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
‘수치심에 빨강카드(Redcard)를’
“추행이라 함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에 해당”
“노출이 심하다 해서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의 전신까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로 해석하는 것은 비논리적”
-성폭력/성희롱 관련 판결문 중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성차별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보였던 미심쩍은 반응과 그에 대한 나의 대응이 생각난다. 차별의 경험도 없고 차별을 이해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 나는 ‘차별 상황’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성차별 사례들과 그에 따른 ‘여성들의 힘듦’을 강조했다. 나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나서야 “힘들겠다”는 반응을 들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을 원하는 공기.
지난 2014년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를 구성하는 ‘성적 수치심’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기획포럼을 진행해 ‘성적 수치심’이 성폭력 판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문화적·사회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했다. 이에 이어 2021년에는 성폭력 사건과 수치심이 연결되는 순간들을 조명하고, 여성을 ‘성적 수치심’에만 가두는 현실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리며, 이런 사회에 조금 더 균열을 내보고자 한다.
유죄 결정의 요인이 되는 ‘성적 수치심’
현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외 18개의 법률 및 시행안에는 ‘성적 수치심’, ‘수치심’,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포함돼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성폭력 유죄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폭력특례법 제14조에 따르면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를 벌한다. 이 조항에 근거해서 해당 촬영 부위가 수치심을 유발하는지가 판결의 쟁점이 되곤 한다.
2019년에는 여성 동급생의 발을 불법으로 촬영해 유죄판결을 확정받은 사례가 있다. 당시 가해자는 “여성의 발은 객관적으로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타인의 신체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신체 노출이 거의 없는 발이지만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다”며 가해자가 음란사이트의 ‘발’ 카테고리에 사진을 올린 점 등을 고려해 판결했다.
‘성적 수치심’을 폭넓게 해석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레깅스 판결’1)도 있다. 판사는 “맨살이 노출되지 않은 레깅스 차림의 여성을 촬영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다면 ‘성적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으며, 해당 여성이 자신의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이를 ‘성적 수치심’으로 넓게 해석할 수 있다”는 요지로 판시했다.
이런 판례들을 보면서 ‘성적 수치심’의 퇴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상담소에서도 많은 논의를 했다. ‘성적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유죄판결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현실 때문에 이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큰 고민이었다. 하지만 ‘성적 수치심’이라는 키워드가 존재하는 한 피해 진술 과정에서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성적 수치심’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네가 뭔데 내 감정을 규정해?
‘성적 수치심’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 대체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성과 관련된 경험에서 여성들은 ‘성적 수치심’ 말고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적 수치심’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감정인지, 여성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 감정을 느끼는지, 또한 그 감정만 느끼는지 말이다.
이러한 질문을 안고 상담소는 4월 16일 ‘네가 뭔데 내 감정을 판단해?’ 이야기모임을 열었다. 모임에서는 ‘학교’, ‘가족’, ‘직장’, ‘관계’, ‘매체’, ‘수사·사법기관’으로 상황을 나누어, 성과 관련해 부끄럽다고 느낀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끄럽다는 감정과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의 제한·평가’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대학 때 롤링페이퍼에 ‘누나 살 빼요’라고 공공연히 내 몸에 대해 평가했다.”
“(고등학교 때) 모든 선생님이 내 젖꼭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생리혈이 안 보이게 생리대를 잘 싸라는 교육을 직장에서도 받았다.”
가족·선생님·친구·선후배·직장동료 할 것 없이 여러 사람이 브래지어 색깔, 가슴 크기, 화장 유무 등등 여성의 몸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특히나 ‘생리’는 모든 참여자가 이야기한 주제였는데, 가정부터 직장까지 모든 공간에서 부끄러워야 하는 것으로 여성들에게 주입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성적 수치심’에 대해 인식하고, 여성들의 감정이 ‘성적 수치심’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차별과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들의 감정은 단지 ‘성적 수치심’에만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상황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했다. 아래 사진은 자신의 경험들에 붙인 감정 표현들이다.
이미지 설명: 여성들이 학교에서 ‘부끄럽다’고 느낀 차별적 상황(포스트잇)과 그에 대한 감정들(빨강카드)이 다양하게 붙어있다.
이미지 설명: 여성들이 직장에서 ‘부끄럽다’고 느낀 차별적 상황(포스트잇)과 그에 대한 감정들(빨강카드)이 다양하게 붙어있다.
‘당혹감’, ‘찝찝함’, ‘언짢음’, ‘지긋지긋함’, ‘약오름’, ‘역겨움’, ‘격분’ 등등 다양한 단어가 나왔다. 한 참여자는 성희롱 피해 당시의 감정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부끄럽기보다는) 무서웠다. 이후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나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지 무서웠고, 또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점도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올해 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을 원하는,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요하는 공기를 바꿔 갈 것이다. 성폭력 사건 판단에 있어서 여성의 몸을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로 분절화하고, ‘성적 수치심’ 외의 다양한 감정은 고려하지 않는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의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은 가해자의 행동 아니냐고. 지금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이 수치심은 대체 누가 느껴야 하는 것이냐고.
받은 그대로, 그 수치심 다 돌려 드릴게.
베리(류벼리)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월급 두 번 받은 병아리 신입활동가. 말도 많고 웃음도 많아요.
1)버스에서 레깅스를 입고 있는 여성의 뒷모습을 불법촬영하여 기소된 사건으로, 2심 재판부는 직접 노출범위가 적다는 이유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2021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
‘수치심에 빨강카드(Redcard)를’
“추행이라 함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에 해당”
“노출이 심하다 해서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의 전신까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로 해석하는 것은 비논리적”
-성폭력/성희롱 관련 판결문 중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성차별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보였던 미심쩍은 반응과 그에 대한 나의 대응이 생각난다. 차별의 경험도 없고 차별을 이해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 나는 ‘차별 상황’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성차별 사례들과 그에 따른 ‘여성들의 힘듦’을 강조했다. 나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나서야 “힘들겠다”는 반응을 들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을 원하는 공기.
지난 2014년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를 구성하는 ‘성적 수치심’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기획포럼을 진행해 ‘성적 수치심’이 성폭력 판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문화적·사회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했다. 이에 이어 2021년에는 성폭력 사건과 수치심이 연결되는 순간들을 조명하고, 여성을 ‘성적 수치심’에만 가두는 현실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리며, 이런 사회에 조금 더 균열을 내보고자 한다.
유죄 결정의 요인이 되는 ‘성적 수치심’
현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외 18개의 법률 및 시행안에는 ‘성적 수치심’, ‘수치심’,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포함돼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성폭력 유죄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폭력특례법 제14조에 따르면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를 벌한다. 이 조항에 근거해서 해당 촬영 부위가 수치심을 유발하는지가 판결의 쟁점이 되곤 한다.
2019년에는 여성 동급생의 발을 불법으로 촬영해 유죄판결을 확정받은 사례가 있다. 당시 가해자는 “여성의 발은 객관적으로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타인의 신체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신체 노출이 거의 없는 발이지만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다”며 가해자가 음란사이트의 ‘발’ 카테고리에 사진을 올린 점 등을 고려해 판결했다.
‘성적 수치심’을 폭넓게 해석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레깅스 판결’1)도 있다. 판사는 “맨살이 노출되지 않은 레깅스 차림의 여성을 촬영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다면 ‘성적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으며, 해당 여성이 자신의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이를 ‘성적 수치심’으로 넓게 해석할 수 있다”는 요지로 판시했다.
이런 판례들을 보면서 ‘성적 수치심’의 퇴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상담소에서도 많은 논의를 했다. ‘성적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유죄판결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현실 때문에 이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큰 고민이었다. 하지만 ‘성적 수치심’이라는 키워드가 존재하는 한 피해 진술 과정에서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성적 수치심’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네가 뭔데 내 감정을 규정해?
‘성적 수치심’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 대체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성과 관련된 경험에서 여성들은 ‘성적 수치심’ 말고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적 수치심’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감정인지, 여성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 감정을 느끼는지, 또한 그 감정만 느끼는지 말이다.
이러한 질문을 안고 상담소는 4월 16일 ‘네가 뭔데 내 감정을 판단해?’ 이야기모임을 열었다. 모임에서는 ‘학교’, ‘가족’, ‘직장’, ‘관계’, ‘매체’, ‘수사·사법기관’으로 상황을 나누어, 성과 관련해 부끄럽다고 느낀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끄럽다는 감정과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의 제한·평가’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대학 때 롤링페이퍼에 ‘누나 살 빼요’라고 공공연히 내 몸에 대해 평가했다.”
“(고등학교 때) 모든 선생님이 내 젖꼭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생리혈이 안 보이게 생리대를 잘 싸라는 교육을 직장에서도 받았다.”
가족·선생님·친구·선후배·직장동료 할 것 없이 여러 사람이 브래지어 색깔, 가슴 크기, 화장 유무 등등 여성의 몸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특히나 ‘생리’는 모든 참여자가 이야기한 주제였는데, 가정부터 직장까지 모든 공간에서 부끄러워야 하는 것으로 여성들에게 주입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성적 수치심’에 대해 인식하고, 여성들의 감정이 ‘성적 수치심’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차별과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들의 감정은 단지 ‘성적 수치심’에만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상황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했다. 아래 사진은 자신의 경험들에 붙인 감정 표현들이다.
이미지 설명: 여성들이 학교에서 ‘부끄럽다’고 느낀 차별적 상황(포스트잇)과 그에 대한 감정들(빨강카드)이 다양하게 붙어있다.
이미지 설명: 여성들이 직장에서 ‘부끄럽다’고 느낀 차별적 상황(포스트잇)과 그에 대한 감정들(빨강카드)이 다양하게 붙어있다.
‘당혹감’, ‘찝찝함’, ‘언짢음’, ‘지긋지긋함’, ‘약오름’, ‘역겨움’, ‘격분’ 등등 다양한 단어가 나왔다. 한 참여자는 성희롱 피해 당시의 감정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부끄럽기보다는) 무서웠다. 이후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나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지 무서웠고, 또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점도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올해 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을 원하는,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요하는 공기를 바꿔 갈 것이다. 성폭력 사건 판단에 있어서 여성의 몸을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로 분절화하고, ‘성적 수치심’ 외의 다양한 감정은 고려하지 않는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의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은 가해자의 행동 아니냐고. 지금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이 수치심은 대체 누가 느껴야 하는 것이냐고.
받은 그대로, 그 수치심 다 돌려 드릴게.
베리(류벼리)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월급 두 번 받은 병아리 신입활동가. 말도 많고 웃음도 많아요.
1)버스에서 레깅스를 입고 있는 여성의 뒷모습을 불법촬영하여 기소된 사건으로, 2심 재판부는 직접 노출범위가 적다는 이유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