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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크로스인터뷰] 단호박X코린 백마띠 평행우주

2022-12-16
조회수 2016

코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통의 전화였어요.

 

 

따릉따릉 ☎

 

단호박 “안녕하세요. 한국여성민우회 단호박입니다.”

 

코린 “안녕하세요. 버터나이프크루라고 아시나요, 활동으로 자문을 요청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그렇게 버터나이프크루와 민우회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단호박: 코린님 안녕하세요. 민우회에 전화하셨던 거 기억하시나요. 전화 이후에 생각이 많이났거든요. 어떻게 꾸려나가고 계신지, 회원분들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아서 버터나이프크루 소식을 전하면서 코린님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어요.

 

코린: 버터나이프크루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소식이 덮쳤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누군가를 붙잡고 ‘정답을 알려주세요’라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민우회가 당연히 기꺼이 도와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했었어요. (버터나이프크루 이야기는 잠시 후에 이어서)

 

 

 

 

 

1. 코린의 물결

 

단호박: 코린님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메일을 보고 재밌는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코린: 제 사주에 ‘水(수)’가 없어요.

 

단호박: 너무 신기해요. 저도 ‘水(수)’가 없어요.

 

코린: 네 저는 완전 ‘土(토)’예요. 그래서 ‘水(수)’가 들어간 활동명을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던 중에 친구 혜영님이 “태어난 해에 온 1호 태풍을 해보면 어떻겠냐”라고 제안해줬어요. 그 태풍 이름이 코린인데, 코린 태풍이 바다에서 시작해서 바다에서 끝난 태풍이더라고요. 닉네임은 태풍에서 따온 것이고 이메일은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단호박: 코린 웨이브라는 이메일을 보고,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인건가 생각했어요. 코린에서 시작된 파도라는 뚯인가 생각했었어요.

 

코린: 이제는 사주부터 말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 다녀야겠어요.(웃음) 코린이라는 영어 닉네임을 쓸 때 고민이 많았어요. 불어로 코린을 쓰면 여성형이고 순결한 소녀 라는 의미여서 외국 아이들 이름 짓는 사이트에서 최대한 어원에 가까운 것으로 영어 이름을 지었어요.

 

 

▲인터뷰 현장 사진

 

2. 운동권 2세의 정체성

 

코린: 전 제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운동권 2세라는 정체성이에요. 운동을 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많은 정체성을 나에 의해서가 아니고 부모에 의해서 부여받은 게 있어요.아빠는 노동 운동을 한 사람이고 엄마는 여성 운동을 했어요.4~5년 전에 (지금은 인연을 끊은)아빠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만났어요. 아빠한테 “나는 이제 평생 여성 운동을 하면서 살 거야”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때 아빠가 했던 말이 “더 큰 운동들이 많은데 반쪽짜리 운동을 하려고 하냐”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그래서 아빠한테“여성운동이 아빠의 삶에서는 반쪽일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서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이다”라고 대화를 마쳤어요. 사실 아빠랑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잘 해보기 위해서 아빠가 좋아하는 투쟁 현장에 간건데, 아시다시피 노동 집회의 분위기가 남성중심적이잖아요. 그럼에도 서울에서 잘 살아가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아빠랑 대화를 잘 해보기 위해서 갔지만 ‘반쪽짜리 운동’이라는 내 삶의 운동을 무시하는 발언을 들었을 때 참을 수 없었어요.

 

단호박: 엄마의 운동과 아빠의 운동에서 뭘 느꼈나요?

 

코린: 엄마랑 사진 앨범을 보다가 이전의 운동부터 현재의 운동까지 바뀌지 않았던 지점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아빠의 티셔츠에는 ‘주5일제 쟁취’, ‘40시간 노동’이 쓰여 있는데 엄마의 티셔츠에는 ‘가정폭력 금지’, ‘성폭력 그만’, ‘가부장제 철폐’ 이런 문구들이 있는데 엄마 운동의 문구들은 지금까지 너무나 유효하고 아빠의 문구는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많이 들면서 ‘어떤 운동은 왜 계속 후순위가 되었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코린: 단호박님은 민우회에 오기 전에는 언론 시민단체에서 일했다고 했는데 이전의 운동과 민우회에서 하는 운동이 달라진 지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단호박: 언론 단체에서 일할 때는 뉴스, 그 중에서도 정치뉴스를 많이 봤었어요. 그런데 미디어의 특성 상 여성의 이미지를 대상화하거나, 사회적 역할 부여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저는 미디어가 여성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 얘기를 많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성 이슈보다 중요한 정치 이슈가 있다는 반응이 있었어요. 여전히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겠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은 한계를 느꼈어요. 시민사회 안에서 문제가 있잖아요. 어떤 문제를 후순위로, 반쪽짜리 운동이라고 하면서 시민단체 안에서 성폭력 문제는 잘 해결되지 않잖아요. 만일 가해자가 단체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을 복권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기도 했고요. 여성 시민들을 배제시켰던 역사나 실망감을 안겨주는 지점도 있는 것 같고요. 내부의 문제들이 얼마나 개선됐을지 잘 모르겠어요. 내 삶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분노도 늘 제자리를 걷는 것 같은데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하다’라고 하는 말이 납득되지 않아요. 달라진 점이라면 여성들을 둘러싼 정치이슈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게 달라진 점 같아요.

 

코린: 예전 운동권 문화 속에서 이상했던 일이 생각나는데요. 저랑 같이 놀던 이모들이 갑자기 사라질 때가 있었거든요. 이모들을 찾아서 이 방 저 방을 찾아갔다가 아주 좁은 방에서 이모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봤어요. 그런데 삼촌들은 다 공동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거든요. 왜 이모들은 이렇게 좁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담배를 필까 어릴 때 궁금했던 기억들을 다시 재해석하는 과정이 저한테는 필요했어요.

 

 

3. 코린의 페미니스트 성장기

 

 

: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호주제 폐지나 여성 운동을 계속해왔던 흐름 안에서 저는 운동을 하는 삶을 살지 않을 거라는 신념이 있었어요. ‘사회를 바꾸는 것보다는 나의 삶을 잘 살고 싶어’라는 메시지가 저한테는 컸어요.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남성이 80%인 학과에 다녔고 그 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남성 중심적인 문화들을 답습해 왔던 과거가 있었어요. 나중에 왜 그렇게 까지 남성 중심적 문화에 동화되려 노력했을까를 고민했어요. 저에게는 부끄러운 과거이기도 하거든요. 저에게 총여학생회장 후보 제의가 왔는데 과의 남자 선배들이 “코린이는 과의 살림을 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저 대신 후보 제의를 거절한 일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당시에는 뭔가 이상하지만, 왜 이상한지 느끼지 못했어요. 왠지 인정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1학년 1학기 학과 첫 수업에서 여성 교수님이 여자 학생들에게 “안마방 앞에서 가방 들고 기다리면서 이 자리까지 살아왔다”고 얘기했었어요. 나도 저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나,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속에서 나도 그렇게 해야 되나 마음이 힘들었어요. 학과 내에서 남자 선배들끼리 당겨주는 문화가 있었고, 여자 선배들끼리 모이는 자리도 만들어봤어요. 그런데 지속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남초 학과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학시절을 다시 재해석해봤을 때 정말 기괴한 순간들이 많더라고요. 제 삶 속에, 그래서 이전의 삶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가는 과정을 겪었어요. 그러면서 미술 치료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 활동가였다고 하는데, 상담소 활동가가 된 계기는 어떻게 되셨어요?

 

: 저는 어머니가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를 하셨어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제 삶 속에 항상 장애 여성분들이 존재했거든요. 이모로서 언니로서. 그냥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제 일상 속에 존재했어요. 저는 엄청난 운동으로 일을 선택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장애인 성폭력과 아주 밀접한 삶을 저도 모르게 살아왔었던 게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 성폭력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남들보다 민감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장애 여성은 제 일상 속에서 타자로서 존재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 활동가가 되지 않겠다고 했는데 여성 운동 그 중에서도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 활동가까지 한 경험은 여성의 삶과 정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엄마의 삶도 많이 이해하셨을 것 같아요.

 

: 맞아요. 지금은 가장 말이 잘 통하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엄마예요. 장애 여성 운동을 해왔던 선배이기도 하고, 제가 강의를 할 때 계속 자문할 수 있는 선배이기도 하고,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사례가 되어 주는 거죠. 엄마는 저의 사례를 통해서, 그리고 저는 엄마와의 사례를 통해서 더 성장하는 것 같아요.

 

: 더 돈독해지셨겠어요.

 

: 모녀의 삶이기 이전에 페미니스트 동료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해진 느낌이어서. 엄마와 같이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정말 훌륭한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4. 코린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코린: 이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모먼트가 있다기보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분노하고 있을 때가 있잖아요. 운동권 2세로서 항상 사회의 현상에 분노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근데 어느 시점부터 여성 문제에서 분노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아요. 근데 제가 상담소에서 일을 할 때 강남역 사건과 페미니즘 리부트의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이전에는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제가 지금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을 한자씩 써서 이름 앞에 양성을 쓰고 있는데요.어릴 때 어린이날 행사를 갔을 때 호주제 폐지와 관련해서 양성 쓰기를 한창 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같이 써서 명찰을 붙이고 놀았어요.그걸보고 아빠가 분노했던 거죠. ‘어디 이름을 이렇게 하면서’요. 요즘은 양성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한테는 그게 의미가 있어요. 6살, 7살에 아버지로부터 부정당했던 이름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었거든요. 두 번째는 학예회를 하는 날에 제가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서 선생님께 ‘지휘를 하고 싶다’라고 했는데 어떤 남자애랑 저랑 손을 든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남자 애를 시켜준 거죠. 그리고 저는 큰 북도 아니고 ‘넌 작은 북을 쳐라’라고 얘기를 했는데 저는 그때까지 주변에 어린아이가 하나도 없는 환경에서 제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던 삶 속에서 나에게 뭔가를 못하게 하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된 거예요. 특히 제가 여아 낙태율이 최고인 해에 태어났던 사람이거든요. 또 그 기질이 어디 가지 않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매일 지휘를 연습을 한 거예요. 근데 학예회 당일에 걔가 아파서 못 왔어요. 그래서 제가 지휘를 했거든요. 너무 통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러니까백말 띠 여성들의 생리 속에서 얼마나 큰 인정투쟁들이 있었느냐이런 생각이 좀 들었어요.

 

단호박: 저도 백마띠거든요. 신기하네요. (덧붙임) 제 태몽은 남자아이였대요. 소가 추수 때 밭을 가는 꿈이었다고요. 가족들이 다 남자아이라고 했대요. 태명은 ‘용건’이었고요. 그런데 태어나니 여자아이가 태어난거예요? 어쩌면 전 남자 태몽이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게되어요.

 

▲업무 중인 코린

 

코린: 단호박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무엇인가요?

 

단호박: 명절, 제사 때가 가장 화가 나요. “여자는 절하는 거 아니다”, “여자 애들이 음식 해야지”이라는 가부장적인 얘기를 들을 때요. 사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거든요. 우리집 가부장은 죽었는데 엄마가 큰 아빠, 큰 엄마, 작은삼촌의 눈치를 볼 때마다 불끈불끈해요. 한국 사회에 가부장은 절대 죽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빠 제사 때, 추석 때도 엄마와 한참을 실랑이 했거든요. “제사 지내지 말자”로요. 엄마가 “너희 세대 때는 너희가 알아서 하더라도 엄마는 엄마의 도리를 하겠다”라는 거예요. 엄마 안의 가부장주의가 너무 뼛속 깊구나 생각해서 답답했죠. 절하지 말고, 음식하라는 말 들을 때 저는 차녀인데 제가 한마디 하면 어른들한테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화가 나요. 한국 여성들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 아닐까요?

 

코린: 저는 옛날부터 싸웠고 장녀예요. 장녀이기 때문에 사실은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도 여자가 절은 못 했대요. 근데 엄마가 절을 시키기 위해서 투쟁해왔던 역사가 있었던 거예요. 근데 이제 제가 성인이 되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서 저는 당일에 음식도 안 하고 절만 하고 서울로 올라오고 이렇게 되니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엄마한테 가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한번은 뒤집어 놓고, 집안 뒤집을 때는 통쾌하고 막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는데, 이후에 엄마에 대한 걱정이 많이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되게 씁쓸했던 게 저한테는 남동생이 있는데 동생이 저보다 나이가 많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버지랑 아버지 쪽이랑 다 인연을 끊었는데 동생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거예요. 아빠 쪽에 연락을 하고 지내면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자신이 가부장제로서의 권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동생이 너무 잘 아는 거예요. 거기에 가면 대우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걸 누리고 있는거죠. 같은 경험을 했는데 왜 다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코린: 엄마도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어쩔 수 없음이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이혼을 하고 처음 했던 말이 “혼자 살아본 적이 50살 돼서 처음이라 뭘 하고 지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할 때 엄마의 삶 속에, 서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에 한계가 있겠다고 엄마를 이해했어요.

 

단호박: 그때 어떻게 반응하셨어요?

 

코린: 엄마에게 “페미니즘 책 읽어! 그 속에 답이 있어” 라고 얘기했던 게 생각나요. 살아온 얘기를 하니까 생각난 일화는요. 저는 엄마의 일기장을 찾아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돌이었나 봐요. 그때 고모가 “백말띠 딸년 불러놓고 잔치를 한다고 불렀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말이 엄마의 일기장에 써 있었어요. 제가 그거를 보고서 고모를 찾아가서 “내 돌잔치 때 왜 그런 말을 했어” 그런 것들을 계속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근데 생각해보면 고모는 남자 형제들이 다 고등학교까지 나올 때 핸드볼 유망주였음에도 초등학교까지밖에 못 나왔거든요. 내가 태어나도 괜찮은 백말 띠 여성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제 삶 속에는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운명 안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교육 안에서의 차별은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한때는 명예 남성이 되어서 내가 이 시대에 편승해서 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그리고 이 가부장적인 사회 안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는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확실하게“나는 그냥 페미니스트로 살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5. 코린과 단호박의 고민

 

단호박: 요즘 코린의 고민이 있나요?

 

코린: 저는 교육(성평등 교육 강사)을 하잖아요. ‘내 주변에 가장 친한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 그냥 허허하면서 넘어가면서 어떻게 강사를 할 수 있나’라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성평등에 대해 사람들을 어떤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 이전에, ‘성평등’이 설득의 대상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어려웠거든요. 설득의 언어라는 것 ‘성평등을 왜 설득해야 돼, 당연히 알아야지’ 이런 마음이었는데 근데 이제는 모르니까 알려줘야지 이렇게 됐어요.

 

단호박: 전 다 손절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예전 지인들을 만나면 페미니즘이 뭔지부터 설명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코린: 맞아요. 저도 다 손절을 해가지고 사실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자리가 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의도적으로 조금은 그런 자리에 가야겠다고 생각해요. 교육 사례를 발굴하기 위해서라도 꼭 가야 할까 고민이 되기도 하고요. 제 주변에 결혼한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 얼마 없는 지인 중에 결혼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도 보게 돼요. 정말 보수적인 교회에서 삶을 살아온 언니가 있는데요. 그 언니가 딸을 낳은 거예요. 언니가 임신했을 때부터 계속 저를 만나자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언니가 “내가 딸을 가지니까 내 딸은 너처럼 살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단호박: 너무 감동이네요.

 

코린: 저도 이 얘기 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데요. 언니가 “어떻게 해야 너처럼 삶을 살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너네 어머니가 너무 궁금해”라고 얘기를 해서 <엄마는 페미니스트-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을 선물했어요. 지금 아이가 6살인데 매해 그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고요. 보수적인 교회에 다녔던 언니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퀴어 퍼레이드도 봤다고 해요. 그때 차가 엄청 막혔는데 남편이 싫다는 반응을 보였나봐요. 그랬더니 언니가 “저 자리에 코린도 있고, 코린의 친구들이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 난 우리 아이가 그런 말 하는 사람으로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얘기를 했대요. 언니가 육아나 돌봄을 하는 과정에서 힘든 이유가 무엇인지, 구조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 하려해요. 언니의 삶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이자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이를 함께 키워야하는 주변의 어른으로서 생각할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 다시 돌고 돌아 공동체인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6. 돌봄 공동체에 대한 고민

 

코린: 김수행 교수가 “자본주의의 끝에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공동체의 형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과거의 강한 공동체만 있고, 개인은 없는 문화가 아니고 개인들이 존재하되 자유로운 연대가 가능한 형태가 될까 고민하게 되요.

 

단호박: 저는 ‘돌봄’이 고민이에요. 예전에는 독립적으로 잘 살아내야 겠다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돌봄의 영역에서는 저도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도움을 요청해야 하더라고요. 돌봄에 있어서 공동체의 상상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돌봄의 상상력이 부재하다는 걸 민우회 복지팀 ‘돌봄 공동체’ 집담회를 참여하면서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돌봄 공동체를 어떻게 꾸릴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코린: 30대 여성들한테 돌봄의 상상력은 부재하게 키워졌다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능력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나의 삶은 내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쿨하고 멋진 것인 것처럼 계속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는 별 쓸모 없는 것, 구린 것이, 나를 속박하는 것들로 묘사되어 왔기 때문에 상상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또 지역 출신 사람으로서 서울에 와서 느꼈던 개인으로서의 행복함이 있었어요. 지역에 가면 00의 자녀 같은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데 서울에서는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플 때도 혼자서 꿋꿋하게 이겨내는 것이 멋지고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한 시기도 있었는데 이걸 깨준 게 코로나였어요. 작년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코로나 밀접접촉자로 2주 동안 격리를 했었는데 원룸이라는 공간에서 혼자 있음이 2주 동안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랬을 때 ‘내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구나’, 예를 들면 제가 먹는 약을 누군가 타다줘야 되고 이런 것들이 민폐이기 이전에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들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터 돌봄을 민폐라고 인식하게 됐을까도 고민했었어요. 저는 기꺼이 폐끼칠 수 있는 사이가 되자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다른 사람이 저한테 폐를 끼쳐도 그것을 받아주면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돌봄의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의 그 폐끼침을 인정하는 것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호박: 저는 이번에 전셋집을 얻게 되었는데요. 제가 가족들이랑 같이 살고 그래서 집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뭘 제대로 봐야 하는지의 기준이 없었고, 막연히 두려운 마음만 들더라고요. 이런 고민을 동료들에게 얘기했더니 동료들이 집을 같이 봐주고 자료도 알려주고, 대출 정보도 알아봐주고, 이사과정도 살펴줬어요. 퇴근하는 동료한테 “집 보러 갈건데 같이 가주세요”라고 제안했고요. 동료들이 흔쾌히 집도 봐주고 랜선으로 본인의 집을 보고 기준을 정하라고도 해주고, 공인중개사 지인을 통해서 등기부등본에서 궁금한 것도 물어봐주었어요. 돌봄의 영역이었던 것 같아서 참 고마웠어요.

 

코린: 사람들이 돌봄에 대한 기억을 얘기해 보자라고 하면 질병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저는 일상적인 돌봄이 되게 큰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집을 진짜 안 치우는데 저의 집 근처에 사는 동료가 정말 깔끔해요. 동료가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하는데 저도 미안하니까 하지 말라고 하거든요. 그런 동료가 “접시는 내가 하고, 컵은 남겨줄게” 이렇게 얘기를 하고 설거지를 해주는 게 저는 되게 일상적으로 돌봄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단호박: 맞아요. 집담회에서도 일상적인 돌봄 얘기가 나왔는데요. 저는 독서모임 친구들에게도 돌봄을 받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만나는데 서로의 변화를 감지하고 안부를 물어주고 축하를 함께하고 바뀐 시대상에 같이 절망하고, 사회를 고민하고 우리를 둘러싼 내부 외부를 같이 나누고 고민하는 돌봄도 너무 소중한 것 같아요.

 

 

7. 애도의 시간

 

코린: 이태원 참사가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힘든 이유는 참사피해자가 저의 돌봄 구성원인 언니였기 때문이에요. 언니랑 어떻게 얘기를 했냐면 비혼 페미니스트가 돌봄을 생각하면 노년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가족이 아플 때를 먼저 생각하잖아요. 그게 1차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순간일 것이고, 독박 돌봄을 할 가능성이 너무 높잖아요. 남자인 형제들은 이미 결혼을 했고 그들은 이 돌봄의 부담을 지라고 해도 지지 않을 것만 같을 때‘우리가 서로 돌봄 공동체를 만들어서 언니 엄마가 아플 때도, 우리 엄마가 아플 때도 언니랑 내가 같이 돌보면 공동체적 돌봄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같이 했어요. 일상적인 돌봄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의 삶에 어떻게 함께 나이 들어갈 건지 상상했고 미래 과정을 함께 그려왔던 친구였기 때문에 저한테는 일상에서 돌봄의 부재가 큰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친구를 보내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일상의 구성원들이 저를 지켜봐줬고 구성원이었던 사람을 보내주는 과정에서 위로를 얻기도 했어. 특히 언니의 일상 구성원이었던 다른 친구들과 저의 관계가 생겨나면서 새롭게 관계의 확장을 이루어 나가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법적 가족에 대한 생각이 정말 많이 들어요.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왔던 우리가 모든 의사 결정을 법적가족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꼈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생활동반자법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번 계기로 많이 들었어요. 가족들보다도 친구의 취향을 더 많이 알고 있고 이 사람의 일상, 사생활을 많이 공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친구가 원하는 이별의 방식이 있을 건데 추모의 방식이 가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슬펐죠.

 

친구의 어머니는 장례를 안 하겠다고 하셔서 장례는 하지 않았고 언니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친구를 모아서 이틀 동안 추모식을 했어요. 벽에 언니 사진을 붙여놓고 여행할 때 모았던 많은 것들을 모아서 추모식을 열었는데 기꺼이 같이 나누고 함께 하고자 했던 친구들이 언니의 돌봄 관계망이었구나라는 것들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어요. 일상 속 돌봄의 관계가 말로만 존재하지 않고 어떤 행정력을 가지는 것 또한 개인들에게 중요하구나 그런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단호박: 언니는 잘 보내드렸나요?

 

코린: 사실 너무나 잘 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언니가 좋아하고 꾸몄던 공간에서 언니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초대하고 언니가 만들어 놓은 차를 함께 마시고, 언니가 썼던 책이나 글을 함께 읽고 그런 과정들이 서로가 이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뭔가 요구하고 싶음에도 가족이 아니라서 요구할 수 없음에 대한 답답함이 있고, 그리고 국가 시스템이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들을 목격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이 나라를 떠야 되나 라고 생각했어요. 국가의 기능은 무엇이지 이런 생각들이 많이 들고, 아직도 저는 언니가 어떻게 안치실까지 간지모르거든요. 제가 언니를 찾아다니면서, 어떻게 했어야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까가 아직도 계속 질문으로 남아있어요.

 

▲코린의 돌봄 관계인이었던 언니의 추모공간

 

단호박: 시간이 지체되었나요?

 

코린: 사고가 10시쯤에 났잖아요. 그랬는데 저희가 찾은 건 오후 2시 정도였어요. 다른 분들은 다 왔다가 가고 전화로 확인을 했는데 언니만 확인이 계속 안 됐었고 서울이 아닌 곳에 있었어요. 근데 그 안에서 왜 그렇게 확인이 안 됐었는지도 너무나 궁금하고, 그 언니를 찾기 위해 장례식장에 계속 전화를 했는데 아직 경찰이 안 와서 신원 조회를 안 했다고 하는 곳들이 많았어요. 그와중에 대통령이 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뉴스를 실종자 가족 대기실에서 봤어요. 대통령이 그 자리에 가서 인력을 쓸 게 아니고 빨리 사람들을 확인하는 데 썼어야 했다는 거죠.

 

단호박: 요즘 일상은 어떠신가요?

 

코린: 저는 아직도 애도의 과정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내야 되는지가 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일상적으로 계속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드니까... 좋은 이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요. 아무래도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제가 돌봄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니를 그런 방식으로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씨모어 사장님(언니의 돌봄 관계망이자 친한 친구):만일 빈소를 차려서 장례를 치렀으면 K-장례문화에 따라서 너무 딱딱하게 보냈을 것 같아요. 그런 방식보다 우리끼리 평소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좋아하는 공간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던 것이 저만 원했던 방식은 아닌 것 같고, 우리한테도 위로가 되었어요. 나중에 내 장례식도 친구들이 내게도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린: 저는 그 지점이 좋았어요. 장례식장이었다면 우린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뱃지 하나도 못 달았는데 그 공간에서는 우리가 호스트로서, 상주로서 역할을 할 수가 있었잖아요. 서로 언제부터 언제까지 자리를 맡을지, 안내할지, 각자 먹은 건 각자 뒷정리까지 하는 그런 역할 분담에서 친구로서, 언니를 보내주는 상주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이 과정들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장례였다고 생각해요.

 

▲좌 카페 시모어(코린의 돌봄 관계망이었던 언니가 좋아하던 것들로 채워진 전시)

▲우 카페 시모어(코린의 돌봄 관계망인 언니의 친한 친구이자 코린의 지인)에 전시된 [애도일기]

 

 

※카페 시모어는 망원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로 희생당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진상이 규명되어 여러분의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8. 버터나이프 크루 활동기

 

단호박: 버터나이프크루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코린: 농담 삼아 사람들에게 윤석열 정부가 되면 여성 운동하다가 구속 한 번 되어야지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는데 농담삼아 말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권이 나를 직접적으로 타겟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윤 정부가 되자마자 저에게 영향을 미쳤어요. 버터나이프크루로 인해 청년 정체성이 확고해졌어요. 청년이 신자유주의 안에서 개인화되어 있고, 뭉치지 못할 존재로서 각인되어 있었구나, (정부가) 가장 손쉽게 청년을 지우려고 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마도 정부는 공대위를 차리거나 집단적인 움직임을 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에요.

 

왜냐면 그냥 단체이고, 심지어 단체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단체들이 훨씬 많거든요. 개인 청년들이 성평등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더 개별화되기 쉬울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여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전체 17개팀 중 한 팀을 제외하고 모두 공동대책위원회에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이 사업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았고, 보조금을 교부받기로 한 날 재검토를 해야겠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당시 여당 원내대표의 페이스북 글로 계속 미뤄지다가 그 다음에는 ‘성평등’, ‘젠더’가 들어간 건 안 되겠다.라고 하다가 전체가 안되겠다 가는 것이 여가부 폐지 흐름의 시작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려웠던 지점은 자원이 없는 청년들을 타켓팅 삼았기 때문에 저희는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랐어요.

 

단호박: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여가부의 입장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궁금해요.

 

코린: 지금도 여성가족부에서는 "우리는 ‘성평등’을 빼고 하라고 사업 변경을 요청한 것"라고 말해요. "사업 시행사 측에서 못하겠다고 한 것이지, 우리가 사업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니다"라고요. 결국에 책임을 다 회피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왜 사업을 취소해야 하는지 사유를 보내달라고 여가부에 요청하고 있고, 여가부는 사업 포기 신청서를 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사업포기 신청서를 내려면 왜 여가부에서 사업을 승인하지 않은 건지 이유를 먼저 알려달라고 하고 계속 반복 중이에요. 여가부도 사업을 폐지시키는 명분이 없잖아요.여가부와 버터나이프크루의 간담회에서 "국회의 심의가 끝났고 선정까지 다 끝낸 사업을 어떻게 없앨 수 있냐, 선례가 있냐, 정책적으로 말이 되는 것이냐" 라고 했을 때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거든요.계속 얘기했던 것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문제 삼은 사업의 내용과, 남성 참여자가 얼마나 있느냐 라는 것이었어요. 근데 이건 사실관계에서도 틀린 부분이 있어요. 모두 여성 참여자인 것 같이 이야기하지만 남성 참가자들이 다수 있었고, 버터나이프크루 3기에도 남성이 있었고, 버터나이프크루 4기에는 제일 많기도 했거든요.정부에서 성평등을 낙인 찍는 사회에서 어떤 남성 청년이 성평등한 사회를 원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들고, 이 사업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남성 참여자의 비율을 늘리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코린:여성가족부도 남성참여자 목표가 30%인지, 50%인지 수치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막연히 적다’라고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하는건 말이 안되는 거죠. 한창 취업 청탁이 문제였잖아요. 그랬을 때 전화 한 통으로 누군가는 취업이 되고, 전화 한 통으로 누군가는 열심히 준비해 온 사업이 취소될 수 있구나 싶고, 청년들은 무엇을 공정이라 믿고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는가, 안전하게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요. 선거 초창기에는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던 걸로 기억했거든요. 이제 청년은 도구였나 싶어요.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권력이 원하는 바에 의해서 누군가가 원했던 세상은 가장 빨리 지워지는구나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 사례였고 이것은 버터나이프크루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록화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에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 기자회견,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단호박: 버터나이프크루에서 어떤 사업을 하실 예정이었나요?

 

코린:1인 가구 청년의 일상의 구성원 되기 프로젝트 ‘서로 돌봄 119’였어요. 1인 가구 청년들이 서로를 돌볼 수 있게 하는 기획이었어요. 3기 때는 자기 회복 프로그램에 대한 거였어요. 1인가구의 일상의 안녕을 묻는 안녕 프로젝트였다면 이번에는자기 회복과 자기 돌봄에서 멈추지 않고 서로 연결되는 것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질문을 해보려고 했고, 특히 이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1인 가구를 청년들에게 돌봄은 굉장히 중요하고, 이것이 성평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이것은 돌봄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가족 밖에서의 돌봄을 이야기하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일상적으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서로 돌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키트를 만들고 구급함처럼 ‘돌봄 구급함’을 만들려고 했어요, 필요할 때 단호박님의 구급함을 보면 법적 가족의 연락처나 돌봄 보호자 연락처나 이런 것들이 적혀 있고 혈액형이나 내 몸의 질환, 그리고 내가 원하는 돌봄의 방식을 알 수 있는 것이요. 예를 들면 돌봄을 받을 때도 내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절대 올라가지 마세요’라든지 이런 것들을 넣어놓는 돌봄 구급함을 기획했어요.

 

단호박: 너무 좋은 기획이네요. 현재는 예산이 교부되지 않은 상태로 진행을 하고 계신건가요?

 

코린: 지금은 수행사인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에서 외부 펀딩으로 사업비를 마련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일각에서는 ‘너네 결국 사업비 받아서 된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국가에서 청년들이 성평등 문화를 만든다는 것을 정책적으로 수행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국가 정책으로 청년성평등 사업을 진행한다는 건 정부가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동의하고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근데 이젠 정부가 이것에 동의하지 못한다로 돌아섰다는 것이죠. 정부가 성평등에 대해서 어떤 기조와 목소리를 내는가가 우리에게 안전망이 되어주는데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요.

 

단호박: 정부에서 해줘야 하는 것을 못하기 때문에 대안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서 상상을 하고, 정부에서 참고할 수 있게 자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애석하네요.

 

코린: 그러면서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남성 참여율이 저조하다, 여성만을 위한 사업이냐 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부가 성평등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성평등을 이야기하면 일반 청년이 아니다라고 하는 정부 때문에 청년은 온전히 나의 생각들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생각하게 돼요.정부에서는 정책을 만들 수 있지만 문화를 만들기 어렵잖아요. 이번 사업이 성평등 문화를 만드는 정책이었다는 게 저는 굉장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문화를 만드는 것은 개인들이 움직여서 아주 작은 단위부터 바꿔내야 되는 지점이잖아요. 이런 정책으로만은 할 수 없는 부분을 청년들이 하겠다는 건데, 이걸 못하게 했다는 거죠. 한 팀당 최대 600만 원까지 지원 받을 수 있는데, 그마저도 인건비는 지원이 안돼요. 성평등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내 주변부터 바꿔내자는 사람들을 예산 낭비하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일반 청년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 여전히 화가 나죠.

 

단호박: 코린님이 버터나이프 크루 공대위를 꾸리시면서 민우회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요청을 하셨잖아요. 그때 어떤 조언을 들으셨나요?

 

코린: 초반에는 이슈가 확 불타올랐는데, 다음엔 다른 이슈들에 묻히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어떤 동력을 쌓아나가야 하는지 각자의 단체들은 할 일도 많으니까요. 민우회에서는 ‘공대위 굉장히 잘했다’, ‘이만큼 해온 것도 사실은 잘한 일이다’라고 해주셨어요. 결과주의적으로 저희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버터나이프크루도 살려내지 못했고, 국가로부터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했는데 우리가 잘해왔나 생각을 한거죠.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소통해 왔고, 의미화하는 방법들을 많이 배웠거든요.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던 지점들, 우리의 성과들을 짚어내지 못했던 것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됐어요. 버터나이프크루 지지 요청을 했을 때 단체가 99개 단체가 모였어요. 여성단체도 있었지만 지역에서 소모임처럼 작은 단체들이 우리에게 지지를 하고 연대한다고 해주신 거예요. 굉장히 감사했죠. 사회가 하는 평가가 아니고,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나, 우리가 스스로 하는 평가에 집중했어요. 사안 자체는 굉장히 폭력적이었지만 이것들을 함께 풀어나가는 과정들에 서로가 있음을 계속 목격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의미있었어요.

 

단호박: 버터나이프크루의 앞으로 계획이 있으신가요?

 

코린: 사실 잘 모르겠어요. 생각하고 있는 건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 기조에 버터나이프크루도 당연히 함께할 수밖에 없고 그 흐름에 함께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일상에서 작은 곁을 내서 이 운동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단호박: 너무 따뜻한 마음이네요. 곁을 내서 같이 조금씩 연대하면서 손이 닿는 거리에서 서로 존재를 확인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게 너무 필요해 보여요.

 

코린: 크루분들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회의도 잘 못오는데 내가 계속 함께 해도 되는 게 맞냐’는 질문을 하실 때 죄송스러웠어요. 저는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를 서로 느꼈으면 좋겠거든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일상에서 버터나이프크루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 운동을 어떤 식으로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9. 코린의 민우회 경험기

 

단호박: 코린은 어떻게 민우회 회원이 되셨어요?

 

코린: 정말 단순해요. 저랑 같이 활동하고 있는 혜영님이 후원해야 된다고 했어요. 너무 훌륭한 곳이라고 얘기해 주셔서 후원을 시작했어요. 어머니도 여성단체에서 활동을 하니까 어딘가에 후원하는게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민우회에서 회원들이 뭔가를 같이 만들어 나가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저도 활동가로서 살다가 프리랜서로 살게 되면서 내가 어떻게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 수 있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때 민우회에서 나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자리들을 나가고, 강의를 듣고 하면서 민우회에서 나의 페미니즘이 자리를 찾을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단호박: 김진숙 노동자의 강연도 오셨었죠? 그때 뵀던 것 같아요.

 

코린: 맞아요. 그때도 갔었고, 2020년에 프리랜서 노동권 연구를 했던 “프리랜서 밥, 잠, 쉼”에 참여했었어요. 제가 낯가리는 사람이라, 후원의 밤 때도 낯가리는 내향인들 자리에 앉았거든요. 그래서 더 많은 행사에 가기도 어렵고, 프리랜서라 시간을 정기적으로 내는 것이 어려워서 많은 회원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요.

 

단호박: 민우회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으세요?

 

코린: 저는 민우회의 계정을 팔로우해서 활동을 보는 것이 일상의 힘이 돼요.

 

 

단호박: 활동가들은 하루에 3개씩 올리면 회원분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고민하는데요. 정말 다행이네요. 활동가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힘이 될 것 같아요.

 

코린: 저는 팔로우가 별로 없어서 올라오는 게 대부분 민우회 활동일 때가 많거든요. 그럴 때 일상 속에서 계속 만나는 게 좋았어요!

 

 

10. 우리의 일상(풋살, 커피, 여행)

 

단호박: 코린님의 일상의 큰 고민은 뭔가요?

 

코린: 풋살을 하는데요 어떻게 양발을 사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추워지는 속에서 어떻게 부상 당하지 않고 풋살을 할 것인가 예요.

 

단호박: 민우회도 얼마전에 1회 민우풋살리그를 했거든요. 대전에서 모여서 풋살리그를 하는데 너무 멋있었거든요. 풋살을 하신다고 하니 또 반갑네요. 풋살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코린: 저는 세 달 정도 됐는데, 살림에서 하고 있어요. 속상한 건요. 저는 제 고향 친구들하고 축구를 했거든요? 남자애들인데, 자기들은 축구 안한지 20년 됐다고, 너무 오래됐다고 하는데 저보다 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릴 때 몸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고 느껴요. 어릴 때부터 축구를 했다면 지금은 양발을 쓸 수 있을텐데하고요.

 

단호박: 경기에서 공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움직임을 하는 것도 큰 경험이잖아요.

 

코린: 맞아요. 저는 태권도도 했고 합기도도 했고 어릴 때 운동을 썼고, 어머니도 제가 액션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도 몸 쓰는 거를 굉장히 싫어했었거든요. 그러면서 운동도 잘 하지 않았는데 운동을 하다보니 제가 몸에 대한 통제들이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 통제를 느끼고 깨나가는 과정 속에 있어요. 예를 들어 다리를 끝까지 차야 되는데 다리가 끝까지 차지 못하는 것, 운동에 적합하지 않은 자세들이요. 예전에는 뛸 때 가슴에 대해서 걱정이 됐는데, 이제 신경 쓰지 않는 나를 발견할 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몸의 장점들을 활용해서 몸싸움도 잘하고 축구도 잘 하고 싶어요. 저는 대체로 인생에 흥미가 크게 없는 사람인데요. 요즘은 운동을 통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느껴요.

 

 

▲풋살하는 코린

 

단호박: 커피를 좋아하신다고요?

 

코린: 네. 지속적으로 관심 있는 건 커피예요.

 

단호박: 전 커피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맛있는 커피를 좋아해요.

 

코린: 좋아하는 원두가 있으신가요?

 

단호박: 저는 에티오피아 좋아요. 산미를 좋아해요.

 

코린: 이번에 생일을 맞아서 드립 장비도 다 바꿨어요.

 

단호박: 커피는 주로 드립으로 드시나요?

 

코린: 드립으로 많이 마셔요.

 

단호박: 저도 드립을 좋아해요. 집 근처나, 민우회 근처 로스팅하는 카페에서 원두를 구입해서 집에서 마시곤 해요. 코로나 때 카페를 못 가니까 그때부터 취미가 됐거든요. 저는 동생이 의료계종사자여서 코로나 때 바깥 외출을 조심했어요. 그러면서 올 초에는 하루 루틴으로 커피 내리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었어요.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 그 여유가 너무 좋았어요. 멍 때리고 한 20분 동안 즐기는 그 과정이 좋았어요.

 

코린: 프리랜서가 되면서 너무 좋은 점은 오전에 강의가 없으면 커피를 마시면서 그 시간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게 너무 좋고 이번에 그라인더와 저울과 오리가미 드리퍼를 세트로 원하는 것을 구비를 해서 커피존을 마련을 했어요. 그게 아주 마음에 들어요. 최근에 제가 제일 꽂혀 있었던 원두는 콜롬비아 엘파라이소 리치라는 원두가 있어요. 이 원두는 볶고 나서 열매를 넣어서 그 향을 입히는 거라서 향이 굉장히 독특한데 그 원두 중에 망고향을 입힌 것도 있고 피치향을 입힌 것도 있어요. 요즘은 상태가 좋지 못해서 수입이 잘 안 된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제가 죽으면 차례상 제사상에 아침 저녁으로 핸드드립을 꼭 한 잔씩 내려서 올려야 된다라고 꼭 적어놨어요.

 

단호박: 너무 멋진 요청이네요!!!

 

코린: 요즘에 가장 나다운 게 무엇일까 생각할 때 지속적으로 계속 좋아하는 건 커피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고 외국에 갈 때도 로스터리 카페를 꼭 알아가요. 그래서 동네에 그 로스터리 카페에서 원두를 사서 그 동네에 있을 때는 가벼운 철제 드리퍼로 내려서 마셔요. 저는 집에서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내려 마셔요.

 

단호박: 저는 해외여행 갔을 때 커피를 못 먹어서 마지막날 울었어요. 스페인에 간 적이 있었는데 여행 중에 커피를 딱 한 잔 마신거예요. 그것도 충격적으로 버거킹에서 마신 거에요. 처음으로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를 느꼈어요. 지인들과 같이 간 여행이었는데 지인들 좋아하는 걸 다 해주다가 정작 제가 좋아하는 걸 하나도 못 했다는 걸 깨닫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여행지에서 꼭 커피를 먹는 시간을 비워둬요.

 





















▲(좌) 코린 왈 "커피스테이션과 페미신전"                                            (우) "집에 있는 커피스테이션 및 일인가구의 흔한 가훈"

 

 

코린: 저는 첫 배낭여행지가 인도였어요. 제 삶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였어요. 자유로움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어요. 그 여행에서 이번에 희생되었던 언니도 만나기도 했어요.

 

단호박: 그리고 내년에는 태국을 가신다고요?

 

코린: 네 자랑을 하자면 1/10~3/5일까지 태국에 갑니다. 태국은 항상 거치는 곳이었지 직접 간 적은 없었거든요. 치앙마이를 한번 갔었는데 좋았어서 이번에 가요. 딱히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고 한국에서는 프리랜서가 3월까지 일이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 맛있는 걸 먹으면서 좀 쉬고 오려고 해요.

 

단호박: 여행할 때 컨셉 같은 게 있으신가요?

 

코린: 저는 외국 여행을 갈 때 나만의 페미니즘 여행을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별거 아닌데 파리에 갔을 때는 시몬드 보부아르를 만난다는 컨셉을 생각했어요.

 

단호박: 그럼 생가를 찾아가거나 그런 여행인가요?

 

코린: 파리에 시몬드 보부아르의 인도교가 있거든요. 파리의 베르시 공원과 프랑스 국립 미테랑 도서관을 연결하는 거리인데요. 파리에 있는 스물 몇 개의 다리 중 유일하게 여성 이름을 딴 다리거든요. (추가) 미테랑 도서관은 직지심체요절이 있는 곳이기도 해요.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방치된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고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라는 것을 밝혀내죠. 시몬드 보부아르의 이름을 딴 다리를 건너면 한국 여성이 세계사의 한 획을 긋게 된 곳이 나온다니. 그곳을 21세기의 페미니스트가 간다는 것에서 여성주의와 여성의 역사가 이어지고 계속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황홀하기 마저 했어요. 여행 안에서 여성주의적인 것들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예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는 기차를 타고 여성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을 했었어요.

 

단호박: 여성주의적인 것을 찾아가는 여행 너무 멋있네요. 저는 여행지에 컨셉을 잡고 가는데요. 제주도 갈 때 첫 날은 동백 투어, 둘째날은 오름 투어를 하는 식으로요. 저도 다음에는 여성주의 여행을 한번 시도해 봐야 겠어요.

 

코린: 어느 나라를 가도 역사들은 남성을 중심으로 모든 정보가 쓰여져 있으니까 그 나라의 여성주의 서사를 찾는 것들이 어려울 때가 많아요. 특히 영어를 못하면 정보를 접근하기 어렵잖아요. 그래도 번역기를 이용해서 정보를 찾을 수 있으면 찾으려고 하고 여행 안에서 소소함을 발견하려고 해요. 지속가능한 여행에 대해서도 고민해요. 여행지를 가더라도 엄청 깎아요. 저는 아시아권 국가에 갔을 때 관광객이라서 덤터기를 쓰게되는 상황이 있는데 최대한 덤터기를 안 쓰려고 해요. 그런데 관광객이 여행지의 물가를 올려놓는 주범이거든요. 처음에는 여행자에게만 물가가 반영됐다가 나중에는 생활 물가가 되어버려 인플레이션이 오는 것들이 빈곤한 나라를 더 빈곤하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고민하면 윤리적인 여행을 하기 위해 노력해요.

 

단호박: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지점이에요. 윤리적인 여행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좋은 방법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코린: 계속해서 뭔가 이어지는 건데요. 일상 속에서 우릭 돌봄을 생각할 때 일상 속에서 나다움을 아는 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단호박님은 일상 속에서 나답게 하는 것이 뭘까요?

 

단호박: 저는 뭔가 지쳤거나 힘이 없거나 그럴 때 서점에 가요. 현실을 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뭔가 다른 이야기거리는 찾아나서고, 저는 지금의 저를 위로할 수 있는 문자나 문장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 문장 하나로 힘을 얻을 수도 있고 현실의 냉혹함을 받아들일 수 잇게 되는 것도 같고요.

 

코린: 그게 여행인 것 같아요. 책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잖아요.

 

단호박: 그런데 나답게 하는 걸 또 생각해보니 혼자 있을 때인 것 같기도 해요. 혼자 있을 때 커피를 드립해서 마시거나 책을 고르거나, 영화관에 가는 것 등이 나를 나답게 하는 것 같아요.

 

코린: 혹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 보셨나요? 정말 시간을 잘 쓴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요즘 영화값도 많이 비싸졌는데, 시간을 들이는 게 무엇인지, 영화를 책임있게 만드는 영화는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어요. 양자경 알고 계셨어요?

 

단호박: 네 영화 봤어요! 저도 그 영화가 너무 좋았답니다..ㅠㅠㅠㅠㅠㅠ 양자경님은 예전 성룡 영화에서 봤었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에에올을 보고 이렇게 썼어요. “다른 유니버스에서 내가 잘 실패하거나 잘 성장하고 있으면 서로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줄거라고 한다. 연대는 나로써의 연결 또한 포함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좋았다”

 

코린: 마블 영화들에서 관점을 잃어가는 영화들 속에서 에에올은 관점을 담은, 훌륭한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요즘 장르영화가 많이 사라져 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장르영화가 시도되는 것들이 너무 좋았어요. 이제는 인기없어진 어떤 장르를 ‘시도함’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하는데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가족주의 넘어서 관계의 따뜻함, 일상을 연결하는 관계들의 중요성을 최근에 많이 느껴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최근 상실을 겪으면서도 냉소적으로 생각할 뻔 했는데, 그때 그러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영화였어요.

 

단호박: 코린은 가장 나다울 때가 언제예요?

 

코린: 저는 여행할 때가 가장 나다운 것 같아요. 새로운 환경 안에서 변하지 않는 나를 목격하러 가는 것 같고, 마시는 커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을 마주하는 것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자아들도 계속해서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주기적으로 떠나줘야 하는 것 같아요. 왜 여행지에서도 성차별적인 상황들을 맞닥뜨리는 것을 감각함도 재미있어요.

 

단호박: 너무 재미있어요. 대화할수록 우리의 연결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공통점이 많은 사람이어서 우리가 만났구나를 생각하게 돼요.

 

▲코린과 단호박

 

 

전화 한통으로 연결되었을 뿐인데

알고보니 저희는 드센 백마띠였고, 사주에 물도 없고, MBTI도 같고, 해방촌의 좋아하는 카페도 겹치고, 커피와 영화, 여행을 좋아하는 관심사, 고민도 겹쳤습니다. 언젠가 오며가며 스쳤던 그 인연이 모여 크로스인터뷰를 하게 되었겠죠. 

 

코린님은 에너지 넘치고 페미니스트로서 필요한 곳곳에서 의견을 얘기하는 회원이었어요. 살아오며 겪은 일들, 어려웠던 애도의 이야기, 요즘의 고민을 나눠주어 고맙습니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코린을 만나셨을 수 있어요. 그때 우리 반갑게 인사하게 되길 바랍니다.

 

긴 인터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년 마지막 크로스 인터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