쳐라도 보이길 희망한다. 지금까지 트랜스젠더 개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용기와 삶과 죽음에 성실하게 응답하길 바란다.
수엉
❚ 퀴어/트랜스 연구자
트랜스젠더의 일과 삶에 관심있는 학생. 좋아하는 것은 산책과 동물이 나오는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