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_성폭력상담소
상담소가 만난 사람
: 혜림은 세계가 부정의하게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 마주 오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한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고민이 있을까? 어떤 관계망을 만들고 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꾸리며 살아가겠지? 각자의 세계가 전혀 만나지 못하다가 어떤 우연과 기회로 세계들이 만나는 순간이 오겠지?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상담전화 너머로 누군가의 세계를 마주한다. 혜림의 세계를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1월이었다. 직장 선배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고, 회사에 알렸지만 회사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불리한 조치를 하였다. 담당 검사는 혜림의 문자가 피해자답지 못하다며 성폭력 사건을 불기소 처리하고 오히려 혜림을 무고죄로 기소했다. 혜림의 세계는 그렇게 느리고도 빠르게 부정의한 방향으로 흘렀다. 혜림을 가장 많이 만난 곳은 법원이었다. 함께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고, 재판부에 의견서를 보내고, 가해자와 가해자 주변인의 거짓증언에 분노하고, 1심 재판부의 무고죄 무죄 판결에 기뻐하는 한편, 고집스러운 검찰의 항소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행히 2심 재판부도 무죄 판결을 내렸고 우리는 함께 안도하였다. 무고죄 무죄라는 당연한 결과를 얻기 위해 3년의 시간을 싸웠고, 여전히 성폭력 사건 불기소 처분에 대한 재정항고는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를 외치는 이상한 세계가 이어졌지만 혜림은 자신의 세계를 조금 더 단단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혜림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조치를 행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가 더 이상 부정의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자신의 둑을 쌓고 있는 혜림을 만났다.1)
혜림이 다니는 회사는 어떤 곳이었나요?
여기가 물류니까 주로 남성이 영업을 하고 여성은 계약직으로 많이 뽑아요. 서무직은 서류 업무 등 업무 보조를 주로 하니까. 서무직 채용은 팀장에게 인사권이 있어요. 우리 회사는 예쁘고 어린 서무직 여성을 뽑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계열사 안에 소문이 나서 다른 계열사 남성들이 서무직 여성 얼굴 보러오고 막 그랬어요. 서무직 여직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출근을 하지 않아요. 사라져 버려요. 스스로 나가거나, 어떤 이야기도 없이 잠수 타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면 어떤 피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서무직이니까 뭔가 제대로 문제제기도 못하고 그렇게 회사를 떠났어요.
회사에서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어요.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면 상사가 한마디씩 꼭 했어요. 그러면 제가 바로 “어, 이거 성희롱이에요.”라고 받아쳤어요. 상사들이 다 “혜림이한테는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무섭다.”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나는 공채 출신 정규직이니까 성폭력 사건이 나한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을 못했어요. 그런데 피해를 겪고 나니까 공채건 말건, 할 말을 하는 성격이건 말건 다 상관없더라고요.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여자는 정말 직장에서 동료가 아니구나… 서무직 후배 직원들이 사라질 때 나한테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내가 대신 문제제기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어요. 완전 오만한 생각을 했던 거죠. 나 역시 회사 안에서 그냥 여자였던 거죠.
가해자 명예훼손 역고소, 회사의 연속적인 불이익 조치, 성폭력 형사고소 이후 검사인지 무고죄 기소까지. 어떻게 그 시간을 거쳤나요?
가해자는 회사에서 신뢰했던 선배였어요. 가해자는 형식적 사과만 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를 대했어요. 그 모습에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회사에 알렸어요. 그걸 가지고 가해자는 역으로 명예훼손 고소2) 를 하고…회사는 회사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며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징계하겠다하고, 기존 업무를 배제 시키고, 검찰이 무고죄로 저를 기소하니까 다시 한 번 더 징계하겠다고 압박했어요. 그때 민우회에서 회사에 의견서를 보내고 징계 고지는 철회되었지만 회사는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도 그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회사는 절대 나를 지켜주지 않는구나.’ 느꼈어요. 피해 직후에는 분노와 자책, 좌절의 굴레를 반복했어요. 하지만 그 시간을 아무리 반복해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고, 방법을 묻고 그랬어요.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중 제일 길잖아요. 그런 곳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내 존재 자체가 그냥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검찰의 무고 기소는 분노, 무서움, 억울함 등등 복잡했어요. 저는 아직도 담당 검사의 이름을 잊을 수 없어요.
검찰의 무고인지 수사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세요.
성폭력 사건 수사를 하고, 검사가 바로 무고죄 수사로 전환한다고 했어요. 미투 이후에 성폭력 사건 수사 종결 전에는 무고 수사를 하면 안 된다고3)들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았어요. 담당 검사는 자기는 그런 거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고, 상황을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 억지로 무고 수사에 임했어요. 성폭력 사건 수사할 때와 무고 수사할 때 태도와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라졌어요. 검사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수사관도 동시에 그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니까 무서운 마음이 들었어요. ‘설마 무고 기소가 될까?’하는 마음으로 수사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바로 성폭력 고소 건이 불기소 처분 나고, 정말 10분 뒤였나? 몇 분 안 지나서 무고죄 기소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게 무슨 일인지 납득이 안 되고 화가 났어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을 내세웠을 때 혜림의 심정은 더 각별했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참담했죠.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공약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없이 딱 몇 글자를 공약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담했어요. 국민으로서 여성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심정이 들었어요.‘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이 버젓이 나온 상황에 만약 내가 형사고소를 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성폭력 피해 사실을 경찰에 알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진짜 많이 했어요.
폭풍의 시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했던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내가 고립되지 않도록 회사 정보와 분위기를 알려주고, 법정에서 증언도 해주고 나를 믿어준 동료들과 지인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회사에서 나를 돕다가 사장과 팀장의 눈치로 등을 돌린 사람들도 솔직히 있었어요. 하지만 서무직 여성 동료들은 끝까지 제 곁에 있었어요. 그리고 입사 동기와 다른 부서 선배가 나를 믿어줬어요. 다른 부서 선배는 사람들이 무고 언급하면서 “혜림이 걔 꽃뱀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아직 재판이 끝난 것도 아니고, 혜림에게 직접 들은 거 아니면 함부로 말하지 마라”며 상황을 종결시켰어요. 민우회도 함께 방법을 고민하고 도움을 줘서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네이버에 있는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카페에서도 힘을 받았어요. 서로 한 번도 만난 적 없어도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본인들의 팁과 노하우를 알려주는데 힘이 되더라고요. 어떤 분은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고, 가해자가 처벌 된 판결문을 공유해주어서 무고 사건 재판부에 그분의 판결문을 참고해서 의견서를 냈어요.불행을 공유하면 누군가에게 더 큰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 힘이 되더라고요.
무고죄 무죄 판결을 받고, 회사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준비하고 있는데 긴 싸움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겪은 피해가 그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사에 선례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선례가 있으면 선례에 기대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그래서 회사에 문제제기를 했어요. 그런데 결국에는 제가 못 버티고 회사를 나왔잖아요. 선례를 못 만들었잖아요. 그게 걸렸어요. 작든 크든, 알게 모르게 분명히 성폭력 사건은 또 일어날 텐데, 가해자와 회사는 무엇이 잘못인지 평생 모르고 지나가게 될 텐데 이거는 도저히 못 보겠는 거예요. 내가 온갖 불이익과 차별, 모멸감을 다 겪고 나왔는데 회사가 모르는 것은 안 되겠다, 당연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혜림과 비슷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혼자 끙끙 앓다보면 계속 매몰되더라고요. 그래서 내 이야기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주변 사람이 만약 내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면 그 사람을 거르고 나를 진짜 믿어주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해요.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성폭력상담소, 피해자 연대 카페 등에 가서 이야기하고 사람들 만나고 그러면 좋겠고, 또 건강해야 계속 싸울 수 있으니까 건강 잘 챙기고요. 진짜 힘들 때 땀 흘리는 운동을 많이 했어요. 땀 흘리고 나면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 땀방울에 또르르 무거운 생각들이 흘러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병원 가서 상담 받고 약도 먹고 그러는 것이 도움 되었어요. 아프면 병원 가서 나를 보살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정신건강의학과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그때는 내가 힘든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고통의 무게감도 줄어드는 때가 오더라고요. 작게 느껴질 때가. 힘듦을 겪고 있을 우리에게 너무 크게 보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법원이 아닌 곳에서 만난 혜림은 5월처럼 빛났다. 회사 상대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부침이 반복되겠지만 혜림은 싸우고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혜림은 힘들 때면 고양이 사진을 끝없이 보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 방법을 찾으며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혜림이 쌓은 둑은 누군가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반드시.
1) 피해자 동의를 구하고 피해자가 겪은 시간을 요약하고 인터뷰에 담았다. 글에 명기된 이름은 가명이다.
2) 가해자가 혜림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고소 사건은 혐의 없음으로 처리되었다.
3) 2018년 5월 대검찰청은 성폭력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기 전까지 무고죄에 대해 수사하지 않도록 성폭력수사매뉴얼을 개정하였다.
바람 (이소희)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별칭을 바람에서 바위로 바꾸면 조금 더 의연하게 살 수 있을까요
[2022 상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_성폭력상담소
상담소가 만난 사람
: 혜림은 세계가 부정의하게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 마주 오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한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고민이 있을까? 어떤 관계망을 만들고 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꾸리며 살아가겠지? 각자의 세계가 전혀 만나지 못하다가 어떤 우연과 기회로 세계들이 만나는 순간이 오겠지?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상담전화 너머로 누군가의 세계를 마주한다. 혜림의 세계를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1월이었다. 직장 선배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고, 회사에 알렸지만 회사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불리한 조치를 하였다. 담당 검사는 혜림의 문자가 피해자답지 못하다며 성폭력 사건을 불기소 처리하고 오히려 혜림을 무고죄로 기소했다. 혜림의 세계는 그렇게 느리고도 빠르게 부정의한 방향으로 흘렀다. 혜림을 가장 많이 만난 곳은 법원이었다. 함께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고, 재판부에 의견서를 보내고, 가해자와 가해자 주변인의 거짓증언에 분노하고, 1심 재판부의 무고죄 무죄 판결에 기뻐하는 한편, 고집스러운 검찰의 항소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행히 2심 재판부도 무죄 판결을 내렸고 우리는 함께 안도하였다. 무고죄 무죄라는 당연한 결과를 얻기 위해 3년의 시간을 싸웠고, 여전히 성폭력 사건 불기소 처분에 대한 재정항고는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를 외치는 이상한 세계가 이어졌지만 혜림은 자신의 세계를 조금 더 단단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혜림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조치를 행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가 더 이상 부정의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자신의 둑을 쌓고 있는 혜림을 만났다.1)
혜림이 다니는 회사는 어떤 곳이었나요?
여기가 물류니까 주로 남성이 영업을 하고 여성은 계약직으로 많이 뽑아요. 서무직은 서류 업무 등 업무 보조를 주로 하니까. 서무직 채용은 팀장에게 인사권이 있어요. 우리 회사는 예쁘고 어린 서무직 여성을 뽑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계열사 안에 소문이 나서 다른 계열사 남성들이 서무직 여성 얼굴 보러오고 막 그랬어요. 서무직 여직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출근을 하지 않아요. 사라져 버려요. 스스로 나가거나, 어떤 이야기도 없이 잠수 타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면 어떤 피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서무직이니까 뭔가 제대로 문제제기도 못하고 그렇게 회사를 떠났어요.
회사에서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어요.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면 상사가 한마디씩 꼭 했어요. 그러면 제가 바로 “어, 이거 성희롱이에요.”라고 받아쳤어요. 상사들이 다 “혜림이한테는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무섭다.”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나는 공채 출신 정규직이니까 성폭력 사건이 나한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을 못했어요. 그런데 피해를 겪고 나니까 공채건 말건, 할 말을 하는 성격이건 말건 다 상관없더라고요.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여자는 정말 직장에서 동료가 아니구나… 서무직 후배 직원들이 사라질 때 나한테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내가 대신 문제제기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어요. 완전 오만한 생각을 했던 거죠. 나 역시 회사 안에서 그냥 여자였던 거죠.
가해자 명예훼손 역고소, 회사의 연속적인 불이익 조치, 성폭력 형사고소 이후 검사인지 무고죄 기소까지. 어떻게 그 시간을 거쳤나요?
가해자는 회사에서 신뢰했던 선배였어요. 가해자는 형식적 사과만 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를 대했어요. 그 모습에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회사에 알렸어요. 그걸 가지고 가해자는 역으로 명예훼손 고소2) 를 하고…회사는 회사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며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징계하겠다하고, 기존 업무를 배제 시키고, 검찰이 무고죄로 저를 기소하니까 다시 한 번 더 징계하겠다고 압박했어요. 그때 민우회에서 회사에 의견서를 보내고 징계 고지는 철회되었지만 회사는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도 그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회사는 절대 나를 지켜주지 않는구나.’ 느꼈어요. 피해 직후에는 분노와 자책, 좌절의 굴레를 반복했어요. 하지만 그 시간을 아무리 반복해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고, 방법을 묻고 그랬어요.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중 제일 길잖아요. 그런 곳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내 존재 자체가 그냥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검찰의 무고 기소는 분노, 무서움, 억울함 등등 복잡했어요. 저는 아직도 담당 검사의 이름을 잊을 수 없어요.
검찰의 무고인지 수사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세요.
성폭력 사건 수사를 하고, 검사가 바로 무고죄 수사로 전환한다고 했어요. 미투 이후에 성폭력 사건 수사 종결 전에는 무고 수사를 하면 안 된다고3)들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았어요. 담당 검사는 자기는 그런 거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고, 상황을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 억지로 무고 수사에 임했어요. 성폭력 사건 수사할 때와 무고 수사할 때 태도와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라졌어요. 검사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수사관도 동시에 그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니까 무서운 마음이 들었어요. ‘설마 무고 기소가 될까?’하는 마음으로 수사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바로 성폭력 고소 건이 불기소 처분 나고, 정말 10분 뒤였나? 몇 분 안 지나서 무고죄 기소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게 무슨 일인지 납득이 안 되고 화가 났어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을 내세웠을 때 혜림의 심정은 더 각별했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참담했죠.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공약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없이 딱 몇 글자를 공약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담했어요. 국민으로서 여성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심정이 들었어요.‘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이 버젓이 나온 상황에 만약 내가 형사고소를 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성폭력 피해 사실을 경찰에 알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진짜 많이 했어요.
폭풍의 시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했던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내가 고립되지 않도록 회사 정보와 분위기를 알려주고, 법정에서 증언도 해주고 나를 믿어준 동료들과 지인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회사에서 나를 돕다가 사장과 팀장의 눈치로 등을 돌린 사람들도 솔직히 있었어요. 하지만 서무직 여성 동료들은 끝까지 제 곁에 있었어요. 그리고 입사 동기와 다른 부서 선배가 나를 믿어줬어요. 다른 부서 선배는 사람들이 무고 언급하면서 “혜림이 걔 꽃뱀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아직 재판이 끝난 것도 아니고, 혜림에게 직접 들은 거 아니면 함부로 말하지 마라”며 상황을 종결시켰어요. 민우회도 함께 방법을 고민하고 도움을 줘서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네이버에 있는 피해자들이 모여 있는 카페에서도 힘을 받았어요. 서로 한 번도 만난 적 없어도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본인들의 팁과 노하우를 알려주는데 힘이 되더라고요. 어떤 분은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고, 가해자가 처벌 된 판결문을 공유해주어서 무고 사건 재판부에 그분의 판결문을 참고해서 의견서를 냈어요.불행을 공유하면 누군가에게 더 큰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 힘이 되더라고요.
무고죄 무죄 판결을 받고, 회사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준비하고 있는데 긴 싸움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겪은 피해가 그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사에 선례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선례가 있으면 선례에 기대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그래서 회사에 문제제기를 했어요. 그런데 결국에는 제가 못 버티고 회사를 나왔잖아요. 선례를 못 만들었잖아요. 그게 걸렸어요. 작든 크든, 알게 모르게 분명히 성폭력 사건은 또 일어날 텐데, 가해자와 회사는 무엇이 잘못인지 평생 모르고 지나가게 될 텐데 이거는 도저히 못 보겠는 거예요. 내가 온갖 불이익과 차별, 모멸감을 다 겪고 나왔는데 회사가 모르는 것은 안 되겠다, 당연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혜림과 비슷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혼자 끙끙 앓다보면 계속 매몰되더라고요. 그래서 내 이야기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주변 사람이 만약 내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면 그 사람을 거르고 나를 진짜 믿어주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해요.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성폭력상담소, 피해자 연대 카페 등에 가서 이야기하고 사람들 만나고 그러면 좋겠고, 또 건강해야 계속 싸울 수 있으니까 건강 잘 챙기고요. 진짜 힘들 때 땀 흘리는 운동을 많이 했어요. 땀 흘리고 나면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 땀방울에 또르르 무거운 생각들이 흘러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병원 가서 상담 받고 약도 먹고 그러는 것이 도움 되었어요. 아프면 병원 가서 나를 보살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정신건강의학과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그때는 내가 힘든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고통의 무게감도 줄어드는 때가 오더라고요. 작게 느껴질 때가. 힘듦을 겪고 있을 우리에게 너무 크게 보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법원이 아닌 곳에서 만난 혜림은 5월처럼 빛났다. 회사 상대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부침이 반복되겠지만 혜림은 싸우고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혜림은 힘들 때면 고양이 사진을 끝없이 보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 방법을 찾으며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혜림이 쌓은 둑은 누군가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반드시.
1) 피해자 동의를 구하고 피해자가 겪은 시간을 요약하고 인터뷰에 담았다. 글에 명기된 이름은 가명이다.
2) 가해자가 혜림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고소 사건은 혐의 없음으로 처리되었다.
3) 2018년 5월 대검찰청은 성폭력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기 전까지 무고죄에 대해 수사하지 않도록 성폭력수사매뉴얼을 개정하였다.
바람 (이소희)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별칭을 바람에서 바위로 바꾸면 조금 더 의연하게 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