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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민원 응대가 '건장한' '남성'만 할 수 있는 일인가요

2022-07-21
조회수 1882

[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_여성노동팀

 

민원 응대가

'건장한' '남성'만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삐빅, 그것은 성차별입니다.

3월 초. 한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에서 ‘읍면동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 매뉴얼’ 책자를 배포했는데, 그 중 특정 문구가 성차별적이라고 생각되어 민우회 입장이 궁금하다는 거였다. 행안부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은 매뉴얼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청원경찰 등 확보가 어려운 경우 민원 안내인으로 건장한 남성을 채용”단순하고 선명하게 성차별적인 문구를 마주하자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문제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야 활동가. 당황스러움은 감추고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민원 응대 능력이 성별이랑 직결되나요? 건장하다는 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라는 남녀고용평등법이 있는데요. 해당 법 2조 1호는 ‘성별, 혼인, 가족 안에서의 지위, 임신 또는 출산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다르게 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는 경우’를 차별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행안부 홈페이지에서 배포했던 매뉴얼 "청원경찰 등 확보가 어려운 경우 민원 안내인으로 건장한 남성을 채용"이라 적혀있다. 

 

 

 


 

‘건장한 남성’만 가능한 노동환경은 모두에게 해롭다

정부가 발행한 매뉴얼에서 아직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문구를 봐야 한다니. 분노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기사가 잘 나가길 바라며, 금방 다른 일에 몰두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 뒤, 여성노동팀이 매달 진행하는 여성노동 기사 모니터링 시간에 그 기사를 다시 마주하기 전까진. 동료1은 “아니, 이런 일이 있었어요?” 분노했고, 기사를 취합해준 동료2는 “그러니까요. 이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질문인 듯 제안인 듯(?) 물었고, 여덟 개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나를 향했다.

행안부에 문제제기와 시정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자 결정하고 나서 이 매뉴얼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언제부터 성차별적인 문구가 있었던 거지? 한 해 한 해 거슬러 올라 매뉴얼을 살펴본 결과, 2021년부터 “건장한 남성”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추가된 문구인지는 모르지만, 혹시 악성 민원이 많아지고 여성노동자가 폭력적인 상황에 더 많이 노출되어 이런 문구가 생겨난 것은 아닐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민우회가 하게 될 이야기가 혹시 현장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처럼 비춰질까 걱정도 되었다.하지만 우린 그런 식으로 여성노동자를 배제해온 수많은 사례를 보아왔다. 위험하니까, 힘든 일이니까, 여자가 하기엔 너무 거친 일이니까. 이런 ‘배려’는 “여자는 쉬운 일만 하려고 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퍼뜨리고, 업무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원인을 성별로 환원 시킨다.(“그러니까 남자 시키라고 했잖아”, “남자 불러와”)

어쩌면 욕설을 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 폭력을 저지할 수 있는 건장한 남성이 과격한 민원을 ‘잘’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게 과연 좋은 해결 방법일까? 앞으로 문제 민원이 줄어들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과격한 민원인은 본인 행동이 문제라는 인식은 없이,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에겐 계속해서 폭력적일 것이며 ‘건장한 남성’ 응대인 앞에서만 문제가 멈출 것이다. 즉, 서비스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은 해결되지 않는 셈이다. 결국 이는 여성노동자를 차별하는 문제인 동시에 모든 노동자의 노동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남성이라고 모두 ‘건장한’ 것은 아니며, 과격한 민원인을 응대할 때 남성이라는 성별만으로 ‘방패’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업장은 악성 민원을 줄여나갈 시스템을 고민해야지, ‘건장한’ 남성 노동자에게 그 몫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귀하께서 신청하신 민원에 대한 답변이 등록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담아 공문을 작성했다.

“(...) ‘과격한 민원발생이 빈번한 기관’, ‘청원경찰 확보가 어려운 경우’라는 단서를 두고는 있으나 이는 특정 성별을 채용하는 합리적인 이유로 볼 수 없습니다. 민원 응대 수행 능력이 남성이라는 성별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과격한 민원에 대응이 필요하다면 ‘남성 우선 채용’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합니다.”

 

*사진설명: 고민을 담아 행안부 매뉴얼에 문제를 제기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상하게 대답하기만 해봐, 가만 안 있어야지, 비장한 마음도 함께 담아 담당자와 장관 앞으로 우편을 발송했다. 기다린 지 일주일 쯤 되었을까? 행안부에서 전화가 왔다. “신혜정 씨죠? 대표 팩스 번호로 공문을 보내셨더라고요. 담당자는 OOO부서 OOO 씨인데, 그쪽 팩스 번호 아세요? 모르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접수는 잘 됐고요. 곧 답변 드릴 겁니다.” 건조하고 사무적인 안내 전화에 다소 맥이 빠지긴 했지만 덕분에(?) 어떤 대답을 해올지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공문에 적어둔 기한 마지막 날. 출근하자마자 여성노동팀 메일함을 열어보곤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매뉴얼 수정해서 재배포 한다고 해요!”

 

                                                        

*사진설명: 행정안전부의 회신 공문. 문제가 된 매뉴얼을 수정 재배포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순간 기뻤지만 곧바로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금방 수정될 수 있는 것이었나? 아무런 생각 없이 ‘건장한 남성’이라는 문구를 넣었다가 (아마도) 또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문구를 삭제한 건 아닌지 고민되었다. 그렇지만 고민은 잠시 넣어두고! 얻어낸 승리 소식을 업무용 메신저와 SNS에도 공유했다. 대선 이후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라 그런지 동료들도, 활동을 지켜봐준 분들도 함께 기뻐했다. 주 120시간 노동, 성폭력 무고죄 강화,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 적용… 여성노동자에게 쉽지 않은 5년이 너무나도 예상된다. 우리 모두 일상 속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매일이 되기를. 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워나갈 수 있기를. 그런 싸움이, 승리와 패배가 차곡차곡 쌓여 (다소 거창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를 성평등한 세상으로 이끌 거라고 믿는다.

 

 

❚ 은사자(신혜정)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요즘 운전을 해보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