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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_트랜스젠더 =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다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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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트랜스젠더 =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다

 

트랜스젠더에 관한 영화인 〈대니쉬 걸(톰 후퍼, 2016)〉에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 덴마크의 화가 릴리 엘베가 트랜스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릴리가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점에서 흔히 ‘최초의 트랜스젠더가 성전환하는 영화‘로 요약되기도 한다.

 

1.최초의 트랜스젠더가 / 성전환을 하는 영화

 

아니, 틀렸다. 릴리 엘베는 최초의 트랜스젠더가 아니다. ‘트랜스젠더’와 유사한 개념은 전 세계에 걸쳐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구로 한정하더라도 19세기의 의사 제임스 베리는 남성으로서 생을 살았으나 사후에야 그가 포궁과 질을 가지고 있으며 출산 경험이 있었음이 드러나지 않았던가.

 

또한 ‘성전환’이라는 어휘도 적합하지 않다. 트랜스젠더는 일반적으로 성을 ‘전환’하지 않는다. 내 의사나 정체성과 상관없이 성별을 지정받아 사회와 마찰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죄의식을 이겨내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에 대해 성별을 ‘전환했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성전환 수술’역시 내겐 불쾌한 단어다. 고작 생식기 수술을 한다고 ‘진정한 내 성별로 거듭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내는 것에 그렇게까지 거창한 의미를 달고 싶지 않다. ‘성을 되찾았다’는 표현도 싫다. 나는 항상 나였고, 내 성별은 항상 이것이었다. 트랜스젠더 정체화 이전의 삶을 ‘다른 성별로 살았던 시절’ 따위로 지칭당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맥락에서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를 지칭하는 표현은 ‘트랜스 남성’ 정도가 좋다. 자신의 정체성 표현에 사회가 불합리하게 지정한 성별(F)의 이름이 달라붙는 것은 과하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을 표현하는 어휘를 꾸준히 다듬었다. 미국 수어에서 트랜스젠더는 ‘성전환’을 뜻하는 말로 표현되었다가 ‘자신을 모두 받아들임’이라는 뜻의 수어 표현으로 변화했다. 이제 트랜스젠더는 ‘성별을 바꾼 사람’, ‘무슨 몸에 갇힌 무엇’, ‘몸과 마음의 성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정된 성별을 거부하는 사람’,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떠나는 사람, 그 젠더를 규정하고 억제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가 구성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다.

 

2. “치마를 입고 싶어서 여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

 

이미지 설명: 영화 〈대니쉬 걸〉의 한 장면.       출처: 유니버설 픽쳐스

 

릴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릴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드레스를 몸에 대보고, 화장하는 아내를 부러운 듯 바라본다. 마침내 여자가 ‘되고’ 싶다며 여자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 자, 여기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유구한 인식을 한번 가져와 보자. “치마를 입고 싶어서 여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

 

젠더는 어떻게 학습되는가? 어린 시절부터 양육자, 미디어는 아이에게 젠더를 강요한다. 이 강요란 특정한 기호에 대한 강요를 포함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사고 입으면 여자가 되는지, 어떻게 행동하면 남자가 되는지를 가르친다. 많은 여성이 또래가 화장하는 것을 보고 화장을 시작한다. 일련의 학습 기준이 되는 성별은 어처구니없게도 태어날 당시의 생물학적 지표 따위로 정해진다. 고작 그 하나가 사람의 기호와 행동, 사회적 위치와 직업마저도 제한한다. 모든 것이 농담 같다. 이 농담 속에서, 트랜스젠더는 학습된 젠더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내가 동일시하는 모든 아이들은 바지를 입고 있는데 왜 나는 치마를 입고 있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불일치감을 모르겠다면, 당신이 시스젠더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때부터 인형과 치마를 좋아했다”라는 것은 정말로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특정한 기호를 강요하는 문화에서 젠더가 처음 매겨지는 경험을 한 이들이 자신의 젠더를 기호로 설명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호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당사자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저런 종류의 기술은 결국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임을 인정받기 위해 ‘정상적인 트랜스젠더’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발언일 뿐이지만, 트랜스젠더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맥락을 자른 채 저 발언만으로 트랜스젠더를 가르치려 한다.

 

한편 꾸밈이나 특정한 수행은 ‘특정 성별과 동일시’에서만 오지 않는다. 사실 트랜스젠더가 특정한 수행을 하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더 많다. 트랜스 여성이 왜 목소리에는 성별이 없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여자 목소리’를 내고, 트랜스남성이 어째서 남성스러운 이름으로 개명하냐고? 그러지 않으면 공격받고,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3.트랜스젠더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를 짚는 글이지만, 짧게나마 총평을 해보려 한다. 〈대니쉬 걸〉은 어떤 의미에서 트랜스젠더를 잘 설명해주지 못하는 영화다. 많은 퀴어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는 정체화를 둘러싼 비극 바깥의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정체화 뒤에도 이어진다.

 

나는 트랜스젠더다. 세상이 트랜스젠더를 괴물이라 할 때, ‘나도 괴물인가’ 하는 자기혐오를 이겨내고 나 스스로와 화해한 사람이다. 세상이 내게 쥐여 준 지루한 성별을 때려치운 사람이다. 내 생식기가 어떠하다고 내 행동이 제약되는 꼴을 견디기 싫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았고, 원하는 대로 몸에 칼을 댔고, 그전까지 내 몸을 죽도록 미워하던 것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빚어내고 강요하는 성별 양식이 얼마나 멍청한지 생각하고, 기만했고 가지고 놀았다. 남이 내 성별을 추측하지 못하도록 했다. 무엇을 하면 남자로 보이는지, 무엇을 하면 여자로 보이는지를 공부했고 실천했다. 성별을 둘러싼 금기가 얼마나 얄팍한지를 알았다. 여자가 다리털이 있으면 죽는 줄 아는 사람과 남자가 네일 아트를 받으면 죽는 줄 아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나의 인생에서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은 떼어놓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 전부도 아니다.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내 작은 속성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여성의 삶에서 여성임이 그를 모두 설명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쟁뉴

❚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혐오표현에 지쳐있는 퀴어 페미니스트. 모든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연대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