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젠더 이분법을 깨는 페미니즘 운동을 향해
“저는 논바이너리(Non-Binary: 자신을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 트랜스젠더입니다. 2011년 초기, 임신중절 수술을 했습니다. 생리할 때마다 디스포리아(dysphoria: 자신의 젠더 정체성과 신체의 불일치로 인해 느끼는 이질감)를 느꼈던 저는 임신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큰 혼란을 느꼈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위에 임신 사실을 알리자 ‘이제 너는 여성으로서 완전한 경험을 한 것’이라는 말도 들었으나 아닙니다. 저는 논바이너리입니다. 때문에, 저는 임신중절 수술을 망설임 없이 택했고 그것은 저의 온전한 결정이었습니다…임신중절 수술은 제가 원하는 성별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낙태죄에 대해 전면 반대합니다.”
2017년 9월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진행되었던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출범 퍼포먼스에서 마지막 자유발언에 나선 한 참가자는 지정성별 여성이지만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에게 ‘낙태죄 폐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짧은 발언이었지만 이 안에는 사회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지, 임신과 출산을 ‘여성으로서의 완전한 경험’이자 ‘여성의 역할’로서 전제하는 사회에서 임신중지 처벌이 여성의 범주를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낙태죄 처벌은 임신중지라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장치로서 작동해 왔다. 낙태죄라는 처벌 요건을 유지함으로써 국가는 인구정책의 목적에 따라 임신과 출산이라는 역할을 수행할 몸을 통제해 왔고, 그에 맞는 성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태죄’의 폐지를 요구한다는 것은 처벌을 중단한다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요구되어 온 젠더화 된 몸의 역할과 그 전제를 깨어 나가겠다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트랜스젠더가 여성의 사회적 위치나 안전을 침해한다”거나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 의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난해에는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학생이 입학을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젠더 이분법과 분리, 배제주의는 안전에 대한 문제의식을 협소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도 확장해내기 어렵게 만든다.
앞서 인용한 발언에서처럼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사회의 젠더 이분법이 ‘여성’의 역할을 부여하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페미니즘은 바로 이 ‘여성’의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실천은 트랜스젠더의 분리와 배제를 통해 페미니즘을 ‘생물학적 여성’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트랜스젠더에 대한 서사조차 다시 젠더 이분법 안에 가두는 구조를 더욱 적극적으로 함께 드러내고 바꿔나가는 방향을 통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실천에서의 젠더: 이분법이 아니라 구조를 문제 삼기
이미지 설명: 3월 6일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에워싼 채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고 있다.
젠더가 ‘사회적 성’이라는 것의 의미는 단지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으로 타고난 성별’과는 다른 ‘사회적으로 학습된 성별’의 개념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젠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심은 성별에 대한 이분법적 기준을 통해 불평등한 권력을 강화하는 사회적 구조를 밝히고 이를 바꿔내는 데에 있다. 따라서 젠더가 ‘사회적’이라는 말은 이 권력관계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구조가 사회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실천에서 젠더를 다룬다는 건 단순히 ‘여성문제’만을 다룬다거나 ‘성별에 따른 차별이나 폭력’만을 다룬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일례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gender-based violence)’과 동의어가 아니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의 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더 높은 비율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단지 여성이라는 지정성별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이미 젠더화 된 구조 속에서 여성을 사회적으로 규정짓고 통제하는 방식에 관련된 문제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일련의 폭력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교육·노동·주거·문화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구조적 젠더화의 누적된 모순이 드러나는 결과로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삭제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만 문제를 다룰 경우 대상도 협소해질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책도 피해자 지원이나 신고센터 마련, 가해자 처벌 강화 등 법과 제도를 통한 조치를 반복하는 수준에만 머물게 된다.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는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여자화장실의 안전에 대한 이슈를 보자. 강남역 인근의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혐오 범죄와 여자화장실 불법촬영 문제가 대두된 이후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반대도 높아졌다. 그런데, 화장실 성별 분리 논쟁으로 이슈가 집중되면서 무엇이 이런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강남역 앞 추모의 현장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정신장애로 인한 우발적 범죄가 아니라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임을 그토록 강조하여 외쳤던 것은 “이러한 사건이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혐오를 구조적 문제로 인정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법기관과 정부는 끝내 이 사건을 구조적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로 다루지 않고 가해자 개인을 처벌하고 정신장애인의 행정입원 조치를 더 강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안전한 공간’에 대한 요구가 더 완벽한 성별 분리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신분 증명에 대한 요구로 모이는 것은 이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또다시 젠더폭력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의제를 ‘여성 공간’이라는 협소한 틀 속에 가두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2018년 UCLA 법학대학의 윌리엄스 인스티튜트는 공공시설에서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의 시행이 실제 화장실에서의 여성 대상 범죄를 증가시키는지를 연구하였다. 연구팀이 메사츄세츠 주 내의 차별금지법 시행 지역과 법이 없는 지역의 범죄율을 비교한 결과, 결론적으로 두 지역간 여성 대상 범죄율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또한 차별금지법이 없는 지역에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 모욕과 거부 등에 관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되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별의 분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누가 취약한 위치에 있는가’, ‘누구에 대한 폭력이 용인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젠더와 젠더 폭력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체성에 대한 단편적 서사를 넘어
젠더가 권력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제기하는 것은 우리 삶의 서사를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젠더는 단지 용모나 역할 수행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과 삶의 전 영역에서 개인의 생존과 삶의 방식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서 살기 어렵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온갖 삶의 여건들을 정치경제적 맥락 속에서 드러낼 때라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나아가 이 사회가 젠더 이분법에 기반해 지정성별에 따른 삶의 방식을 강요할 때, 이렇게 자신이 정체화하는 성별과는 다른 성별로 살아가라는 요구 자체가 이미 젠더화된 폭력이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젠더 이분법에 철저하게 맞춰진 사회 속에서 노동하고 관계 맺고 살아가기 위해, 지정성별의 양식과 맞지 않은 자신을 늘 설명해야 하는 트랜스젠더의 서사는 그래서 늘 어긋나게 된다. 오로지 정체성의 증명에만 집중하는 사회는 이 젠더 이분법의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생계와 생존을 위협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난 2월과 3월,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고 활동했던 세 명의 트랜스젠더가 세상을 떠났다. 고(姑) 변희수 하사의 부고 기사에 달린 “다음 생에는 꼭 완벽한 여성으로 태어나세요”라는 댓글을 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여성’, ‘완벽한 남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던 이들의 삶을 그 여정을 무엇이 가로막았는지, 여기 남은 우리가 젠더 이분법을 깨는 페미니즘 실천으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영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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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젠더 이분법을 깨는 페미니즘 운동을 향해
“저는 논바이너리(Non-Binary: 자신을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 트랜스젠더입니다. 2011년 초기, 임신중절 수술을 했습니다. 생리할 때마다 디스포리아(dysphoria: 자신의 젠더 정체성과 신체의 불일치로 인해 느끼는 이질감)를 느꼈던 저는 임신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큰 혼란을 느꼈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위에 임신 사실을 알리자 ‘이제 너는 여성으로서 완전한 경험을 한 것’이라는 말도 들었으나 아닙니다. 저는 논바이너리입니다. 때문에, 저는 임신중절 수술을 망설임 없이 택했고 그것은 저의 온전한 결정이었습니다…임신중절 수술은 제가 원하는 성별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낙태죄에 대해 전면 반대합니다.”
2017년 9월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진행되었던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출범 퍼포먼스에서 마지막 자유발언에 나선 한 참가자는 지정성별 여성이지만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에게 ‘낙태죄 폐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짧은 발언이었지만 이 안에는 사회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지, 임신과 출산을 ‘여성으로서의 완전한 경험’이자 ‘여성의 역할’로서 전제하는 사회에서 임신중지 처벌이 여성의 범주를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낙태죄 처벌은 임신중지라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장치로서 작동해 왔다. 낙태죄라는 처벌 요건을 유지함으로써 국가는 인구정책의 목적에 따라 임신과 출산이라는 역할을 수행할 몸을 통제해 왔고, 그에 맞는 성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태죄’의 폐지를 요구한다는 것은 처벌을 중단한다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요구되어 온 젠더화 된 몸의 역할과 그 전제를 깨어 나가겠다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트랜스젠더가 여성의 사회적 위치나 안전을 침해한다”거나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 의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난해에는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학생이 입학을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젠더 이분법과 분리, 배제주의는 안전에 대한 문제의식을 협소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도 확장해내기 어렵게 만든다.
앞서 인용한 발언에서처럼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사회의 젠더 이분법이 ‘여성’의 역할을 부여하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페미니즘은 바로 이 ‘여성’의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실천은 트랜스젠더의 분리와 배제를 통해 페미니즘을 ‘생물학적 여성’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트랜스젠더에 대한 서사조차 다시 젠더 이분법 안에 가두는 구조를 더욱 적극적으로 함께 드러내고 바꿔나가는 방향을 통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실천에서의 젠더: 이분법이 아니라 구조를 문제 삼기
이미지 설명: 3월 6일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에워싼 채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고 있다.
젠더가 ‘사회적 성’이라는 것의 의미는 단지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으로 타고난 성별’과는 다른 ‘사회적으로 학습된 성별’의 개념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젠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심은 성별에 대한 이분법적 기준을 통해 불평등한 권력을 강화하는 사회적 구조를 밝히고 이를 바꿔내는 데에 있다. 따라서 젠더가 ‘사회적’이라는 말은 이 권력관계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구조가 사회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실천에서 젠더를 다룬다는 건 단순히 ‘여성문제’만을 다룬다거나 ‘성별에 따른 차별이나 폭력’만을 다룬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일례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gender-based violence)’과 동의어가 아니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의 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더 높은 비율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단지 여성이라는 지정성별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이미 젠더화 된 구조 속에서 여성을 사회적으로 규정짓고 통제하는 방식에 관련된 문제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일련의 폭력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교육·노동·주거·문화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구조적 젠더화의 누적된 모순이 드러나는 결과로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젠더에 기반을 둔 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삭제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만 문제를 다룰 경우 대상도 협소해질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책도 피해자 지원이나 신고센터 마련, 가해자 처벌 강화 등 법과 제도를 통한 조치를 반복하는 수준에만 머물게 된다.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는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여자화장실의 안전에 대한 이슈를 보자. 강남역 인근의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혐오 범죄와 여자화장실 불법촬영 문제가 대두된 이후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반대도 높아졌다. 그런데, 화장실 성별 분리 논쟁으로 이슈가 집중되면서 무엇이 이런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강남역 앞 추모의 현장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정신장애로 인한 우발적 범죄가 아니라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임을 그토록 강조하여 외쳤던 것은 “이러한 사건이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혐오를 구조적 문제로 인정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법기관과 정부는 끝내 이 사건을 구조적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로 다루지 않고 가해자 개인을 처벌하고 정신장애인의 행정입원 조치를 더 강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안전한 공간’에 대한 요구가 더 완벽한 성별 분리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신분 증명에 대한 요구로 모이는 것은 이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또다시 젠더폭력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의제를 ‘여성 공간’이라는 협소한 틀 속에 가두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2018년 UCLA 법학대학의 윌리엄스 인스티튜트는 공공시설에서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의 시행이 실제 화장실에서의 여성 대상 범죄를 증가시키는지를 연구하였다. 연구팀이 메사츄세츠 주 내의 차별금지법 시행 지역과 법이 없는 지역의 범죄율을 비교한 결과, 결론적으로 두 지역간 여성 대상 범죄율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또한 차별금지법이 없는 지역에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 모욕과 거부 등에 관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되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별의 분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누가 취약한 위치에 있는가’, ‘누구에 대한 폭력이 용인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젠더와 젠더 폭력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체성에 대한 단편적 서사를 넘어
젠더가 권력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제기하는 것은 우리 삶의 서사를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젠더는 단지 용모나 역할 수행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과 삶의 전 영역에서 개인의 생존과 삶의 방식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서 살기 어렵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온갖 삶의 여건들을 정치경제적 맥락 속에서 드러낼 때라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나아가 이 사회가 젠더 이분법에 기반해 지정성별에 따른 삶의 방식을 강요할 때, 이렇게 자신이 정체화하는 성별과는 다른 성별로 살아가라는 요구 자체가 이미 젠더화된 폭력이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젠더 이분법에 철저하게 맞춰진 사회 속에서 노동하고 관계 맺고 살아가기 위해, 지정성별의 양식과 맞지 않은 자신을 늘 설명해야 하는 트랜스젠더의 서사는 그래서 늘 어긋나게 된다. 오로지 정체성의 증명에만 집중하는 사회는 이 젠더 이분법의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생계와 생존을 위협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난 2월과 3월,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고 활동했던 세 명의 트랜스젠더가 세상을 떠났다. 고(姑) 변희수 하사의 부고 기사에 달린 “다음 생에는 꼭 완벽한 여성으로 태어나세요”라는 댓글을 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여성’, ‘완벽한 남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던 이들의 삶을 그 여정을 무엇이 가로막았는지, 여기 남은 우리가 젠더 이분법을 깨는 페미니즘 실천으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영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 만나고 행동할 때 에너지를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