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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후기] "나의 실패의 원인은 바로 남녀평등이라는 거였어."

2024-02-22
조회수 835

 

“콘셉트(너무나 컨셉이라고 쓰고 싶네요..)가 있는 책모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진행하게 된 박완서 읽기 소모임!

 

 

안녕하세요. 저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 은사자입니다.

모두가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책모임을 하되, 뭔가 새로운 느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단편소설 100편 읽기 모임’ ‘동아시아 소설 읽기 모임’등을 떠올리다가...!

 

'청소년기에 열심히 읽었던 박완서 작가를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그래, 한 작가를 꾸준히 읽어보는 거야!' 하며

〈박완서 읽기〉라는 정직한(!) 이름으로 소모임을 진행해보게 되었습니다.

 

 

출판사 ‘세계사’에서 박완서 작가 타계 1주기를 맞아 작가의 장편 소설 및 연작 소설을 작품 발표 순서대로 구성해 출판했는데요.

등단작인 나목부터 마지막 장편 소설인 그 남자네 집까지! 30여 년에 걸친 박완서 작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첫 모임에서는 한정된 일정 속에서 무슨 책을 읽을지 논의하였는데요.

등단작인 나목과 마지막 장편소설인 그 남자네 집은 꼭 포함하고 나머지는 잘 접해보지 못 했던 작품으로 선정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목’‘목마른 계절’‘살아 있는 날의 시작’‘서 있는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아주 오래된 농담’‘그 남자네 집’

총 7권을 함께 읽기로 하였어요.

 

 

 

그럼 각 모임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일부를 공유해봅니다!

 

 


 

 

는 와락 모멸을 느끼고 쏜살같이 혼자서 길을 건넜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도록 여러 골목을 꼬부라진 후,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 지독한 반쪽의 슬픔과 허기증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 환희와 포만을 얻는 것일까고. 어떡하면 가끔 가끔 엄마의 딸이 되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고. 어머니한테 의치를 다시 끼우게 할 수는 없을까고. 그렇지, 의치를 끼우게 해야지, 강제로라도 내가 어머니의 딸인 게 아무리 거북해도 못 면하듯이, 엄마도 거북한 의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의치를 기우게 해야지. 강제로라도, 애원을 해서라도.

그러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이어 살고 싶다로 고쳤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두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도 나를 처리할 수 없다. (P. 217)

 

 

머니를, 지금의 내가 비참한 것만큼의 다만 얼마라도 비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너까지 어떻게 돼봐라. 너의 어머니 신세가 뭐가 되나."

큰어머니가 분명 그랬겠다. 어머니를 남들이 불쌍하게 여기도록 해줘야지. 자식이라고는 없는, 딸도 없는 불쌍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어야지.

죽고 싶다. 죽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문득 전쟁이나 다시 휩쓸었으면 싶었다. 오빠들이 죽은 후에도 내 인생이 있다는 건 참을 수 없어도 내가 죽은 후에도 타인의 인생이 있다는 건 참을 수 없다. 다시 전쟁이 몰려왔으면. 지금의 나는 전쟁에 의해 구제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P. 304)

 

 

“오,어떡하면 자네가 알아줄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미칠 듯이 암담한 몇 년을, 그 회색빛 절망을, 그 숱한 굴욕을, 가정적으로가 아닌 예술가로서 말일세. 나는 곧 질식할 것 같았네. 이 절망적인 회색빛 생활에서 문득 경아라는 풍성한 색채의 신기루에 황홀하게 정신을 팔았대서 나는 과연 파렴치한 치한일까? 이 신기루에 바친 소년 같은 동경이 그렇게도 부도덕한 것일까?”

“선생님은 마치 육신을 해탈한 도사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P. 360)

 

- 박완서, 나목 중

 

 

Q. '나목', 어떻게 읽었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문장이 아름답다 생각했고요. 인간의 심리가 단순하지 않잖아요. 딱 잘라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해낸 지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애 딸린 유부남'과 젊은 여성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인데 (현실을 떠올리며)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로 읽기 어렵기도 했어요. 어떤 장면에선 '안 돼...!' 하는 마음이 들기도..."

 

"저는 중학생 때 필독서로 이 책을 접했는데요. 그때도 엄청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다만 그때는 경아에 이입해 옥희도 씨를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면서는 (옥희도 씨가) 비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아는 굉장히 서늘한 사람처럼 느껴졌구요. 십수년의 차이를 두고 다른 느낌, 색깔로 느껴지는 점이 신기했어요."

 

 

Q. 주인공인 '경아' 캐릭터, 어떻게 생각했나요?

 

"너무 나만 생각하는 캐릭터인 게 재밌었어요. 같이 일하는 동생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경아가) 진짜 귀찮아 하잖아요. 실제로 옆에 있다면 별로 좋아하기 힘든 캐릭터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기 (이기적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지만 또 변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렇게 복잡한 사람이 소설의 주인공인 거구나. 밉기도 하면서 이해도 되고. 어리석으니까 답답하기도 한데 짠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책잡히지 않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요즘'의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했어요. 흠 없는 사람, 생각도 행동도 올바르게 하는 사람. 나쁜 사람은 '평평하게'만 나쁘고, 주인공이 그런 사람에게 사이다 한 번씩 날려주고. 실제로 비평이나 감상도 그런 식으로만 이뤄지는 것 같아요. 맥락이 아니라 한 문장, 한 장면만 뜯어와서 비난하는 상황이 떠오르더라고요."

 

 

Q.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는 모녀관계가 중요하게 등장하는데요. 경아와 경아 어미니의 관계를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해요.

 

"전쟁으로 아들을 잃고 경아 어머니가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잖아요. 그런 어머니를 그저 지켜만 봐야 했던 경아에게서 자기파괴적 욕망을 느꼈어요. 아무 남자랑 자고, 대단히 사랑하지 않았던 태수와 결혼을 하고...경아는 딸이 아니라 그냥 경아로 살고 싶었을 거라 생각해요."

 

"경아는 엄마를 미워하지만 용서하고 싶어하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용서 받고 싶은 것처럼 보여요. '(오빠의 죽음은) 내 탓이 아니라 전쟁 때문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할 거야.' 중간에 옥희도 씨 집을 찾아가서 옥희도 씨 부인에게 안겨 위로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어머니는 경아를 용서해주지 않았지만 옥희도 씨 부인이 그냥 안아주었을 때-본인은 오히려 옥희도 씨 부인에게 나쁘게 행동한 적이 있지만- 경아는 '용서 받는 경험'을 하게 된 거 아닐까 생각했어요."

 

"경아 어머니가 이해 되기도 했어요. 눈 앞에서 자식이 죽으면 누군들 그렇게 되지 않을까. 경아 자신도 재난 이후 변했으면서, 어째서 엄마는 그 일을 겪기 전처럼 살아가길 바라는 걸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끝까지 읽고나니 수많은 유가족이 떠올랐어요."

 

"(경아와 어머니에게) 이상한 말이지만 두 사람만의 '전우애'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장면(집에 폭격이 떨어저 오빠가 죽는)을 본 사람은 그 두사람이잖아요. 경아가 다 알진 못 했겠지만, 엄마가 가진 고통을 알아주는 사이였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Q. 당시 한국 사회가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혹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빈대떡집과 대폿집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어요. 당시에 대폿집은 남성들만 갔나보죠? 경아와 동료가 가면 안 될 곳을 들린 것처럼 묘사되고 빈대떡만 포장해서 나오는 장면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예전엔 저렇게 연애했을까? 연락 수단이 없으니 다방에서 두 시간씩 사람을 기다리고, 마냥 기다리는 그런 모습이 생경했어요."

 

 

나무와 두 여인,1962,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리움미술관[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출처: 가난하고 불우했던 화가? 우리가 잘 몰랐던 '뚝심 거장' 박수근(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24181)

 

 

나는 내 허물을 딴 핑계들과 더불어 나누어 갖기를,

나아가서는 내가 지은 허물만큼 그동안 나도 충분히 괴로워했다고 믿고 싶었다.

- 박완서, 나목 중

 

 


 

 

“연지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대학 교육을 마치고 잡지사에서 일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일도 결혼도 여성성에 기대지 않고 남성과 평등한 상태로 영위해나가고자 한다. 이런 연지를 부모님 세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연지는 자신의 요구조건(평등한 결혼생활)을 수용해줄 수 있는 오랜 친구 철민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대학원 공부를 하기로 하고 철민부터 공부를 시작한다. 밖에서 일하는 연지와 살림을 맡은 철민 사이에는 '여성의 본분'에 대한 갈등이 시작된다.” (출판사 ‘세계사’ 책소개)

 

 

‘서 있는 여자’는 1980년대 당시 세대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지금과 대단히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서 있는 여자'를 읽고 나눈 이야기는요!

 

 

 

"그래서 부모한테 이가 되는 거라면 기꺼이 당해줄 수도 있는데 그렇지도 않으니까 탈이지. 오늘 우리 엄마 봤지? 참 안돼 보였어. 엄마가 목적한 건 아마 하나도 못 이루고 말았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자식이란 어떤 자식이건 궁극적으론 배신자라는 걸 엄마는 왜 모를까?" (P. 67)

 

"여봐, 이 대목에서 또 왜 그놈의 남녀평등은 튀어나오누? 재수없게. 그냥 평등도 아니고 이를 악물고 절대 평등을 주장 할 때, 자기 얼마나 매력 없어지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남자들 즈이들 눈에 매력 없어 보인다는 유치한 공갈로 여권운동을 쳔년만년 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얕은 꾀에 안 넘어가. 미안해" (P. 251~252)

 

러나 지금 연지가 허위단심 친정집에 도달해서 유일하게 불을 밝힌 아버지의 창을 보고 우러난 건 반가움도 동경도 아니었다. 그건 반감이었다. 그녀는 그 창 속의 세계가 얼마나 배타적이고 비정하고 협소한가를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 이외는 단 한 사람도 더 들일 수 없는 협소한 세계의 불빛이 따뜻할 리가 없었다. 그 불빛을 허구한 날 바라다만 보고 한 번도 침범해보지 못한 어머니가 불쌍해서 가슴이 저렸다. 어머니는 지금 어떤 불빛 밑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까. (P. 272)

 

의 실패의 원인은 바로 남녀평등이라는 거였어.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기보다는 바로 남녀평등이란 걸 더 사랑했거든. 남녀평등에만 급급한 나머지 사랑까지도 생략하고 남자를 골라잡았던 거야. 그를 남편으로 골라잡은 건 사랑 때문도 존경 때문도 조건 때문도 아니고 그가 모든 면에서 나보다 못하다는 거였어. 부모가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기 전부터, 사람들이 수군대며 비웃기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 그가 나보다 못하다는 걸. 나는 그의 나보다 못한 점을 사랑하거나 연민함이 조금도 없이 그냥 이용이나 해먹으려 했던 거야. 그걸 이용해 거저먹기로 남녀평등을 이룩해보려 했던 거야. 실력이나 인격으로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남자를 일부러 골라 잡아서 평등한 부부 관계를 이룩해보려고 마음먹은 거야말로 잘못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평등에 대한 크나큰 오해였고 자신에 대해 더러운 모독이었다. (P. 457)

 

- 박완서, 서 있는 여자 중
 

 

Q. 연지와 철민, 두 사람 관계가 결혼 전후로 변해가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죠.

 

“둘이 가사노동을 ‘반반’으로 하려고 하는데 철민이 일하는 게 통 마음에 들지 않잖아요. 가사노동은 정말 숙련된 노동이고, 모든 것을 관장하고 콘트롤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철민이는 가사노동을 하는 게 아니라 실은 연지가 시키는 일만 하죠. 철민이는 자기가 열심히 나눠 한다고 온갖 생색을 내지만 꼴랑 행주 삶는다고 집안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요즘 SNS상에서도 그런 글 많이 본 거 같아요. 서로 해야할 일을 하나 하나 다 적어서 이건 누가 하고, 저건 누가 하고. 근데 실은 ‘이거’와 ‘저거’를 구분하고 해야 할 때를 살피는 것까지가 가사노동인데. 그리고 ‘쓰레기통 비우면 다시 쓰레기봉투를 채워 넣는다’ 이런 거까지 목록화 할 수는 없잖아요.”

 

”살림 분담이 잘 안 되면서 연지가 일에도 치이고, 가사에도 치이는데 그러다 갑자기 가정폭력에 노출될 줄은 몰랐어요. 읽는데 벅찬 지점이 있더라고요.”

 

 

Q. 연지 엄마 ‘경숙 여사’가 이혼한 친구를 찾아다니는 이혼 순례는 어떻게 보셨나요?

 

“엄청 재밌는 설정이었어요! 연지와 경숙의 이야기가 교차해서 등장하잖아요. 자유를 찾아 떠난 ‘이혼녀’ 친구도 실은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걸 알고 실망하는 ‘경숙 여사’의 모습이 재밌었어요. 경숙은 결혼 생활이 힘들었으니까...이혼 순례 과정에서 (경숙과) 대비되는 이혼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당당한(!) 친구의 싱글라이프가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동창 모임에서는 ‘젠체’하는 닥터박이 실은 일상도 엉망이고, 술만 마시고 그런 모습을 보고 경숙이 실망하잖아요. 근데 뭐, 이혼하든 안 하든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행복하기만 해요? 누구나 그렇죠. 이혼하고 자유를 느끼기도 하지만 외롭기도 할 거고, 아님 뭐 경숙이 집에 방문한 그날 따라 (닥터박이) 술을 한잔 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요. 적나라하게, 세밀하게 현실을 그대로 그려낸 작가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Q.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책을 읽으면서 여성은 정말 많이 바뀐 것 같은데 남성들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던 몇몇 장면이 있어요. 철민이 연지에게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장면도 너무 화가 났지만 (연지와 철민) 결혼 초에, 그 작은 '맨션'에 철민 친구들이 맨날 찾아오잖아요. 매번 뭘 차려내야 하고, 고주망태가 된 친구들은 집 여기저기 퍼질러서 자고. 문제적 발언을 일삼고..."

 

"철민이는 너무 추잡하고 찌질했어요. 아파트도 연지네 집에서 얻어준 거고, 연지는 결혼 기념으로 온갖 걸 선물하는데 (철민은) 꼴랑 실가락지를 주질 않나. 그래놓고 양반 집안 타령...박산지 뭔지도(?) 연지 돈으로 하는 와중에 공부에 별로 뜻이 있어보이지 않는 것도 열받았고요."

 

"경숙이 처음에 시댁과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으스대려고, 철민이네 기를 죽이겠다고 조선호텔을 잡아서 아등바등하잖아요. 그게 참...밉다기보다 안타까웠어요. 하석태(연지 아버지) 부인이 아닌 난 무엇일까, 그럴 때 짠하기도 하고. '하석태 부인이 아닌 너를 찾아!' 그런 마음이 들었다기 보다...그 정체성(하석태 부인)이 그 사람한테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정체성이라니. 너무 당황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에 '경숙이 자기 삶을 살기 위한 결심을 할까?' 싶었는데 그러지 않고 (이혼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걸 보고 어떻게 보면 참 솔직한 사람이다 싶더라고요."

 

 

약속대로 살고 있을 뿐인데도 남편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나서

왜 자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연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박완서, 서 있는 여자 중

 

 


 
 

그 남자네 집은 작가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데요.

한 작가의 첫 번째 작품과 마지막 작품을 연달아 읽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공유해보면!

 

 

남자는 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외우고 있는 시가 많았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5리를 10리, 20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차 집의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 포장마차 집에서는 딴 손님이 없을 때에만 그런 객쩍은 짓을 했기 때문에 주인 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P. 55)

 

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둑거렸다. (P. 97)

 

래간만이야, 하나도 안 변했어. 그 남자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가 있지도 않은 포탄 자국을 바라본 것처럼 지금은 있지도 않은 구슬 같은 처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자라지 않는 남자를 어찌할 것인가. 퇴행하여 소년이 된 그 남자와 내가 비교가 되었다. 나는 한 해 걸러 아이를 넷이나 낳는 동안 체중이 6킬로나 늘어난 두루뭉술한 여편네가 돼 있었다. 그 남자가 나를 보지 못하는 대신 내 눈에 내가 처음으로 똑똑하게 보였다. (...) 혼외정사보다는 아새끼를 야단치고 사람 되라고 설교하는 게 더 나에게 익숙한 정서가 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 (P. 228~229)

 

침신문 부고 난에 그 남자의 부음이 나 있었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반 이상은 추억의 무게이다. 문상은 안 가기로 했다. 결별은 그때 그것으로 족하므로. (P. 243)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Q. 마지막 책! 어떻게 읽으셨나요?

 

“그간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어요! 나목은 날 것의, 어딘가 소녀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 남자네 집은 훨씬 ‘낡은’ 사람이 쓴 이야기 느낌이 났어요. 하지만 내용 자체는 이번 소설이 훨씬 푸릇푸릇하게 느껴졌어요.”

 

“전 좀 스산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지난 책(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은 속도감 있게 읽혔는데 이번엔 쓸쓸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남자네 집에서 ‘갓뎀양구’라는 표현을 보고 어디서 많이(?) 본 문장인데 곰곰이 생각하다 나목 첫 장면이 미군의 ‘갓뎀양구’라는 외침으로 시작된단 걸 깨달았어요! 나이 든 경아(나목 주인공)를 만난 것 같아 신기한 기분이 들었어요.”

 

 

Q. 이번에도 전쟁을 겪은 후 서울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됩니다.

 

“정말 낙이 없는 시절이었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곤 산책뿐이더라고요. 아니면 씨잘떼기 없는 이야기만 나누고. 시를 낭송하는 걸 ‘사치’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어요.”

 

“시를 읽고 함께 거리를 쏘다녀주는 ‘그 남자’, 현보는 현실을 사는 남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와는 달리 남편은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잖아요. 은행원으로 열심히 일해서 식구가 늘면 생활비를 더 주고, 식량이 가장 싼 추수기에 1년 먹을 양식을 들여놔주고, 때맞춰 연탄을 사놓고.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최고의 남편이 아니었을지 싶어요.”

 

 

Q.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작품 집필 순서에 따라 처음과 끝까지 읽어봤습니다. 어땠나요?

 

“남성 등장인물은 참 매력 없게(!) 그리시는데 여자는 세상 복잡하고 원하는 게 많은 사람처럼 그려놓은 게 인상적이었어요.

 

“정말로 그런 모습을 매력으로 느끼신 거 아닐까요? 양단의 모습을 다 가진 사람을.”

 

“‘목마른 계절’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둑질을 하는 진이나, ‘서 있는 여자’ 속 ”혼자 사는 일은 용기를 요하는 일이고 용기는 곧 체력이거든. 용기가 정신력이나 고추장 먹는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오해야. 그녀는 포식한 배를 두들기며 큰 깨우침에라도 도달한 듯 이렇게 자신 있게 중얼댔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작가님은 억척스러워도 생활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 책 외에도 가족을 먹여 살리는 여성이 계속 등장하잖아요. 전쟁이나 생활고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끼니를 잘 챙기고, 잠을 잘 자야한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느껴졌어요.”

 

 


 

 

마지막 '그 남자네 집'으로 이렇게 8번의 모임이 마무리 되었습니다(와-)

전 여러 책을 읽거나,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모임은 참여해봤었는데 이렇게 한 작가를 읽는 모임은 처음이었는데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이 작가가 하고 싶은 건 이거구나!'라는 생각을,

비슷한 이야기지만 풀어가는 방식이 다른 장면에서는 '작가가 이렇게 변해왔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즐거웠답니다.(제인 오스틴 읽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다음에도 흥미로운(!) 소모임과 돌아오겠습니다. 커밍쑨...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박완서, 그 남자네 집