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감상' -자전거번개를 다녀와서...
솔직히 지금은 그때가 까마득한 삼백년 전 일인 양 기억도 흐리다. 안개 낀 하늘을 담은 뿌연 한강을 바라보며 왠지 너풀대는 비닐하우스 같다는 생각을 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마감에 쫓기는 지금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기억만이 가장 현재에 어울리는 짧은 여행의 감상인 것 같다. 어쨌건, 뚝섬유원지역에서부터 한양대를 조금 지난 갈대숲에 도착하기까지 번쩍대는 은빛 비닐하우스를 지난 여정은 다음과 같다.
3시 30분. 1시로 약속한 일정을 2시로 미룬 후, 다시 1시간 반을 늦었다. 낮잠을 잤고, 일요일의 도로는 역시 조금 막혔고, 게다가 뚝섬유원지역이 아닌 뚝섬역에 내려 30분 간 강을 찾아 헤맨 덕분이다.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일행에 뛰어들어 점포에서 자전거를 대여하고 급하게 길을 올랐다.
자전거 경력 20년. 그러나 생각보다 타는 게 쉽지 않다. 새똥 뭍은 바구니가 달린 시간당 3천 원짜리 자전거는 조금 속도를 높일 때 마다 끄윽끅 소리를 내며 간신히 한 바퀴씩 굴러갔다. 관절이 부실한 어르신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랄까. 그래도 내 자전거는 제법 뚝심은 있어 달릴수록 끄으윽 소리도 줄어들고 속력도 붙었다.
슬슬 기분을 내며 달리다 보니 하늘도 보이고, 비닐을 덮은 것처럼 잔잔한 한강도 꽤 마음에 든다. 강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시들어가는 풀꽃과 단풍진 가로수의 흔들림도 근사하다. 조깅하는 사람들 사이를 쓱쓱 지나들며 사람구경도 하고, 적당히 차가운 초겨울의 바람도 한숨, 한숨, 제대로 정성들여 맡아본다. 갈대숲의 풍경과 그 소리는 또 얼마만인지. 머리가 감흥을 생각하기도 전에, 눈이 먼저 바라보고, 귀가 먼저 기울고, 코가 먼저 흥흥 거린다. 먼지로 뒤덮인 도심에선 감각은 마비되고, 쓸데없는 생각만 활개를 치더니, 이곳에선 온 몸의 감각세포가 제 구멍을 열어젖히고 참았던 숨을 몰아쉰다. 머릿속은 깨끗하다.
헉헉. 텅텅. 그렇게 한 시간 쯤 달린 후, 노상에서 부르스타로 막 끓여 낸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마시고(사실 길거리 표 막걸리와 파전이 더 당겼지만 음주 자전거로 사고를 낸 경험도 있어 참았다.),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흥흥흥 냄새를 맡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먼지 낀 감각세포의 구멍 사이사이를 말끔히 털어내고 온 것 같다.
고작 2시간 남짓의 여행이었는데, 후유증은 꽤 길다. 깨끗해진 머릿속 덕분에 뚝섬에서의 그 시간이 더 까마득하게 느껴지고, 청량해진 기분 탓에 팍팍한 일의 시작이 좀 낯설다. 그래도 일주일 얻은 늦은 여름휴가의 마지막을 뚝섬에서의 자전거 여행으로 마무리한 것은 잘 한 일인 것 같다. 아무리 샤워를 매일 해도 가끔은 탕에 들어가 몇 시간 넉넉히 목욕을 해야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처럼, 가끔 머릿속도, 내 몸 감각세포의 구석구석도 개운하게 씻어줄 필요가 있다. 자전거를 타는 일이, 쓰러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사는 일’ 같아 조금 울적했던 기분만 빼면 100점 만점에 98점 쯤 된다.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앉아있는 동료들에게 연신 “뷰티풀!”을 외칠 정도의 명랑함과 그날 저녁 진탕 와인을 퍼 마시고도 끄떡없이 다음날 출근길에 오른 정도의 기운은 얻었으니까.
사족으로 같이 술을 마신 동료는 술병 나 집에도 못 갔다. 아, 자전거 하이킹은 음주에도 좋더라!
* 이 글을 쓰신 이미혜 회원님은 현재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직업의 특수성상 여름휴가를 11월에 얻었고, 휴가의 마지막을 자전거 번개 참여로 장식했답니다. 약속시간에 상당히 늦어서 기다리는 날리와 서소의 애를 태우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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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이제서야 읽었는데, 미혜님 오랜만이구요. 이렇게 아름다운 글발을 가지고 계셨다니..놀라울따름입니다. 앞으로 마이마이 부탁드립니다~^^
저만 후기를 남긴건가요??!! 아... 왠지 당했다는 느낌이 ㅡ ㅡ;; 음주 자전거 사고는 영국에서 그냥 대낮에 맥주 두 병 마시고 산길 달리다 캐러밴(집 달린 차)에 받혀 튕겨나갔던.. 머 그런 우울한 에피소드라고나 할까요ㅎㅎ ;;;;
갈대와 자전거가 저리 잘어울릴 줄이야. 나도 따로 자전거 타러 가보랬더니 한파가..흙! 신의 저주로고.
같이 갔던 서소인데요. 우리가 이리 멋진 자전거타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기자라 그런지 글발이 넘 장난아니다~전 날리가 '우린 거기까지 가야 돼!' '벌써 쉬다니' 하면서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따라가느라 가랑이 찢어지는지 알았는데...그래서 남은 건 허벅지의 통증~ 하지만 '체육시간 간담회에서 들었던 땀흘리는 즐거움이 맞아 이런 거였지' 하고 느꼈던 건 참 좋았어요.
음주 자전거 사고라! 자못 궁금한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